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사건 ( )

근대사
사건
1881년 흥선대원군 추종 세력이 국왕인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인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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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1년 흥선대원군 추종 세력이 국왕인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인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된 사건.
역사적 배경

문호 개방 후 무관세무역을 기반으로 조선에 침투해 들어온 일본 상업자본에 의해 섬유제품 등 자본제 상품이 조선에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곡물이 대량 유출됨으로써 곡가의 앙등을 가져왔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외세의 침략을 경고하는 유생 세력의 상소 내용과 유사했다. 경제적 조건의 악화로 대원군의 배외 정책 또한 여러 사회 계층으로부터 다시금 높이 평가되어, 유생 세력으로부터 대원군의 정권 복귀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변천 및 의의

유생 세력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직접 외세를 처벌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대원군 세력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영남 유생 강달선을 통해 협력 요청을 받은 대원군 세력은 이를 자신들의 쿠데타 계획의 일부로 수용했다. 즉 전 승지 안기영과 권정호 등은 고종민씨 세력의 정국 주도를 막기 위해 고종을 폐위하고 고종의 배다른 형인 이재선을 왕위에 추대하면서 대원군의 재기를 꾀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안기영 등은 각자의 가산을 전매하여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고, 함경도 출신의 급수군(汲水軍)을 대상으로 모병도 했으며, 신무기를 입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으나 제대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쿠데타 계획의 실행이 지지부진하던 중에 모의에 참가하고 있던 광주 장교 이풍래가 1881년 8월 28일 사건 전말을 고발함으로써 29일부터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그 결과 30여명의 연루자가 검거되어 13명이 처형되고 3명이 유배되었다. 주모자였던 이재선은 ‘대역부도죄’로 사사되었다.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대원군에게는 고종의 부친이라 처벌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불문에 붙여졌다.

쿠데타 계획의 실패로 대원군 세력과 유생 세력은 정치력이 약화되었고, 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하며 개혁을 추진하던 지배층 내부의 유연성도 감소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최근세편』(이선근, 을유문화사, 1961)
「한말 사회 변동과 이재선 사건-대원군파 쿠데타 이념과 조직」(조성윤, 『현상과 인식』 8-1, 한국인문사회과학회, 1984)
집필자
구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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