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개항 이후 조선사회에 개화론(開化論)이 등장하였다. 나라가 개화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였고, 이는 전통적인 여성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사상가들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서는 여성의 권리 찾기, 남녀평등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여성교육을 강조하였다.
1886년부터 1890년대를 거쳐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등 여학교들이 연이어 세워졌다. 이러한 변화를 기반으로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 양반여성들이 찬동자 300명 정도를 모아서 ‘여학교 설시 통문’을 발표하였다.
여권통문에서는 여성의 근대적 권리를 주장했으니, 첫째, 문명 개화정치를 수행함에 여성들도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둘째, 여성들도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고, 셋째,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권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소사 등은 모든 것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고 현실적으로 여성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후원 여성단체인 찬양회(贊襄會)를 조직하였다. 찬양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로서, 여학교 설립과 여성 계몽사업 두 가지를 목표로 하였다.
찬양회에서는 관립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1899년 2월에 30명 정원의 순성학교(順成學校)를 개교하였다. 이는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로 초등학교에 해당하였다. 교장은 찬양회 부회장이었던 김양현당(金養賢堂)이 맡았다. 그러나 1903년 김양현당이 죽자 재정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소멸하였다.
여권통문은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한국이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 스스로가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 단순한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여학교를 설치한 그 실천력에 더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다.
최근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여권통문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하여 통문이 발표된 날을 여성계를 넘어 국가차원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