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거부운동 ()

근대사
사건
일제가 조선 청년을 강제동원해 일본군에 투입키로 한 징병제(徵兵制)의 시행에 반대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
목차
정의
일제가 조선 청년을 강제동원해 일본군에 투입키로 한 징병제(徵兵制)의 시행에 반대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3년 3월 1일자로 개정병역법을 시행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 징병제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 장정들이 병원(兵員)으로 동원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징병은 이러한 지원병 동원까지를 포함한 넓은 개념으로 인식해야 하고, 이에 대한 거부운동 또한 전체로서 파악해야 한다.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 청년을 군인으로 동원한 과정은 몇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일제는 1937년에 도발한 중일전쟁이 확전되어가자, 조선에 대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자질이 우수한 조선 청년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다 병력으로 흡수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착안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2월, 칙령 제95호로써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연령 만 17세 이상으로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원자로서 신체검사 합격자는 조선총독부 육군병지 원자훈련소에서 4개월의 훈련을 받은 다음 현역 입대하거나 제1보충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말이 지원병일 뿐,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되어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리하여 전국의 총지원자는 첫 연도인 1938년에 2,964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무려 25만1594명에 이르는 기현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결과로, 징병제 실시로 지원병제가 폐지되는 1943년도까지 총 1만7664명이 육군지원병으로 동원되었다.

이어서 일제는 1943년 7월 칙령 제108호로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8월부터 시행함으로써 다시 해군지원병이 동원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제1기생 1,000명, 1944년 4월에 제2기생 2,000명이 진해에 있는 해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의 훈련을 받은 뒤 해병단(海兵團)에 입대하였다.

다음 단계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학도지원병이다. 태평양전쟁에서의 병력 소모가 가속화되자, 일제는 1943년 10월 병역법 일부를 개정하여, 고등·전문학교 이상 재학 중의 법문계(法文系) 학생에 대한 징집유예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징집유예를 받고 있던 일본의 법문계 학생들이 같은 해 11월 일제히 입대하였다.

내용

이와 관련해 일본정부는 같은 해 10월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써 〈쇼와(昭和) 18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해,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 학생들에 대해서도 법문계 재학생 또는 졸업생의 병원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 조치로 국내외를 통해 4,385명의 해당자들이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문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예비과정을 거치는 한편, 1943년 8월부터 시행한 개정병역법에 의해 전면적 징병제 실시단계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44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되어 모두 20만6057명이 징병검사를 받았고, 합격자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의 일제 패망 때까지 순차적으로 징집되었다. 입대 인원은 최소한 18만4000명 이상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일제는 지원병·학도병·징병 등의 동원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코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계도·권장·강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피, 거부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우선 학도지원병의 경우, 적지않은 인원이 지원을 거부, 기피해 응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 동지를 규합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주요 근거지였다.

학도병으로 입대한 경우에도 교육중의 일본군부대에서 반란과 집단탈출을 모의하거나, 일선에서 연합군측으로 탈출해 항일대열에 참가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1944년 8월에 있었던 대구 제24부대 학병들의 집단탈출사건, 같은 해 11월에 발각된 평양사단(平壤師團) 산하 각 부대 학병들의 반란 및 집단탈출 모의 등은 대표적 반군사건으로 일제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한편, 전선으로 동원된 뒤 중국군 지역으로 탈출해 광복군(光復軍) 또는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넘어가거나, 남방전선에서 미·영군(美英軍)측에 투항해 항일전열에 참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학도지원병에서 이러한 저항이 일어난 것은 일본이 패전에 대한 확신과 일본군대에 동원되는 것에 대한 민족적 저항심 때문이었다.

징병에 있어서도 이를 반대, 거부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1944년 4월부터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될 때 국내외의 적령장정 총수 26만6225명(국외거주자 5만2059명) 중 수검예정인원은 21만8659명이었다. 그러나 수검기일인 8월 20일까지 수검하지 않은 인원이 5.8%인 1만2602명에 달하였다. 이는 갖가지 방법으로 징병검사에 불응한 인원이다.

이러한 징병검사 불응·기피에 대해 총독부가 작성한 ‘제85회제국의회예산설명자료’는, ‘징병 곧 전사라는 그릇된 관념에 아직도 사로잡힌 채, 적령자로 하여금 도피하게 해 소재를 감추고, 혹은 호적연령을 정정해 이를 기피하려’'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징병검사를 받고 징집에 응하지 않은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일제 당국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많은 인원이 징병을 거부했던 사실은 그들의 기록에서 나타나 있다.

징병기피자들은 학병기피자·징용기피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산간지대에 도피·은신해, 함께 집단을 이루어 조직화·무장화되면서 후방 치안에 위협적 존재가 되어갔다. 또, 징집에 응해 일본군에 입대한 경우에도 상당수가 전선에서 탈출, 연합군 진영으로 넘어갔다. 1945년 2월 중국군 제9전구(第九戰區) 내에서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가 편성될 때 탈출 학도병 13명과 160여 명의 징병탈출자로 편성된 사실은, 특히 중국전선에서 징병탈출자가 많았던 것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일제하강제인력수탈사』(김대상, 정음사, 1975)
『해방직전사의 재조명』(김대상, 해성,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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