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 세력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직접 외세를 처벌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대원군 세력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영남 유생 강달선을 통해 협력 요청을 받은 대원군 세력은 이를 자신들의 쿠데타 계획의 일부로 수용했다. 즉 전 승지 안기영과 권정호 등은 고종과 민씨 세력의 정국 주도를 막기 위해 고종을 폐위하고 고종의 배다른 형인 이재선을 왕위에 추대하면서 대원군의 재기를 꾀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안기영 등은 각자의 가산을 전매하여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고, 함경도 출신의 급수군(汲水軍)을 대상으로 모병도 했으며, 신무기를 입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으나 제대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쿠데타 계획의 실행이 지지부진하던 중에 모의에 참가하고 있던 광주 장교 이풍래가 1881년 8월 28일 사건 전말을 고발함으로써 29일부터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그 결과 30여명의 연루자가 검거되어 13명이 처형되고 3명이 유배되었다. 주모자였던 이재선은 ‘대역부도죄’로 사사되었다.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대원군에게는 고종의 부친이라 처벌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불문에 붙여졌다.
쿠데타 계획의 실패로 대원군 세력과 유생 세력은 정치력이 약화되었고, 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하며 개혁을 추진하던 지배층 내부의 유연성도 감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