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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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인왕경구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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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건립된 10세기 초부터 임진왜란이 발생한 16세기 말까지의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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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가 건립된 10세기 초부터 임진왜란이 발생한 16세기 말까지의 국어.
내용

고려시대와 임진왜란 이전 조선시대, 곧 10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국어로서 통일신라의 언어를 근간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통일신라의 언어가 현재의 동남 방언에 속하는 경주어를 중심으로 한 것이나, 중세국어는 중부 방언에 속하는 송도와 한양, 곧 현재의 개성과 서울의 언어가 중심이 되었다.

송도는 고구려의 옛 땅이므로 고구려어의 영향이 중세국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구려어와 고려시대 언어의 자료가 제약되어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에 따라서는 고려시대의 언어를 중고국어(中古國語)라고 하고, 조선 초기의 언어만을 중세국어라고 하기도 하나 언어의 중심이 동일할 뿐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언어 사이에 큰 차이가 인정되지 않은 점에서 다 같이 중세국어라 함이 온당하다.

다만 훈민정음, 곧 한글 창제로써 15세기 이후의 중세국어는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또 음운체계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14세기 이전과 15세기 이후를 구별하여 전기 중세국어와 후기 중세국어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언어자료의 풍부함과 투명성으로 말미암아 중세국어는 한글창제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국어를 지칭함이 일반적이다.

한글창제 이전의 언어자료는 모두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서 국어를 표기한 차자표기의 자료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국내자료의 경우, 이두(吏讀) · 구결(口訣) · 향찰(鄕札) 자료로 나누어진다.

이두자료는 각종 이두문서와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 · ≪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 ·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 등이 저명하다. 구결자료는 균여(均如)의 ≪석교분기 釋敎分記≫와 ≪구역인왕경 舊譯仁王經≫의 훈독구결(訓讀口訣)과 ≪남명집 南明集≫의 음독구결 등이 최근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향찰자료는 표기법 등 자료의 성격으로 ≪삼국유사≫의 향가와 같이 다루기도 하지만 ≪균여전 均如傳≫의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가 있고, 후대의 기록이나 <도이장가 悼二將歌> 등도 있다.

국외자료는 ≪계림유사 雞林類事≫ · ≪조선관역어 朝鮮館譯語≫ 등 중국측 자료와 ≪이중력 二中曆≫ 등 일본측 자료가 전한다. 그 밖에 한글로 표기되어 ≪악학궤범≫ · ≪시용향악보 時用鄕樂譜≫ 등에 전하는 고려가요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후기 중세국어자료이지만 전기 중세국어자료로도 이용될 수 있다.

한글창제 이후로는 이두와 구결 등 차자자료도 있으나, 한글로 표기된 문헌이 주된 자료이다. 한글자료는 ≪월인천강지곡≫ 등 창작된 것이 없지는 않지만, 언해서가 대부분이다.

언해서는 불교 · 유교 · 교훈 · 의약 · 역학(譯學)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어서 다양한 언어사실을 보여 준다. 그 밖에 ≪훈민정음≫ · ≪동국정운 東國正韻≫ 등 어학서와 한글로 된 구결자료 등이 있다.

한글문헌은 처음 중앙에서 편찬, 간행되었으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지방에서도 편찬, 간행되었다. 그 결과 방언의 모습이 문헌에 나타나게 되었다.

1577년(선조 10) 전라도 송광사 간행의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 ≪몽산법어 蒙山法語≫ 등에 서남 방언의 구개음화, 1569년 경상도 희방사(喜方寺:당시의 池叱方寺) 간행의 ≪칠대만법 七大萬法≫ 등에 동남방언의 어휘가 나타난 사실이 그러한 예이다.

차자자료는 우선 해독에 문제가 있으나, 한글자료의 이용에서도 언해의 양식, 중간에서의 손질, 방언의 영향 등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중세국어의 음운체계는 우선 ≪훈민정음≫의 설명과 한글문헌에 나타난 언어사실에 근거하여 15세기 중엽부터 구명한 다음, 그 전후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편리하다. 15세기 중엽의 모음은 다음과 같은 7모음체계였다.

① 양성모음 ㅗ · ㅏ

② 음성모음 ㅜ ㅡ ㅓ

③ 중성모음 ㅣ

여기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대립이 후설과 전설이냐, 저모음과 고모음이냐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14세기 이전은 후설과 전설의 대립이며, 16세기 이후는 저모음과 고모음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다. 양성모음 ㆍ는 음운 ○의 표기로 추정되는데,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제2음절 이하에서는 ㅡ로 변화되었다.

이중모음은 상승적 이중모음 ㅛ ㅑ ㅠ ㅕ ○ ㅝ 와 하강적 이중모음 ㅚ ㆎ ㅐ ㅟ ㅢ ㅔ가 있었다.

문자상으로 정확히 표기되지 못하였지만, 하강적 이중모음에 ㅣ와 반모음 y, 상승적 이중모음에 반모음 y와 ㆍㅡ가 각각 결합된 것이 더 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삼중모음으로 ㅒ ㅖㅙ ㅞ가 있다.

그런데 이중모음에서 ㅚ ㅐ ㅔ가 글자 구조 그대로 이중모음인 사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이들이 현대국어와 같은 단모음으로 변화한 것은 근대국어에서의 일이다. 중세국어의 모음체계는 모음조화로써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형태소 안에서, 때로는 다른 형태소와의 통합에서 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연결되고, 중성모음은 양성모음 · 음성모음 어느 쪽과도 연결되었으나 음성모음과의 연결이 더 많다.

이중모음은 핵모음에 따라서 양성모음 · 음성모음이 결정되어, ㅚ ㆎㅐㅛㅑ○ 등은 양성모음, ㅟ ㅢ ㅔ ㅠㅕㅝ 등은 음성모음으로 다루어진다.

또 문법형태소는 원칙적으로 두음인 모음만이 선행하는 형태소의 모음에 따라서 모음조화가 행하여지게 되어, 음운론적으로 조건된 이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예:-ᄋᆡ/의, -애/에(이상 조사), -아 · 어, -오ᄃᆡ/우ᄃᆡ, -ᄋᆞ시/으시-(이상 어미) 등. 자음체계는 현대국어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된소리에 ○, 마찰음에 ○, ㅿ의 세 음소가 더 있었다. ○은 ‘ᅘᅧ[引]’로만 나타나나, ≪훈민정음≫에 예시된 바와 같이 혀[舌]와 최소대립어를 만든다. 이 음소는 17세기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 ㅿ은 각각 유성적 환경에 나타나는 음소 β, z를 표기한 것이다.

○은 이미 15세기 중엽에 반모음 w로 변하고, ㅿ은 16세기 전반에 소실되었다. 그 밖에 ○, ㅿ과 같이 유성적 환경에 나타나는 유성 후두마찰음 ɦ이 음소로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예컨대, ‘말오[勿], ᄇᆞᇫ아[碎]’ 등의 ‘오, 아’는 ‘오ᄂᆞᆯ[今日], 아기[兒]’ 등의 ‘오, 아’와 달리 음절 두음으로 ɦ을 가지고 있었으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또 ㆀ이 15세기 중엽 문헌에서 ㅇ과 대립되어 사용되었으나, 후속하는 모음이 수의적으로 변동되는 긴장모음임을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국어의 특이한 자음의 연결규칙은 우선 어두에 두 자음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예:ᄠᅳᆮ[意], ᄡᆞᆯ[米], ᄧᆞ다[織], ᄢᅮᆯ[蜜], ᄣᅢ[時] 등. 그런데 이들 어두자음군은 전기 중세국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대와 생성과정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모음 사이에서는 원칙적으로 두 자음이 나타날 수 있으나, ㄹ을 앞세운 경우에는 그 이상의 자음도 나타난다. 예:ᄇᆞᆰ고[明], ᄀᆞᆲ디[並], ᄃᆞᇌᄣᅢ[酉時] 등. 음절말 위치, 곧 받침소리로 나타나는 자음은 이른바 8종성가족용(八終聲可足用)의 ㄱᄠᅳᆷㄷㄴㅂㅁㅅㄹ의 8자음뿐인데, 이들은 단독으로 쓰이나 그들이 결합된 ㄺ ㄻ ㄼ ㅩ 등도 쓰인다.

한편, 15세기 중엽의 문헌에서 유성자음 앞에서는 ㅅ이 수의적 ㅿ으로도 표기되었는데, 이는 ㅅ이 [z] 로도 실현되었음을 말한다.

중세국어는 성조(聲調)를 가지고 있는 이른바 성조언어였다. 한글문헌에서 성조는 방점으로 표기된다. 곧 낮은 성조인 평성(平聲)은 0점, 높은 성조인 거성(去聲)은 1점, 낮았다가 높아지는 성조인 상성(上聲)은 2점을 그 음절표기의 글자 왼쪽에 찍는다.

그런데 상성은 평성과 거성의 결합으로 해석된다. 예컨대, ‘막:대[棒], 부:톄[佛]’가 ‘막다 · 히, 부텨+이(주격조사, 거성)’에서 유래되기 때문이다. 중세국어 말기, 곧 16세기 후반에 성조는 적어도 중앙어에서는 소실되었다. 그 시기의 방점은 유명무실한 표기였다.

중세국어의 문법체계는 형태구조와 통사구조에서 기본적으로 근대국어와 같고, 세부적인 점에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그 주요한 사항만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조어법에서는 복합어간과 파생어간의 형성에서 차이가 있다. 복합어간은 두 어간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형성되는 방식이 생산적이었다. 예:빌먹-[乞食], 죽살-[生死], 됴○-(←○-+궂-, 好惡) 등.

파생어간은 명사파생 형용사와 동사파생 형용사가 특이하다. 전자는 명사에 접미사, ‘-ᄃᆞᆸ-(자음 뒤), -룹-(모음과 ㄹ 뒤, 단 ㄹ은 탈락)’의 통합으로 형성되는데, 이들 접미사는 모음어미 앞에서 ‘-ᄃᆞᄫᆡ-, -ᄅᆞᆸᄫᆡ-’로 교체된다.

예:疑心ᄃᆞᆸ거신마ᄅᆞᆫ, 疑心ᄃᆞᆸᄫᆡ니, 受苦ᄅᆞᆸ다, 受苦ᄅᆞᄫᆡ니라 등. 이 접미사는 근대국어에서 각각 ‘-되-, -롭-’으로 변화하였다.

후자는 동사어간에 접미사 ‘-ㅂ-(모음 뒤), -ᄇᆞ/브-(자음 뒤)’의 통합으로 형성된다. 예:그립-(←그리-+-ㅂ-, 慕), 믿브-[可信], 골ᄑᆞ- (←곯-+-ᄇᆞ-, 飢) 등.

굴절체계는 곡용과 활용으로 이루어지는데, 곡용에서는 다음 조사가 특이하다. 주격조사는 모음 뒤에서도 ‘-ㅣ’(단, 체언 말음이 ㅣ이면 생략된다)였다. 예:부톄, 孔子ㅣ, 불휘 등.

현대국어의 ‘-가’는 중세국어 말기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속격조사는 무정체언(無情體言)과 존칭의 유정체언(有情體言) 뒤에서 ‘-ㅅ’으로 나타났다. 예:나랏말ᄊᆞᆷ, 부텻ᄠᅳᆮ 등. 호격조사는 존칭에 ‘-하’가 사용되었다.

예:부텨하, 님금하 등. 공동격조사는 현대국어와 같이 ‘-과 · 와’였으나, ㄹ 뒤에서 ‘-와’가 나타나고 병치된 체언 사이뿐 아니라 마지막 체언에도 통합되었다. 예:입시울와 혀와 니왜(唇舌齒), 부텨와 쥬ᇰ과ᄅᆞᆯ(佛僧) 등.

보조조사 또는 첨사(添辭)로는 강세의 ‘-ᄇᆞᆺ, -곰’이 특이한 예이다. 전자는 ‘-봇’으로도 나타나나, 근대국어에 와서 ‘-곳’으로 합류되었다.

예:王ᄇᆞᆺ, 벋봇(友) 등. 후자는 부사어 뒤에 나타난다. 예:노피곰, 우러곰, 곱ᄀᆡ곰(倍) 등. 이 ‘-곰’은 수량사 아래에서는 ‘-씩’을 뜻하며, 모음과 ㄹ 뒤에서는 이형태 ‘-옴’으로 교체된다.

활용에서는 먼저 경어법과 의도법의 선어말어미가 주목된다. 경어법은 존경법(주체높임법) · 겸양법(객체높임법) · 공손법(상대높임법)의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존경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대국어와 사뭇 다르다.

겸양법은 동작의 상대되는 인물이 화자나 동작의 주체보다 상위자일 경우에 어미 ‘-ᄉᆞᆸ · ᅀᆞᆸ · ᄌᆞᆸ-’이 동사어간에 통합되는 경어법이다. 예:내 부텻긔 이런 마ᄅᆞᆯ 듣ᄌᆞᄫᆞ며, 無量壽佛 보ᅀᆞᆸᄫᆞᆫ 사ᄅᆞᆷ 등.

공손법은 접미사 ‘-ᅌᅵ-’가 현대국어와 다르다. 예:ᄒᆞᄂᆞ니ᅌᅵ다, ᄒᆞ리ᅌᅵ다, ᄒᆞᄂᆞᅌᅵᆺ가 등. 근대국어에서 겸양법이 쇠퇴하고, 그 접미사가 공손법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게 되면서 현대국어의 어미 ‘습니다, 습니까’ 등이 형성되었다.

의도법은 의도를 나타내는 어미 ‘-오 · 우-’의 통합으로 표시된다. 예:ᄒᆞ노니(←ᄒᆞᄂᆞ+-오-+니), 호리라(←ᄒᆞ+-오-+리라), ᄒᆞ노닛가, 호리ᅌᅵᆺ가 등.

이 어미가 비관형어일 경우에 1인칭 주어와 호응하는 인칭어미라는 주장이 있으나, 의문법의 ‘ᄒᆞ노닛가’는 2인칭 주어에 호응되는 등 예외가 많다. 앞으로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의도법어미는 이미 16세기 중엽에 혼란되어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어말어미 중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의문법어미이다. 문 안에 의문사(疑問詞)가 나타나는 설명의문과, 문이 나타내는 명제에 대한 가부를 묻는 판정의문에 따라서 의문법어미는 양분되었다.

전자는 ‘-고, -뇨, -료’ 등이고 후자는 ‘-가, -녀, -려’ 등이다. 예:이 ᄠᅳ디 엇더ᄒᆞ니ᅌᅵᆺ고, 일후믈 ᄆᆞᅀᆞ미라 ᄒᆞ리ᅌᅵᆺ가 몯ᄒᆞ리ᅌᅵᆺ가, 뉘 能히 證ᄒᆞ뇨, 功德이 하녀 몯하녀 등.

그러나 2인칭 주어인 경우에는 설명 · 판정의문의 구별없이 ‘-ㄴ다, ‘-ㅭ다’라는 특수한 어미가 사용된다. 예:그듸 엇던 사ᄅᆞ민다, 네 命終ᄒᆞᆫ다, 그듸ᄂᆞᆫ 이제 어듸 가…… 무를다, 너희 이 供養ᄆᆡᇰᄀᆞ라 ……大臣ᄋᆞᆯ 請ᄒᆞᇙ다…… 아ᅀᆞᄆᆞᆯ 請ᄒᆞᇙ다 등.

2인칭 주어에 일치되는 이들 의문법어미는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상당한 혼란을 보이나 소실되기는 근대국어에서이다. 어미에 의한 설명, 판정의문의 구별도 근대국어에서 없어졌다. 중세국어에서도 체언은 활용되는데, 체언의 주격형이 어간이 되어 활용어미가 통합된다.

그러나 용언의 활용어미와는 다른 교체를 보인다. 예컨대, 어미의 두음 ㄷ은 ㄹ로 변하고 모음어미 앞에 ㄹ이 덧나는 따위이다. 예:사ᄅᆞ미라(←다), 부톄이론(←-온), 불휘라ᅀᅡ(←-아ᅀᅡ) 등.

통사구조에서의 가장 큰 차이는 문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긴 문이라는 사실에 있다. 대화가 직접 인용될 경우에는 짧은 단문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대국어의 한 단락(paragraph)이 하나의 문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국어에도 계속되다가 현대에 이르면서 문과 단락의 구별이 생겼다.

그 밖에 수식구성과 종속절의 구성에도 차이가 있다. 전자는 대등한 수식어가 중복되어 체언을 수식하는 일이다. 예:이든 ᄆᆞᆯᄀᆞᆫ ᄆᆞᅀᆞ미(善淵之心), 筌ᄋᆞᆫ 고기잡ᄂᆞᆫ 대로 ᄆᆡᇰᄀᆞ론 거시라 등.

후자는 관계화 또는 명사화된 문의 주어가 속격형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예:이 東山ᄋᆞᆫ 湏達ᄋᆡ 산 거시오, 意根ᄋᆡ 淸淨호미 이러ᄒᆞᆯᄊᆡ 등.

중세국어의 어휘에서는 우선 한자어의 증가가 주목된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의 보급, 과거제도의 실시로 인한 유학의 진흥, 문물제도의 정비 등에 의하여 한자어가 급격히 침투되었다.

예컨대, 고유어의 수사 ‘온[百], 즈믄[千]’은 이미 15세기에 수식어로만 쓰이다가 자취를 감추고, 한자어가 그 경우까지 대신하였다.

15세기 중엽의 한글문헌에 한자로 표기된 수많은 어휘 이외에 한글로 적힌 ‘분별, 샹녜, 위두(←爲頭), 쥬변, 쥬ᇰᄉᆡᇰ’ 등의 예가 한자어의 증가를 말하는 것이다. 전기 중세국어 시기에는 원나라와의 특수한 관계로 몽고어가 관직 · 군사 · 말[馬]과 매[鷹] 등에 관한 어휘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문번역과 관련하여 ‘다ᄆᆞᆺ[與], 밋[及], ᄡᅥ[以], 시러곰[得], ᄒᆡ여곰[使]’ 등이 15세기 중엽의 언해서에 나타난다. 이들은 이른바 번역차용어(翻譯借用語)인데, 원래 한문의 훈독(訓讀)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므로 전기 중세국어에서 일반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어

참고문헌

『중세국어문법』(이숭녕, 을유문화사, 1961)
『국어사개설』(이기문, 민중서관, 1961;개정판, 탑출판사, 1972)
『국어음운체계의 연구』(김완진, 일조각, 1971)
『우리 옛말본』(허웅, 샘문화사, 1975)
「언어문학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한국문화사대계』 Ⅴ, 1967)
집필자
안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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