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연(子淵). 호조참판 홍자경(洪子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홍익생(洪益生)이고, 아버지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홍귀해(洪貴海)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동지돈녕부사 민효열(閔孝悅)의 딸이다.
1469년(예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성종 8) 춘장 문과(春場文科)에 급제하여 1479년 승정원주서가 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89년 경원판관이 되었다.
이 때 휘하 군사들이 불법으로 들깨를 무역하고 밤중에 성을 넘어 야인지역으로 들어가 도둑질하다 붙잡힌 사건이 일어나 파직되었다가 다시 장령에 기용되었다.
1494년 사간으로 있을 때, 흥덕사(興德寺)에서 불사(佛事)를 빈번히 열고 그 때마다 사족부인들이 남자들과 어울려 풍기가 문란하므로 이를 억제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어 성균관유생들의 불교배척상소가 지나치게 격렬하다 하여 벌을 주자는 조정의 여론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자고로 성균유생들은 언사(言辭)가 없으면 죄짓는 것으로 여겼음을 들어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497년(연산군 3) 문신으로 활을 잘 쏘고 무예에 능하다 하여 온성부사에 임명되었다가 70살이 넘은 노부모를 모시는 자는 300리 밖의 수령에 임명하지 않도록 된 『경국대전』의 규정을 들어 간청하는 노모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