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이〔鐙子〕는는 기수가 말 위에 올라타거나 말을 타고 달릴 때 발을 걸쳐서 신체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마구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발걸이는 크게 2가지 종류가 있다. 즉, 윤부(輪部)의 형태에 따라 발을 딛는 부분이 타원형 또는 삼각형으로 만들어진 윤등(輪鐙), 그리고 윤부에 발 앞부분을 감쌀 수 있는 자루모양의 장치를 부가한 호등(壺鐙)이 그것이다.
윤등과 호등 2종류의 발걸이를 형태와 재질의 차이에 따라 나누면 목제윤등(木製輪鐙), 목심철판장윤등(木心鐵板張輪鐙), 목심금동판장윤등(木心金銅板張輪鐙), 철제윤등(鐵製輪鐙), 청동제윤등(靑銅製輪鐙), 목제호등(木製壺鐙), 목심철판피호등(木心鐵板被壺鐙), 금속제호등(金屬製壺鐙)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발걸이 가운데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한 것은 목심철판피윤등이며, 이 형식의 발걸이는 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목심-본체에 일부 혹은 전체를 금속판으로 덮어씌우고 못을 박아 보강한 것을 말한다.
삼국시대 윤등의 이행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목심의 일부에만 철판을 덮어씌운 것에서 전체를 덮어씌운 것으로 발전하며, 또한 발을 듣는 답수부의 폭이 좁고 아무런 장치도 없는 것에서 폭이 넓어지고 발의 미끄럼 방지를 위한 스파이크가 장치된 것으로 변화 발전하게 된다.
소위 승마용 마구는 4∼6세기대 삼국시대의 각 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가운데 마구류가 가장 많이 출토되는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고분의 연대관을 결정짓는 단서로 많이 다루어져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른 시기의 발걸이로는 경주 황남동 109호, 황남동 110호 출토품을 들 수 있다. 윤등은 4세기대에는 발을 디딜 수 있는 답수부에 못이 없는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5세기대가 되면 점차 다양한 형태가 등장하고 6세기대에 이르러서는 지역적인 유행양식이 최고로 달라진다. 대체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면보강을 하는 경향이 눈에 띄는 반면, 가야는 철판의 보강부위가 부분적인 것이 많고 답수부에 못과 더불어 폭을 넓힌 것들이 중심을 이룬다.
발걸이의 제작은 초기에 가죽 또는 나무로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사용은 처음에 말에 오르고 내릴 때의 디딤대 기능만 하다가, 차츰 말을 타고 질주하는 도중에 신체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양쪽 발을 딛는 것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장기마전(重裝騎馬戰)과 같은 전쟁방식의 변화가 금속제 발걸이의 출현을 재촉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4∼5세기대 고구려의 급속한 영역확장에는 금속제 발걸이의 보급과 중장기마군단의 편제가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