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성(仲成). 경기도 수원 출신.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4월 3일 아침 석포리(石浦里) 이장 차병한(車炳漢)·차희식(車喜植)·이영쇠(李永釗) 등과 장안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인근주민들을 모이도록 하고, 자신은 오전 10시 30분경 차병한과 함께 어은리에 있는 장안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00여 명의 만세시위군중이 면사무소에 모이자 김현묵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취지의 연설을 하였고, 차병혁은 곧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차병한·이영쇠 등과 함께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어서 차인범(車仁範) 등과 함께 2,000여 명으로 늘어난 만세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그곳의 건물·집기류·공문서를 파기하고, 계속적으로 화수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날 차병한 등 26명과 함께 검거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