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성(汝成). 한배상(韓配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사덕(韓師德)이고, 아버지는 판의금부사 한광회(韓光會)이며, 어머니는 정석부(鄭錫敷)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육경경과대증광전시(六慶慶科大增廣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78년(정조 2)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으며, 이어서 지평 · 은산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794년(정조 18) 승지에 오른 뒤 이조참의를 거쳐, 1798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이 때 황해도감영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자 근간에 공해(公廨)의 화재가 많은 것을 들어 영속리(營屬吏)를 엄히 문책해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을 진언하였다.
1801년(순조 1) 강화유수를 역임했고,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3년 형조판서 · 지의금부사 · 한성판윤 · 병조판서 등을 지낸 뒤 1805년 대왕대비(영조의 계비 貞純王后)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가 되었다.
1806년 판의금부사가 되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조문언(趙文彦)이 군량(軍糧)을 도용하고 백성을 착취했다 해서 중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다 오히려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로 복직된 뒤 비변사제조를 거쳐, 180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안주목사 이해청(李海淸), 중화부사 이일우(李一愚) 등이 탐관오리로 형을 받게 되자 전관(銓官)으로서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809년 복직되어 원자탄생의 권초관(捲草官) · 금오당상(金吾堂上) · 판의금부사 · 병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1811년 예문관제학이 되고, 이어 다시 한성판윤 ·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