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거부운동 ( )

근대사
사건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민족운동.
내용 요약

창씨개명 거부운동은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민족운동이다. 조선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추진하던 일제는 황민화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0년에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창씨하여 호적계에 신고하도록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희석하여 민족의식을 말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결하거나 본관으로 창씨하거나 조롱과 풍자의 내용을 넣어 창씨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정의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민족운동.
역사적 배경

조선인에 대한 주1을 추진하던 일제는 주2주3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민족정신과 전통의식을 유지하는 요소인 신앙 · 생활습관 · 언어생활 등을 통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피의 전통을 의미하는 고유한 성(姓)까지 파괴하려 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창씨개명은 궁극적으로 조선인의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흐려 놓음으로써 민족적 전통의 뿌리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황실(皇室) 중심의 이상에 배치되는, 성(姓)을 중심으로 하는 혈족적 인습을 타파하여 반도 민중의 형(形) · 용(容)을 함께 황국신민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써 창씨개명의 강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경과

총독 주4는 1939년 11월 10일자 제령(制令) 제19호로써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창씨하여 호적계에 신고하도록 강요하였다.

창씨는 단순히 고유의 성을 버리고 일본식 성으로 바꾸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일본인과 같이 서양자제(庶養子制) · 이성양자제(異姓養子制)를 채택함으로써 혈통 중심의 우리 가족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큰 문제가 있었다.

즉 일본식 성으로 바꾸는 것과 동시에, 첫째 아들이 없으면 사위를 양자로 받아들일 수 있되, 양자로 입적하는 사위는 처가의 씨(氏)를 따르고, 둘째 성이 다른 타인을 양자로 삼을 수 있되, 입양자는 제 성을 버리고 양가의 씨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것은 가(家) 중심인 일본의 씨제도를 조선에서 시행함으로써 부계혈통 중심의 가족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창씨개명에 대한 반발과 저항은 필연적이어서, 시행한 지 4개월이 되는 1940년 5월 중순까지 창씨개명을 신고한 호수는 총호수 428만 700여 호 중 불과 7.6%에 지나지

‘내선일체(內鮮一體)주5 ·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위해 일본인과 같이 씨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권장을 해도 이렇게 결과가 저조하자, 당황한 총독부는 지금까지의 권장 형식을 바꾸어 직 · 간접의 강제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경찰관을 비롯한 각급 관공리는 물론, 황민화운동을 추진하는 어용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주6의 각급 조직 및 애국반을 비롯해 친일인사 · 친일단체 · 언론매체 등을 총동원, 창씨개명 신고를 부추기는 한편, 불응자에 대해서는 비국민(非國民)이라고 매도하고 차별하였다.

창씨개명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한 각급 학교의 입학 · 진급 및 진학에 대한 차별은 기본이었고, 창씨개명하지 않은 학생에 대한 교원들의 질책 · 구타 · 조롱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찍어 경찰이 요시찰인으로 간주,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민원사무를 거부하고 공무원은 물론 사기업체에서도 채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식량과 기타 생필품의 배급을 거부하였고, 노무 · 징용 대상자로 우선 지명하며, 창씨개명으로 되어 있지 않은 화물 · 우편물의 발송 거부 등으로 교활한 제재를 가하였다. 이렇듯 현실적인 박해가 가해지는 상황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당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정해진 기한이 닥쳐옴에 따라 신고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결국 1940년 8월 10일까지의 기한을 1941년 연말까지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2년간에 걸쳐 자행된 강압적인 창씨개명에도 불구하고, 최종 기한인 1941년 연말까지 창씨한 호수는 전체 호수의 81.5%인 322만 694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민중의 반대와 저항이 얼마나 끈질겼는가를 단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결과

창씨개명에 대한 반대는 하는 수 없이 이에 응하면서도 저항의사를 나타내는 것과 끝내 이를 거부하는 등의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창씨개명을 하면서 반대의사를 나타내는 유형에는, 창씨개명은 하되 창씨 속에 이를 조롱 · 풍자하는 내용을 넣는 것과 원성을 그대로 살려 두는 것 등이 있었다.

시인 김소운(金素雲)이 김씨 성을 잃어도 마음은 매우 편하다는 뜻으로 철심평(鐵甚平)이라 창씨개명하고, 경상남도 양산군 금융조합 직원 엄이섭(嚴珥燮)이 이름 밑에 야(也)자만 붙여 엄이섭야(嚴珥燮也)로 신고함으로써 온 집안의 성이 엄이(嚴珥)로 된 것 등은 창씨를 풍자 · 조롱한 것이었다.

이렇듯 창씨개명을 비꼬는 식으로 신고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는데,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란 뜻으로 견자웅손(犬子熊孫), 개똥이나 먹으라는 뜻으로 견분식위(犬糞食衛, 이누쿠소 구라에)라 신고하였다가 창씨를 모독했다고 퇴짜를 맞기도 하였다. 또한 병하(炳夏)라는 이름 위에 전농(田農)이란 창씨를 얹어, 일본어로 ‘덴노헤이카(天皇陛下)’로 부르게 하려다 경을 친 농부도 있었다.

창씨 속에 원성을 살려 두거나 본관을 창씨로 함으로써 혈통의 뿌리를 밝히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대응이기도 하였다. 김씨가 김산(金山) · 김본(金本), 박씨가 박원(朴原) · 박전(朴田), 오씨가 오산(吳山) · 오촌(吳村) 등으로 바꾼 것은 원성을 그대로 살려 둔 경우이고, 평산신씨(平山申氏)가 평산(平山),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청원(淸原) 등으로 창씨한 것은 본관을 밝힌 예이다.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이에 항거한 사람도 있었다.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의 유건영(柳健永)은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슬프다. 유건영은 천 년의 고족(古族)이다. 일찍 나라가 망할 때 죽지 못하고 30년간의 욕을 당하여 올 때에, 그들의 패륜과 난륜(亂倫), 귀로써 듣지 못하고 눈으로써 보지 못하겠더니, 이제 혈족의 성까지 빼앗으려 한다. 동성동본이 서로 통혼하고, 이성을 양자로 삼고, 서양자가 제 성을 버리고 계집의 성을 따르게 되니, 이는 금수의 도를 5천 년의 문화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나 유건영은 짐승이 되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노라.”라는 항의서를 총독과 중추원에 제출하고 결연히 자결하였다.

전라북도 순창군의 설진영(薛鎭永)은 창씨하지 않으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자, 창씨개명을 하겠다는 신고서를 제출하여 아이들을 학교에 다니게 한 다음 투신자살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혈통과 가계를 존중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한 단면을 보인 것인데, 일제는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창씨개명의 부당성을 비방한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투옥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충청북도 충주군(지금의 충주시)의 김한규(金漢圭),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광역시)의 이기용(李紀鎔) 등이 창씨개명을 비방하다 각각 징역 1년과 8개월의 형을 받은 것은 대표적인 예이고, 구류처분을 받은 예는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국에서 전통적인 성씨를 말소하는 창씨 강요가 기승을 떨치는 가운데서도 이름난 친일파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국민총력연맹 이사장이며 중추원 고문인 한상룡(韓相龍),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박흥식(朴興植), 일본국회 대의사 박춘금(朴春琴), 귀족이며 자작인 윤덕영(尹德榮), 도지사가 된 김대우(金大羽) 등을 비롯해 이름난 친일파와 김석원(金錫源) · 이응준(李應俊) · 유승렬(劉昇烈) 등 고급 군인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창씨를 강요하지 않은 것은, 이들에게까지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창씨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총독부는 창씨 신고가 마감된 뒤 ‘반도 통치에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한 경우에도 그 속에 가계와 혈통을 지키는 의지가 남아 있는 한,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희석시킴으로써 민족의식을 말소하려 든 그들의 의도는 결국 실패한 것이었다. 창씨제도는 일제의 반문명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민족어문 말살정책과 함께 가장 실패한 정책의 하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피해는 한 시대적 광풍으로 지나가 버리지 않고 광복 반세기에 이르는 현시점까지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태평양전쟁기에 일제의 군인 · 군속 · 징용 · 정신대 등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명단이 최근까지도 계속 밝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모두 창씨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신원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해방직전사(解放直前史)의 재조명(再照明)』(김대상, 해성, 1990)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송건호, 두레, 1986)
주석
주1

식민지를 경영하는 나라가 식민지 원주민의 고유한 언어, 문화, 생활 양식 따위를 없애고 자국의 것을 강요하여 동화시키려는 정책.    우리말샘

주2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주3

일본 및 그 식민지에서 주민들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 정책.    우리말샘

주4

일본의 군인ㆍ정치가(1874~1955). 1936년에 조선 총독이 되어 일본 말 상용(常用), 일본식 성명 강요, 지원병 제도 따위의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수행하였다. 전범(戰犯)으로 종신 금고형 복역 중 병사하였다.    우리말샘

주5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구호.    우리말샘

주6

1933년 2월 녹기 동호회를 계승하여 조직된, 천황주의 사상의 친일 단체. 본래 일본인으로만 조직되었으나 중일 전쟁 이후 조선인도 참여하였다. 기관지로 ≪녹기(綠旗)≫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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