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유지공장 ()

근대사
단체
1932년 6월 함경도 흥남에 설립되어 글리세린을 제조하던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의 공장.
이칭
이칭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경화유공장
정의
1932년 6월 함경도 흥남에 설립되어 글리세린을 제조하던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의 공장.
개설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본질소)는 총독부로부터 수리권(水利權)을 획득해 1926년 1월 자본금 2000만원의 조선수전주식회사(朝鮮水電株式會社), 1927년 5월 자본금 1000만원의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조선질소)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대규모 발전 수력을 이용한 전기화학공업에 진출해 어유(魚油)와 석탄 등의 자원을 풍부히 사용하면서 조선 북부 지역에 전기화학공업단지를 형성하였다.

설립목적

조선질소 유지공장 설립 당시 일본은 세계적 불황으로 어유 수출이 단절되고 경화유가 과잉 생산됨에 따라 경화유 설비 증설 및 생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일본질소는 이러한 통제 상황을 벗어나 조선 내에 경화유 회사를 설립해 화약 원료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32년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縣) 노베오카(延岡) 화약공장이 준공되자 조선질소는 화약 원료인 글리세린 확보를 위해 조선 흥남에 1932년 6월 유지공장을 건설하였다. 동해안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정어리 어유와 수력발전 전기분해에서 발생되는 수소를 결합한 경화유 공업에 착목해 향후 화약공장 건설을 꾀하였다. 당시 조선질소 유지공장은 일본에서 가장 큰 유지회사인 합동유지(合同油脂)의 반 정도의 크기로 2만 톤 규모였다. 여기서 생산된 경화유는 글리세린으로 제조되어 일본질소의 화약공장에서 처리하였다. 그러나 1935년 흥남에 조선질소화약주식회사가 설립됨에 따라 조선질소 유지공장의 글리세린은 군수용 화약, 광산 개발, 철도, 도로 부설, 수력 개발 등의 목적으로 조선에서 생산 유통되었다.

기능과 역할

1929년 세계적인 불황으로 정어리 어유가 과잉 생산되자 총독부는 정어리유비제조업수산조합[鰯油肥製造業水産組合]을 설립하고 이 조합을 통해 어민들에게 어업 자금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조선 내 경화유공장을 유치하는 한편 어유 판매 경로를 정비해 지정 경쟁 입찰 방식을 구축하였다. 이 결과 자본금 150만엔, 하루 생산량 800톤급의 조선유지주식회사, 자본금 500만엔, 연간 4만 2000톤의 제조 능력을 가진 협동유지주식회사가 어유 확보를 목적으로 청진에 경화유공장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조선질소 유지공장은 일본 내 경화유 회사의 조선 진출을 자극하고 자본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질소는 중요산업통제법(重要產業統制法)에 따라 경화유 설비 증설 및 생산이 통제되고 있었으나 자본을 투자해 흥남에 유지공장을 설립하였다. 동해안에서 대량 공급되는 어유를 마음껏 사용해 일본제국 내 민간 화약 제조고의 50%이상을 차지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질소 유지공장은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정어리 어업에 기반으로 둔 것으로, 식민지 시기 조선 총 어획량의 50%이상을 정어리가 차지하는 기형적 어업 구조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朝鮮産業年報昭和18年版』(東洋經濟新報社 京城支局編, 1943)
『근대 일본어민의 한국진출과 어업 경영』(김수희, 경인출판사, 2010)
『朝鮮における日窒コンツェルン』 (姜在彦編, 東京: 不二出版, 1985)
『朝鮮水産開發史』(吉田敬市, 下關: 朝水會, 1954)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