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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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호구(戶口) · 공부(貢賦) · 전량(錢糧) · 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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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호구(戶口) · 공부(貢賦) · 전량(錢糧) · 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내용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지관(地官)·지부(地部)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호부(戶部)가 판도사(版圖司)로 격하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호조로 개칭된 것이 그대로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육조는 단순한 실무 집행기관이었으나 1405년(태종 5) 관제개혁 때 정2품아문으로 승격하면서 실무뿐 아니라 정책수립의 권한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초기의 소속기관은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경비사(經費司)로서 각사는 정랑 3인에 의해 분장되었다.

판적사는 호구·토전(土田)·조세·부역 등 재부(財賦)에 관계된 일을 관장하였다. 회계사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비축된 미곡·포(布)·전(錢) 등의 연도별 회계, 관리의 교체 때 맡은 물건의 부족함을 살펴 해유(解由)를 내는 일 등을 관장하였다.

경비사는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국용(國用)의 제반 경비의 지출 및 왜인(倭人)의 양료(糧料)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3사의 분장체제는 선조대 이후로 새로운 용도가 생겨나고 또 업무가 늘어나 여러 방(房)·색(色)을 신설과 함께 변화를 가져왔다.

1596년(선조 29) 훈련도감 군사의 급료관리처로서 별영(別營)이 용산(龍山)에 세워지면서 그 지급 사무를 전담하는 별영색(別營色)의 신설이 있었다.

1640년(인조 18)에는 또 각 관서의 원공(元貢)에 부족한 물종과 중국·일본과의 별무(別貿) 물종의 무역가 등을 마련, 보관하는 별고(別庫)가 역시 용산에 설치되어 그 관리를 맡은 별고색(別庫色)이 두어졌다.

이 두 색의 신설은 위 3사 분장에 큰 변동을 가져오지 않았으나, 1694년(숙종 20)에 사섬시(司贍寺), 1767년(영조 43)에 사축서(司蓄署)가 각각 혁파되어 내속되는 등 관제의 변동에 따라 정조대 초반에는 3사 14방(房)의 체제로 정돈되었다.

즉, 판적사에 잡물색(雜物色)·금은색(金銀色)·주전소(鑄錢所)·수세소(收稅所)·사섬색(司贍色) 등 5방이, 경비사에 전례방(前例房)·별례방(別例房)·판별색(版別色)·요록색(料祿色)·세폐색(歲幣色)·응판색(應辦色)·별고색·별영색·사축색(司畜色) 등 9방이 각각 설정되고, 회계사에는 방색이 두어지지 않았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탁지지 度支志≫에서는 당시의 호조소관업무가 사실상 크게 축소된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호적은 한성부로, 어염세(漁鹽稅)는 균역청으로 각각 넘어갔다.

군국(軍國)의 중요한 재원인 조(租)·용(傭)·조(調)에서도 용은 병조가 방번수포(放番收布)하고, 조(調)는 각 읍에서 전(錢)으로 매겨 거두고, 조도 선혜청이 대동미(大同米) 12두(斗)를 거두어, 호조 소관으로는 전세(田稅) 4두뿐이라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관원은 판서 1인, 참판 1인, 참의 1인, 정랑 3인, 좌랑 3인, 산학교수 1인, 별제 2인, 산사(算士) 1인, 계사(計士) 2인, 산학훈도 1인, 회사(會士) 2인 등이 있었다. ≪속대전≫에서는 별제·계사·회사 등 각 2인이 1인으로 감원되고, ≪대전회통≫에서는 종6품의 겸교수(兼敎授) 1인이 증치되었다.

태조 원년의 관제에서는 최고책임자로 전서(典書) 2인이 두어졌으나, 1403년에 1인을 감하고 뒤이어 이름을 판서라 고쳐 정2품으로 하였다. 1593년 훈련도감을 설치하면서 호조판서는 이의 제조(提調)직을 예겸하도록 하였다. 판서는 비변사를 비롯해 장생전(長生殿)·선혜청·예빈시·광흥창·군자감·선공감(繕工監) 등의 제조도 예겸하였다.

정랑·좌랑직은 모두 생원·진사 출신의 음직(蔭職)이었는데, 정랑의 1인은 1749년에 문신으로 차정해 춘추관기주(春秋館記注)를 예겸하도록 하였다. 좌랑 1인은 1756년 무신으로 했고, 좌랑 1인은 장생전의 낭관을 겸하였다.

회계를 주무로 하는 산학(算學)이 속사(屬司)였는데, 위 관원 중 종6품의 교수 1인 이하 종9품의 회사 1인 모두 이 속사의 것이었다. 속사에는 그 밖에도 부료계사(付料計士) 등의 인원이 54인 있었다. ≪만기요람 萬機要覽≫에는 계사가 모두 60인이라고 했고, 그 밖의 속원으로 서리 60인, 고직 9인, 사령 40인이 배속되었다.

호조는 1418년 세조의 즉위로 조정된 서열에 따라 이조 다음으로 두 번째로 법제화되었다. 호조의 소관사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증대함으로써 운영상의 변동을 겪었으나 정2품아문으로서의 관서 자체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탁지지(度支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대전회통(大典會通)』
집필자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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