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하여 1939년 일본와세다 대학에서 법학과를 졸업한 후, 해방 후인 1946년 제1회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통해 서울지검과 대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하도록 한 보도연맹 결성을 선우종원과 함께 주도하였으며 남로당의 김삼룡과 이주하를 체포했고, 국회 프락치 사건,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 등 이 시기의 대표적인 공안 사건을 담당하여 1950년대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쳤다.
1960년 변호사로 개업한 후에도 1966년 한국반공연맹이사,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장, 북한탈출동포돕기운동본부 부회장, 1971년 북한연구소 초대 이사장 등 보수우익을 대표하는 인사로 활동하였다.
이 후에도 1975년 아시아반공연맹(APACL) 한국수석대표와 세계반공연맹(WACL) 한국수석대표, 1978년 사단법인 한국안보교육협회 이사, 그리고 1998년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고문과 한국안보교육협회 이사장을 맡는 등 여러 보수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서강대 박홍 총장이 한국통신 노조 주사파 발언 사건으로 제소되자 노재봉, 이도형 등 70여명과 후원회를 결성하여 지원하였고, 권영해의 북풍사건을 변론하는 등 보수 우익 인사에 대한 지원에 힘썼다.
1977년 정일형이 3·1 명동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치러진 종로 중구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제11대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