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강원도관찰사, 개성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적(子迪)
유하(柳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1년(선조 24)
사망 연도
1662년(현종 3)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이조참판|개성유수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강원도관찰사, 개성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적(子迪), 호는 유하(柳下).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형 최명진과 더불어 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려 했으나, 한 집안에 여럿을 공신으로 할 수 없다 하여 책거(冊去)되고 공조좌랑에 특제되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이 되어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어 이유도(李有道)를 탄핵했다가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곧 돌아와 이조좌랑·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사간·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635년 승지가 되었고, 1638년 병조참의·대사간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서 1641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왕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있다가 용골대(龍骨大)의 청병(淸兵)과 동행, 귀국하였다.

1644년 동지 겸 세폐사(冬至兼歲幣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648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도승지가 되어 측근에서 왕을 보살폈다. 1650년(효종 1) 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을 거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이조참판 때 전형(銓衡)에 실정(失政)이 많았음을 이유로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53년 영해부사로 복직되어 곧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55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 때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처참한 상황을 보고하고 해서연변(海西沿邊) 열읍(列邑)의 창곡(倉穀) 300∼400석을 옮겨 쓰게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협조해줄 것을 상소, 왕의 윤허를 받았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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