조재응 ()

근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전라도관찰사, 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성여(成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03년(순조 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임천(林川)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전라도관찰사, 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성여(成汝). 조학묵(趙學默)의 아들로, 조학영(趙學永)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47년(헌종 13) 유학(幼學)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53년(철종 4)에는 종묘친제 때 부응교로 참여하여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고, 1862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1864년(고종 1)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세납물의 원활하고 안전한 수송에 관심을 기울였고, 장단부의 대동세·전세를 전(錢)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며, 탐학하는 수령을 치죄하기도 하였다.

또, 경기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여 덕적도(德積島)와 주문도(注文島)에 설치된 자벽과(自辟窠) 가운데 1과를 특별히 감영에 속하게 하여 변장(邊將)을 자벽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방위를 강화하고자 소청하여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전임된 뒤 풍우의 피해가 전라도 전역에 극심하자 재난을 당한 각 읍을 돌아다니며 위무하고 구휼하였다. 1867년에는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어 재직중 전라도암행어사 윤자승(尹滋承)이 전 감사인 조재응의 실정을 지적하여 치죄할 것을 요구하는 서계(書啓)를 올림에 따라 중화부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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