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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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의(해시계)
일영의(해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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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을 측정하던 시계.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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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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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을 측정하던 시계.
내용

해시계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원초적인 시계이다. 원시시대에 나무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던 것으로부터 점차 발달해 온 것이 여러 가지의 해시계였다. 어느 문명에서나 해시계는 석기시대부터 나타나게 마련이다. 마당에 세운 기둥은 하루 동안의 시간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1년의 길이를 알게 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해시계(日晷, sundial)는 시계이면서 동시에 규표(圭表, gnomon)였다. 우리 나라의 첫 해시계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한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을 소도라 하고, 거기에 솟대를 세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솟대가 원시적인 해시계 구실도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유물로 남아 있는 해시계로는 7세기 이후의 신라 해시계 일부로 보이는 돌 파편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반지름 33.4㎝인 이 평면 해시계는 현재 자시(子時)에서 묘시(卯時)까지의 부분만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세 나라에는 일관(日官)·일자(日者) 등이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누각전(漏刻典)이라는 관서가 있었다. 분명히 이들은 해시계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기록으로 해시계가 나타난 것은 15세기 초 조선 세종 때의 일이다. 1437년(세종 19)까지 세종은 여러 가지 해시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앙부(仰釜)·현주(懸珠)·천평(天平)·정남(定南) 등의 이름을 가진 일구(日晷)가 그것이다.

세종 때에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그것을 자그맣게 만든 소정시의(小定時儀)도 만들었다. 그런데 모두 낮에는 해시계로 그리고 밤에는 별시계로 작동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대표적인 것으로는 앙부일구를 들 수 있다. 반구 모양의 해시계로, 앙부일구에는 북극을 향하여 솟아 있는 영침(影針)이 윗면의 한가운데에 이른다. 바로 이 영침의 끝이 만드는 그림자가 시간을 알려주고, 또 그날의 양력 날짜까지 거의 정확하게 맞추게 되어 있다. 반구형의 안쪽에는 13줄의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동지에는 그림자 끝이 제일 바깥줄을 따라가고, 하지에는 제일 안줄을 따르게 마련이다. 나머지 11줄은 24절기의 나머지 22일에 각기 두번씩을 이용하게 된다.

앙부일구는 중국에서는 만들어진 일이 없이 세종 때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해졌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 앙부일구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해시계로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세종은 이 시계를 만들어 서울의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종로 1가에 있던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놓아두어 지나다니는 백성들이 언제나 시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처음으로 공중을 위한 해시계가 나온 셈이다.

그러나 세종대의 해시계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18세기 이후의 앙부일구들이 전해질 따름이다. 지금 남아 있는 앙부일구는 크고 작은 것이 여럿 있는데, 작은 앙부일구 가운데에는 한쪽에 나침반을 설치한 것이 많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강윤(姜潤)과 강건(姜健) 등은 앙부일구의 제작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17세기부터는 중국을 통하여 서양식 해시계도 알려져 전과는 다른 모양의 것들이 만들어졌다.

서양식 해시계로는 지금 서울 세종기념관에 있는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636년(인조 14) 명나라의 이천경(李天經)이 제작한 것으로 밝혀져 있는데, 가로 58㎝, 세로 119.5㎝인 것과 대강 그 반의 크기를 가진 것 등 둘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들 돌로 만든 해시계에는 가운데 삼각동표(三角銅表)를 세웠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역시 삼각동표를 가진 해시계로는 1881년(고종 18)강윤이 만든 전혀 다른 양식의 석각 평면일구가 남아 있다. 대체로 이후부터는 한자로 숫자를 표기하지 않고 서양식으로 아라비아숫자로 쓴 해시계들이 제작되었다. 손바닥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앙부일구로부터 시표를 접었다 펼 수 있는 평면일구 등 여러 가지 휴대용 해시계도 남아 있다.

참고문헌

「이씨조선의 시계제작소고」(전상운, 『향토서울』 17, 1963)
「세종대의 천문학발달」(박성래,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The Hall of Heavenly Records(Needham,J.,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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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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