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

대동여지도 / 수선전도
대동여지도 / 수선전도
인문지리
개념
마을이나 지방 · 산천 · 지역 등 땅에 붙여진 이름.
정의
마을이나 지방 · 산천 · 지역 등 땅에 붙여진 이름.
개설

사람에게 인명이 있는 것과 같이 토지에는 지명이 있다. 이는 토지에 지명이 정하여 붙여놓는 것이 사회를 구성하여 모여 사는 인간생활에 도움을 주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도 우리 땅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어디에나 알맞은 지명을 정하고 이를 일상생활에 써왔으며, 그러는 동안에 오늘날과 같이 많은 지명이 축적되었다.

그러므로 지명 그 속에는 우리 조상의 사고와 의지가 담겨진 것도 있고, 생활 모습을 나타내는 지명도 있어서, 우리 문화 발전의 역사와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가 된다.

근년에 이르러 세계 각국은 그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고대 지명에서 현대 지명에 이르기까지 조사,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아 왔고 그 결과로 차차 지명학(地名學, toponymy, toponomy, Ortsnamenkunde)으로서의 기반을 다져왔다.

우리나라는 상고시대의 문헌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지명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아서인지 지명 연구의 성과가 보잘것없는 실정이다. 지명을 뜻하는 토포님(toponym)은 자연물 또는 지형을 의미하며, 토지에 붙여진 이름을 지칭하기도 한다.

지명에는 지형에 붙여진 지명, 행정의 필요에서 생긴 법제지명, 어떤 곳에서 생활을 하고 어떤 양식으로 생활하였는가를 나타내는 지명, 문자나 언어의 발달에 따라서 나타난 지명 등이 있다.

문화유산으로서의 우리 지명은 우리 조상들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붙인 것이므로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 용어까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지명을 연구, 조사함으로써 지역 주민의 언어·풍속·의식·도덕·종교 등의 발달과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지명을 연구함에 따라 우리 문화 발달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명의 어원적 분석도 알 수 있다. 또한 지명이 사회나 주민에게 영향을 준 사회적·행정적 기능에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구명해 볼 수도 있다. 근년에 경제개발의 촉진에 따라 생활공간이 크게 변모됨으로써 많은 지명들이 파괴 또는 변질되고 있다.

선진 개발국에서는 일실되고 변질, 사지명화(死地名化)된 지명을 회생, 보존시키려는 운동이 활발하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늦기는 하였으나 최근에는 이들의 경험을 살려 지명의 정리와 보전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분류

지명의 기원과 발달 과정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일본에서는 일찍이 야나기다(柳田國男)의 발달 단계에 의한 분류, 요시다(吉田東伍)의 기인론(起因論)에 따른 분류, 가가미(鏡味完二)의 점유지명(占有地名)의 발달서층(發達序層)을 고려한 분류, 야마구치(山口惠一郎)의 기능에 의한 분류 등이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지명을 보는 시각과 전공 분야에 따라서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역사적 언어발달·방언(方言)·이어(俚語) 연구와 병행하면서 지명을 기능별·대상별·언어학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지명 분류의 정설(定說)이 없다.

다만, 제쇼(善生永助)가 ≪조선의 취락≫에서 처음으로 취락과 지명 분류를 했으며, 근년에 이르러서는 이영택(李泳澤)이 ≪한국의 지명≫에서 지명 분류를 시도하였다. 일반적으로 지명을 다음과 같이 단순지명·자연지명·법제지명·경제지명·문화지명 등으로 분류한다.

단순지명

뜻이 있던 지명이나 별다른 뜻이 없던 지명이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온 지명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지명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으며, 우리말로 된 고유 지명이 2음절의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원래의 뜻이 사라진 채 붙여졌거나, 원래의 우리말을 한자로 바꿔놓은 결과로 별 뜻이 없는 지명이 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자연지명

자연물체지명, 위치지명, 형상·성질지명, 지형지명 등으로 구분된다. 자연물체지명이란 우주·태양·달·별 등의 천체와 계절·구름·비·한난(寒暖) 등의 기상요소, 또는 생물·무생물 등과 관련된 지명을 가리킨다.

양지·음지·월평(月坪)·칠성(七星) 등 천체·기상에 관계되는 지명이 많은 것은 우리 나라가 벼농사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대석리(大石里)·철산리(鐵山里) 등 무생물에 붙여진 지명도 많다. 위치지명·형상지명·성질지명은 방위(동·서·남·북·중)·위치(상하·앞뒤·고저·내외·좌우 등)·형상(대소·원·각·곡직·합·신구 등)·성질(맛·색·토질)·숫자(일·이·삼……천·만) 등과 관련된 지명이다.

예를 들면 화동(華東)·남양(南陽)·내동(內洞)·대기(大基)·감천(甘川)·일산(一山) 등이다. 근년에는 주로 도시의 동 이름에 숫자를 나열하거나 방위를 따 붙인 것이 많다.

지명에는 그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므로 그 지역의 암석이나 토질의 색을 딴 백·밝[明→博]·검[黑→今·禽·錦·穴·熊] 등과 같은 것도 많다. 또한, 산·들·강 등의 모양이나 색깔에서 유래한 것도 많고, 돌이 많은 곳은 물[乭水, 石乙水]·반석(斑石→玄武岩) 등의 지명도 있다.

물이 깨끗하고 맛이 좋아서 각지에 달천(達川)·감물(甘勿)·달내[甘川] 등의 강 이름이 많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지형지명은 산천·해호(海湖)·천정(泉井)·평야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와 같은 종류의 지명이 많은 것은 변화가 많은 자연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산곡(山谷)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산·고개·바위를 많이 접하고 해안 가까이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바다·파도 해안의 지형 등과 밀접한 생활을 한다.

따라서, 산중의 계곡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산의 모양이나 특징에 따라서 단순한 산·악·봉 외에도 산봉우리에 산의 특징을 나타내는 독특한 이름을 붙인 예가 많다. 노고단(老姑壇)은 산꼭대기에 제단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제주도에서는 산을 ‘오름’이라 하여 올(兀)·쉬[犀]자 등으로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지역에 따라 산에 대한 개념이 달라 산을 나타내는 지명은 갈미·부리·수리·모로·두리·덤·터·대(垈)·당·암(巖)·망(望)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하천도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터전이어서 강과 물에 대한 지명이 풍부하다. 이것에는 상류의 분수령이 되는 곳에 수분(水分)·수원(水原), 중류에 중강(中江), 하류에 하단(下端)·단천(端川), 하구에는 하구(河口)·강구(江口) 등 위치에 따른 지명이 있다. 강과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서는 하동(河東)·강서(江西)·수변(水邊)·천변(川邊)·상(上) 등이 있다.

또,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농업국이었으므로 농사의 풍흉을 가리는 홍수나 가뭄에도 큰 관심을 보여서 수풍(水豊)·수여(水餘)·수해(水害, 水海)·상수일(上水溢)·하수일(下水溢)·둑섬·물금[水禁→勿禁] 등의 지명이 많다. 이는 물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천은 교통로로서의 구실도 컸는데, 이 중에서도 합류점은 두 하천의 물이 교류되는 곳이어서 합수(合水)·양강(兩江)·양수(兩水)·교하(交河)·병천(竝川)·삼강(三江) 등과 수구(水口)·강구·어구(於口) 등 구자가 붙은 지명이 무수히 많이 있다. 우리 나라의 하천은 심한 곡류를 이루면서 흐르는 강이 많다.

따라서, 이런 곡류에 임한 곳에는 곡수(曲水)·곡천(曲川)·구곡(九曲) 등의 곡자 지명과 수회(水回)·도랫말[回洞] 등 회자 지명이 많이 분포한다.

한편으로 물이 돈다는 뜻의 돈[敦, 錢]·돌[石, 突] 등의 글자가 쓰여 강돈(江敦)·[돈·개]·전포(錢浦)·돌머리[石隅, 石頭] 등의 지명은 전국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곡류를 뜻하는 구비(仇俳)나 강의 곡류 형태를 나타내는 궁(弓川)·을(乙→八乙川)·지(之→之川)자가 붙은 강 이름도 보인다.

전국의 해안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자연지명은 ᄀᆞᆷ·ᄀᆞᄅᆞᆷ에서 유래한 가람·구미에서의 곰[熊]·검[黑, 儉]·굼[穴]·감(甘)·금(金, 錦, 今, 禽) 등과 가마[釜, 加馬]·고마(古馬)·계마(桂馬)·갈마(葛馬)·가막(駕莫) 등이 있다.

반도나 곶을 나타내는 갑(岬)·곶(串)·단(端)·감(堪)·두(頭)·말(末)자 등이 붙은 지명도 많고, 육계도(陸繫島)의 사주(砂洲)를 뜻하는 목[項] 지명도 해안 지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예로는 목섬 [項島], 충무공의 전적지로 유명한 우술목[戊戌項]등이 있다.

무인도는 불모도(不毛島)와 동의어이므로 불모와 음이 비슷한 불무[冶, 대장]를 차용하여 불무섬·야도(冶島) 등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 많다.

또한, 무인도를 뜻하는 불모도는 대머리의 대[禿]를 차용하여 대섬[禿島]이 되며, 음이나 훈이 같은 대섬[大島, 竹島] 등을 붙인 지명이 많다. 독도(獨島)는 독도(禿島)의 한자가 바뀐 것이며, 일인들이 독도를 대섬[竹島, 다케시마]이라 부르는 것도 우리 나라 말에 그 뿌리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형이나 자연현상을 지명과 연관짓는 재주가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 금이 생산되는 지역에는 금·광 등이 지명에 많이 붙여졌고, 온(溫)·부(釜) 등의 글자가 붙은 곳에서 온천이 발견된 예가 많다. 온천리·온정리·온수리·온양 등은 이런 예에 속한다. 지명이 전국 온천 가운데 과반수를 차지한다.

법제지명

토지·세제지명, 경계·군사지명, 관아·행정지명 등으로 나누어진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농업을 중히 여겨 왔으며 중세에 토지제도가 확립되어 정전(井田)·공세(貢稅·公稅)·방축(防築)·제언(堤堰) 등의 지명이 많이 있다.

조선 시대까지 조세미를 운반하던 조창(漕倉)은 강상(江上) 수송의 수운창(水運倉)과 해상 수송의 해운창(海運倉)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결과로 전국 각지의 강가나 바닷가에 창 지명이 많다. 경계·군사지명은 경계(境界)·관방(關防)·성채(城寨)·목마(牧馬)·역체(驛遞)·도진(渡津)·봉수(烽燧)·진영(鎭營) 등에 관련되어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말기까지 지방행정의 경계 지역에 토게(土界)·지계(地界)·지경(地境)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인제현과 양양현의 경계를 뜻하는 한계(限界)에서 유래한 한계령(寒溪嶺)도 경계지명의 대표로 꼽힌다.

압록강·두만강 국경 지대에는 이민족과 접한 관계로 적유령(狄踰嶺)·훈융(訓戎)·무이(撫夷) 등 오랑캐를 다스리는 지명이 있다. 방위지명으로 이문(里門)은 야경을 서는 경계문이었으며, 변방 지역에는 남관(南關)·동관(潼關)·삼방(三防) 등이 있다.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에는 진·보·둔전(屯田) 등이 있는데, 혜산진(惠山鎭)·만포진(滿浦鎭)·어면보(漁面堡)·인차보(仁遮堡)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조선 시대에는 8도에 병영(兵營)이 배치되어 있어서 울산의 병영이나 강진의 병영이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남아 있고, 충청·전라·경상도 3도에는 절도영(節度營)이 있었으며,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던 여수(麗水)에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도 부산의 수영·통영·우수영 등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우리 나라에는 곳곳에 토성(土城)·산성지명이 남아 있으며, 이에 따라 성내·신성·성동·성남 등의 지명이 많다. 읍성(邑城)도 많아서 한성·화성·고성·음성·보성·의성 등 전국 각지에 성 지명이 무수히 분포하고 있다. 군사상의 편의를 위한 역체제도가 갖추어져서 역·원·파발 등의 지명이 각지에 남아 있다.

그 예로는 과역(過驛)·역촌(驛村)·사리원(沙里院)·조치원(鳥致院)·구파발(舊擺撥)·파발막(擺撥幕) 등이 있다. 나루터도 역체제와 같이 평시에는 교통의 편의를 주고, 전시에는 군사적인 기능을 가지게 되므로, 바다와 강가에 나루터취락이 발달하였다.

벽란도(碧瀾渡)·목도(牧渡)·노량진(露梁津)·영산포·(榮山浦) 등이 그 지명으로 남아 있다. 관아·행정지명은 궁궐·내수(內需)·관아·관직·단묘·능묘·행정 등에 관련된 지명이다.

서울에는 세종로(世宗路)·원남동(苑南洞)·경운동(慶雲洞)·내자동(內資洞)·팔판동(八判洞)·사간동(司諫洞) 등 궁궐이나 내수·관직에 관계되는 지명이 옛 왕궁 주변에 많이 붙여져 있다.

서울에는 좌묘우단(左廟右壇)이라하여 종묘, 사직단(社稷壇)이 있는 묘동, 사직동이 있고 지방에는 능서면이나 태릉·홍릉 등과 삼묘리(三墓里)·묘막리(墓幕里) 등의 능묘지명이 있다. 지방에는 현리(縣里)·현내(縣內)·부동(府東)·군남(郡南) 등 지방행정에 관련된 지명이 있다.

경제지명

산업지명과 교역지명으로 나누어진다. 농경의 역사가 오랜 우리 나라에는 개간·농경·농지·제언(堤堰)·간척·농경·농산물 등에 관련된 지명이 많다.

즉, 개간과 관련된 신촌·사근(沙斤)·장(庄) 등과 농경·농지에 관련된 평촌(坪村)·여덟배미[八夜] 등의 지명이 그것이다. 농막(農幕)·방축·언안[堰內] 등 농경에 필요한 시설과 농산물의 이름이 붙은 지명은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이 밖에도 축산업·수산업에 관련 있는 우도(牛島)·마양도(馬養島)·방어진(方魚津)·청어구미(靑魚九미)·구을비도(九乙非島, 굴비섬) 등 수산 관계 지명이 있다.

소나무·버드나무 등의 수목이나 목벌(木伐)·판막(板幕) 등의 임업에 관한 지명, 금·은·동·철 등의 지하자원과 이를 거래하던 점(店)·막(幕)소(所)·장(場)자 지명도 산간 지역에서 많이 보인다.

우리 나라는 요업이 일찍이 발달한 나라이어서 사기(沙器)·와동(瓦洞) 등의 지명이 전국에 널리 분포한다. 교역지명이란 상거래·시장 등에 관계되는 지명이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마필(馬匹)은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으나 일반 서민은 도보로 여행을 하였다.

따라서, 여행자를 위하여 만든 주막(酒幕)·떡전[餠店]·거리(巨里, 街里) 등을 비롯하여 노(路)·정(程,亭)·장승(長丞, 長舛,長栍)·참(站)·관(館)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교통상 중요한 분기점에는 사거리·분기(分岐)·나들이·구(口)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고, 고개 밑에는 영하(嶺下)·현저(峴底)·대치(大峙) 등과 목[項]·재[峙]를 뜻하는 재[在, 才, 財, 尺]와 너미[越, 踰]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우리 나라에서는 5일마다 재래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시장과 관련하여 이일시(二日市)·구일시(九日市)·시변(市邊)·김량장(金良場)·신시(新市)·장터[場基, 場垈]·입장(笠場) 등 시·장 등의 글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

문화지명

인물·인사지명과 어문(語文)에 관한 지명으로 나누어진다. 인물·인사지명이란 성씨·인물·민족·생활방식·도덕·풍속·미신·종교·교육 등과 연관되어 붙여진 지명을 말한다.

우리 나라의 동성 마을은 멀리 부족사회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한다. 동성 마을은 종약(宗約)·계(契)·보(寶)·위토(位土)·제사 등을 중심으로 친족과 종문이 모여 살고 있다.

동성마을의 동리 이름은 남한에는 유교에 관한 윤리적인 지명이 많고, 북한에는 김촌(金村)·최가동(崔哥洞)·전주이촌(全州李村)·조전리(趙全里) 등과 같이 성씨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이 밖에도 세종로·충무로 등과 같이 인명이나 시호(諡號)로 된 지명이 있다.

또한, 당진(唐津)·왜관(倭館) 등과 같이 교역 상대국의 국명을 딴 지명이나 탐라(耽羅)에 대한 탐진(耽津: 강진), 한성(漢城)으로 건너가는 한진(漢津: 당진시 신평면) 등의 상대 지역의 이름을 딴 지명도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숭유사상이 고조됨에 따라 공덕동(孔德洞)·안맹리(顔孟里)·퇴계로(退溪路) 등 성현의 이름이나 시호를 딴 곳이 있게 되었다. 또한 효자·도덕·충의 등 오륜·도덕에 관계되거나 향교리(鄕校里) 등과 같은 유교지명이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산수의 모양이나 시각을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계하여 이해하려는 풍수지리설은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도참설(圖讖說)과 혼합되어 인간의 운명이나 행복에 관한 각종 점·예언을 만들어냈고, 다시 도교사상이 도입되면서 체계화되었다.

이에 따라 풍수지리와 연관된 지명이 많이 붙여졌는데, 서울의 묵동(墨洞)·연촌(硯村)·필암산(筆巖山: 지금의 佛巖山)은 먹·벼루·붓으로 서로 지기(地氣)를 보완하려는 것이며, 비봉(飛鳳)·와룡(臥龍) 등은 명당자리를 나타내려는 흔적이다.

민족종교가 차츰 체계화됨에 따라 당(堂)·성황(城隍)·입석·지석 등과 같은 지명이 많아졌고, 불교가 널리 포교됨에 따라 절골·탑골·미륵·관음 등의 불교지명이 많아 졌다.

특히, 사찰이 있는 산의 이름에 불교에 연원한 지명이 많다. 그런가 하면 평안북도 운산군 성면에는 재터[城址]가 평안도 사투리의 대터[竹垈]로, 또는 기업지명으로 틀무시[기지시: 당진시]가 경상도 사투리로 털무시[毛冶市]로 바뀐 방언지명이 있고,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에는 우리말에 한자어를 빌려 쓴 어두은골[於杜隱洞 : 해가 일찍 지는 곳]도 있다.

이와 같은 차자(借字)·차음(借音)지명은 전국 각지에 무수히 많다. 이두지명으로 창원시에는 ‘가운데[加音丁]’라는 동이 있고, 서울에는 ‘너의’ 뜻인 여의도(汝矣島)가 있으며, 한국한자(韓國漢字)로 갈(乫)·돌(乭)·끝(唜) 등의 특수한 글자로 된 지명도 많다. 이러한 이두나 한국한자는 우리 나라의 지명에서 언어 연구의 자료로 이용되는 경우가 된다.

한편, 성인·간지(干支)·외설(猥褻) 등에 관한 글자는 지명에서 기피되었다. 그러므로, 대구(大丘)의 구(丘)는 공자의 이름으로 구(邱)자로 바뀌었고, 뒷산 이름인 오산(午山)이 간지에서 유래된다하여 마산(馬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외설적인 지명으로 전라남도 완도군에 딸린 자지도(者只島)는 당사도(唐寺島)로 바뀌었다. 외래어가 지명으로 된 것도 있으며, 혼용·오용·쟁탈지명도 적지 않다.

의준지명

의준지명(擬準地名)은 덕산리의 ‘덕’과 대야리의 ‘야’를 합하여 ‘덕야리’로 하는 등의 합성 지명을 일컫는데, 근년에는 행정관들의 책상 위에서 무작위로 양산되어 무의미한 지명으로 꼽히는 것이 많아졌다.

이와 아울러 1동·2동 등의 숫자지명, 동·남·중 등의 방위지명도 근년에 그 수가 많아지고 있어 지명에 혼란을 더하는 한편 막대한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변천

지명은 그 지역의 사회가 변천하거나 심지어 이민족에게 점령되어도 토지의 고유명사로 존속되는 경우가 많다. 토지라는 부동의 것에 붙여진 지명은 토지의 계속성·고착성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지명의 변천은 크게 신라 경덕왕 이전의 삼한·삼국시대를 포함한 고대지명, 통일신라시대의 고대후기지명, 고려·조선 시대의 중근세지명, 오늘날의 현대지명 등으로 분류된다.

고대지명

자연발생적으로 쓰여오던 우리 나라의 땅 이름은 삼한과 삼국이 성립되면서 3국으로 나누어져 발달하였다. 삼국의 군현명에 대한 재래의 고유명이 ≪삼국사기≫ 지리지에 실려 있어 지명의 역사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권34·36·37에 신라 지명 141개, 고구려 지명 186개, 백제 지명 197개 등 모두 524개에 달하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신라 경덕왕 때 개칭된 새 지명과 함께 옛 지명인 고유명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이두·향찰식 문자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우리 고대국어의 중요한 언어자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 선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지명을 바꾸었으며 지명에 나타나는 생활양식과 의식구조는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삼국의 고유지명을 보면, 삼국이 각기 집단 거주의 근거지인 취락을 의미하는 지명 어휘를 제2음절 아래에 붙이는 특성이 있다.

신라는 음을 빌린 ‘벌(伐)·불(弗)’과 훈을 빌린 ‘블[火]’로 대표되는 ‘벌·블’을, 백제는 음을 빌린 ‘벌(伐)·부리(夫里)’로 대표되는 ‘벌·부리’를, 고구려는 음을 빌린 ‘홀(忽)’로 대표되는 ‘골·홀’ 등을 접미하여 호칭하였다.

신라 지명에서 볕이 잘 드는 곳을 나타내는 ‘볕벌’은 ‘비사벌-볏벌-볕벌(比斯伐-火王郡 : 앞은 고유지명이며 뒤는 개명지명임.)’이고, 산세가 느른한 곳을 의미하는 ‘늣벌’은 ‘노사벌-놋벌-늣벌[奴斯火縣-慈仁縣]’ 등이다.

백제 지명에서 지세가 곧고 긴 곳을 나타내는 ‘곧벌’은 ‘고사부리-곳부리-곧벌(古斯夫里-古阜郡)’이며, 고구려 지명에서 새롭고 밝은 곳을 나타내는 ‘새밝골’은 ‘새벌골-새밝골[沙伐忽-陽城縣]’, 높은 봉우리에 있는 곳을 의미하는 ‘수리골’은 ‘술이골-수리골[述尒忽縣-云首泥忽-峯城縣]’ 등이다.

이들 고대지명에 붙는 보통명사를 보면 신라·백제의 ‘벌·블·부리’는 오늘날 ‘벌판·갯벌’ 등의 벌과 같은 어원으로, 이들 나라에서는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고구려의 ‘골’은 오늘날 ‘골목·골짜기’의 골과 같은 어원으로, 이 나라에서는 주로 산악지대에서 산성이 아닌 곡성(谷城)을 쌓아 취락을 이룬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의 ‘외뫼[烏也山縣]’ 또는 ‘외뫼골’, 물이 들어오는 어귀를 나타내는 ‘믈들이-물들이[買珍伊縣―溟珍縣]’ 또는 ‘물들이골’, 백제 지명에서 냇가를 나타내는 ‘나리아[乃利阿縣-利城縣]’ 또는 ‘나리아골’, 고구려 지명에서 글을 읽던 바위를 나타내는 ‘글바위[文峴縣-文登縣]’ 또는 ‘글바위골’ 등이 있다.

고대후기지명

우리 나라에서 국명·왕명이 한자 이름으로 고쳐진 때는 신라 지증왕 4년(503)이었으나 대부분의 지명은 경덕왕 때에 바뀌었다. 고대지명은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었던 관계로 한자의 차음·차훈·이두 등이 쓰여졌으며, 많은 한국한자가 고안되어 함께 혼용되었다.

술이홀(述爾忽)은 ‘술이’가 ‘산’이므로 봉성(峰城)이 되었고, 제차파의(齊次巴衣)는 ‘파의’가 ‘바위’이므로 공암(孔巖)이 되었다.

어을매(於乙買)는 ‘어을’이 ‘어울이다’의 뜻이고 ‘매’가 ‘강’을 뜻하므로 교하(交河)로 되었다.

금물노(今勿奴)는 ‘금믈’이 ‘검다[黑]’의 뜻이고 ‘노’가 ‘땅’을 가리키므로 흑양(黑壤 : 지금의 진천군)으로 되었으며, 진악산(珍惡山)은 ‘진악’이 ‘조약돌’을 뜻하므로 석산(石山 : 지금의 부여군 석성면)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우리말로 된 고대지명이 한자를 차용한 2음절의 한자 지명으로 변천되어 통일신라 시대에 쓰여졌으나,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우리말의 지명이 오늘날까지 쓰여지고 있다.

중근세지명

경덕왕 때에 2음절의 한자로 바뀐 지명이 오늘날까지 계속 쓰이고 있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의 지명은 고려 왕조가 들어서면서 변경되었다. 고려 시대에 고쳐진 지명은 거의 대부분이 조선 시대에까지 계속 쓰여졌다.

다만 행정 체계에 따라 지명에 위계를 붙여 주(州)를 천(川)·성(城)·산(山)·곡(谷)·양(陽)·원(原) 등으로 바뀌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수원(水原)은 상고시대에는 매홀(買忽)이었는데 ‘매’는 ‘물’을 뜻하고 ‘홀’은 ‘성’이므로 고대 후기에 수성(水城)으로 바꾸었다가, 고려 시대에는 수주(水州)로, 조선 시대 이후에는 수원(水原)으로 바뀌었으나 근원인 ‘물·수’자는 변하지 않았다.

왕조가 바뀜에 따라 민심의 쇄신을 위하여 지명을 변경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지명은 토지 고착성이 강하여 쉽게 바뀌지 않았다.

한 고을은 어떤 사람의 공과(功過)에 따라 고을 이름이 승격, 강등되기도 하는데, 충주시의 경우 고려 개국 이후 고종 32년(1895)까지 무려 23회나 강등·복귀·승진·개명 등을 되풀이하였다.

현대지명

조선 말엽 1895년 이후 오늘날까지의 지명을 현대지명이라 부른다. 조선8도제에 의한 지방행정 기구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도호부사는 전국에 44원, 군수 82원, 현령 34원, 현감 141원이었다. 지방행정기구가 8도제에서 23부제를 거쳐 1896년에 13도제로 개편되면서 일부 지명이 변경되었다.

예를 들면 금천(衿川)이 시흥(始興)으로, 양주(梁州)는 양산(梁山)으로, 산음(山陰)이 산청(山淸)으로, 낭천(狼川)이 화천(華川)으로 바뀌었다. 그 뒤 1914년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으며, 이 때에 지명도 대폭 변경되었다. 군은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322개에서 2,518개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군은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이 합하여 양평군으로, 황해도의 연안군(延安郡)과 배천군(白川郡)이 합하여 연백군으로 바뀐 정도이나, 면·동·리에서는 무수한 지명 변경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성(漢城)을 경성(京城)으로 바꾼 외에도 동명(洞名)을 대부분 일본식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광복 후에는 경성을 다시 서울이라 부르게 되었고, 새로 승격된 시·읍에는 새로운 지명이 많이 등장하였다. 한편 이때까지 시와 군이 다른 이름으로 붙여지던 전통을 깨고, 안동군과 신안동시(新安東市)로 공고하였다가 공포 후 한달 만에 안동시로 환원하여, 시와 군의 지명을 같게 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광복 후 북한에서는 김정숙군(金貞淑郡)·김책시(金策市)·샛별군(샛별은 김정일의 호) 등의 인물지명과 5·1노동자구, 28리, 39리 등의 날짜지명, 선봉리(先鋒里)·개혁동(改革洞)·동포리(同胞里)·친선동(親善洞)·상봉동(相逢洞) 등의 구호지명(口號地名)과 같은 조작지명이 많이 생겨났다.

또 해방동·전승동·붉은거리·영웅리·전우동 등 호전적인 것이 많이 있고, 과일군과 같은 특수한 지명도 있다.

문제점과 관리

지명의 문제점

우리나라의 지명이 혼란을 겪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지명과 직접 관계되는 법이 너무 많아 제대로 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률로는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 조치법>(지방자치단체의 명칭과 경계)·<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 조치법>(수복지구의 행정구역 명칭과 경계)·<공유수면 관리법>(항만의 명칭)·<다목적댐법>(댐의 명칭)·<온천법>(온천지구의 명칭)·<하천법>(하천의 명칭)·<도로법>(도로의 노선명)·<공원법>(공원의 명칭)·<산업기지개발촉진법>(산업기지 개발구역의 명칭)·<지방공업 개발법>(개발 지구의 명칭)·<특정지역 종합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 조치법>(개발예정지구의 명칭)·<측량법>(위의 법에서 제정한 지명 이외의 소지명)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독립되어 지명을 제정, 공포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예를 들면 국제적으로 통하는 황해를 기상청에서는 서해로, 당진시 대호지면의 간척지를 건설교통부에서는 임의로 대호간척지로, 장안동에 있는 지하철이 장한동으로 공포되어 지형도상의 지명과 상반된다.

지명이 오용되고 혼용된 예가 많은데 한강대교의 중간에 있는 강섬을 일본말인 중지도(中之島)라고 부르고, 여의도를 윤중(輪中)으로 부르는 것이 거의 굳어지고 있다. 심지어 여의도에는 윤중중학교라고 불리는 학교까지 있다.

이들은 모두가 일본인이 쓰는 용어이며, 특히 윤중이란 일본 나고야 부근을 흐르는 기소강(木曾川) 하류 삼각주의 뚝섬에 붙여진 이 지방 특유의 방언이다.

그런데도 서울 한가운데에 일본의 방언으로 된 지명이 붙여져 일본인들의 호기심과 비웃음을 사고 있다. 이보다 더욱 심한 것은 지명의 혼용이다.

대체로 면 단위 이상의 지명은 기관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널리 쓰여짐에 따라 한자음의 지명으로 통일되어 가는 경향이 있으나, 소지명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우리말 지명과 한자음 지명이 섞여 쓰고 있어 혼란을 빚고 있다.

예를 들면 ‘버들골’과 ‘유곡(柳谷)’이 동시에 혼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한 곳의 땅이름이 두 가지 이상으로 불리고 있는 곳은 공용어가 영어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캐나다와 같은 나라를 제외하고 세계에서 우리나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철원의 경우 광복 전에 군청 소재지였던 철원과 현 군청 소재지인 철원 지포리(芝浦里)가 다르고, 또한 철원읍이 별개로 있다.

오늘날의 군청 소재지는 갈말읍(葛末邑)이어서, 이들 세 가지 지명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최근에는 시와 군이 합하여 새로운 시로 부르게 되면서 지명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경상남도 삼천포시(三千浦市)와 사천군(泗川郡)이 합하여 사천시로 바뀌면서 삼포를 사천시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원래의 사천읍과 지명 혼란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예는 파주시·보령시·문경시·거제시 등도 마찬기가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지명은 심하게 합성, 변조, 감소되고 있다. 동명에 법정동(法定洞)과 행정의 편의에 따른 행정동(行政洞)이 따로 있다. 예를 들어 종로1·2가동이라는 행정동이 있고 이 안에 종로1가동·종로2가동을 비롯한 17개의 법정동이 포함되어 있다.

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으로 편의상 통합한 것이 행정동이다. 그러므로 종로1가는 양쪽을 겸하는 지명이 되고, 이로 인하여 동의 범위가 광역화되어 지번(地番)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숫자지명과 방위지명이 범람하여 전래의 유서 깊은 지명이 사지명화되어 가고 있다. 서울 신림동의 경우 신림본동·신림1동…신림11동에 이르기까지 12개 동이 있다.

넓은 지역에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동을 행정동으로 분할하여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의 서열과 그 위치가 흐트러져 있다. 소지역의 유서 깊은 이름을 행정동의 지명으로 채택한다면 이와 같은 혼란이 사라질 것이다.

근년에는 방위지명도 부쩍 증가하였다. 그 중에서도 서울의 강동·강남·강서구·송파구는 한강 남안에 동서로 이어져 있어 방위 개념과는 동떨어진 행정명이다. 이와 같이 행정 지명이 혼란을 빚는 원인은 여러 법조문을 근거로 한 각 부처에서 지명을 관장하는 교통건설부나 국립지리원과 상의 없이 지명을 고시하기 때문이다.

기타 요인으로는 쉬운 우리말 지명을 어려운 한자 지명으로 바꾸려는 생각, 풍수지리설에 얽매인 고정 관념, 유교 사상으로 미화시키려는 충동, 유지들의 고집 등을 들 수 있다.

공고를 할 때 안동군과 신안동시, 나주군과 금성시(錦城市)로 구분되어 있던 것을 주민들의 위세와 고집으로 안동시·나주시로 얼마 안 되어 개명해버린 것을 그 예로 들 수있다.

지명의 관리

현재 쓰이고 있는 지형도상의 지명이 정확하게 조사되었다고 할지라도 제도하는 과정에서, 또는 이의 교정 과정에서 지명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나 반대로 로마자 지명을 한글로 표기할 때는 교육부의 표기안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제멋대로 쓰고 있다.

현재 쓰이고 있는 표기안은 매큔 라이샤워의 표기안을 기초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 으→ŭ, ㅋ→k○, ㅌ→t○, ㅍ→p○, 등으로 기호를 쓰게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들 기호가 무시당하고 있으므로 표기에서 많은 혼란이 생기고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명은 쓰는 사람 개개인의 의사에 맡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지명을 총괄하는 국립지리원의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지명의 조사·제정·통일·표기·연구가 이루어지도록 각 부처간에 분산된 지명에 관한 업무가 건설부에서 통괄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두·고어(古語)·성운체계(聲韻體系) 등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일본의 ≪고사기 古事記≫·≪일본서기 日本書紀≫ 등에 대한 연구도 우리의 지명 연구의 자료가 되므로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한글학회에서는 잊혀져 가는 소지명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한국지명총람≫을 발간하였고, 1981년 한국땅이름학회가 설립되어 지명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지명도 언어의 일종인 이상 집단의 언어구조·언어의식·자연관·사회관 등의 변천에 따라 신진대사를 하며 변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유명사로서의 지명은 이들 여러 가지 객관적 여건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를 초월하여 계속 이어지는 성격도 강하다. 지리학계에서 지명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는 있으나, 오히려 국어학·언어학·역사학·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더 깊은 연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대별로 지명 변천의 대조가 가능한 것이므로 앞으로는 국어연구원·국사편찬위원회·땅이름학회 기타 관련 연구 기관에서 연계하여 체계적인 지명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각 지역별로 동호인들에 의한 지역의 지명 연구지가 활발하게 연구, 조사, 간행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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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名の語源』(鏡味完二, 1977)
『地圖ど地名』(山口惠一郎, 1974)
『朝鮮の聚落』(善生永助, 1933)
집필자
이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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