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규 ()

강창규작 화병
강창규작 화병
공예
인물
일제강점기 때, 일본총리대신상, 조선총독부상 등을 수상한 건칠 명인.
이칭
창원(菖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77년
본관
진주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
정의
일제강점기 때, 일본총리대신상, 조선총독부상 등을 수상한 건칠 명인.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창원(菖園). 경상남도 함안에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친 뒤 16세 무렵 일본에 유학하였다. 고학으로 1930년오카야마(岡山)공예학교를 거쳐, 1935년동경 우에노(上野)미술학교 칠공과 및 연구과를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미술학교 재학 중인 1933년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시회8각과자기」를 첫 출품하여 특선하였고, 제19회까지 매회 출품하여 그 때마다 특선함으로써 1940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또 1935년 일본제국미술전람회에 특선한 이후 6번 계속 특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8년에는 일본천황 접견실의 실내장식을 위촉받아 옻칠로 시공하는 등 그의 기예는 일본 작가들을 앞서는 것이었다.

민족항일기에 미술계의 신화적 존재였던 그는 조국 광복 때 일시 귀국하였다가 친일파로 지목되어 출국정지 등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창원공예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한때 청진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38선 분단 때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강사·국전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제1회·제4회)을 역임하였고, 국전에는 19차례 출품하여 제22회 때 초대작가상을 받았다.

1956년부터 몇 년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를 한 바 있으나, 끝없는 과음·방랑·칩거 등 무절제한 생활로 가정과 건강 및 작품생활이 점차 희생되었다. 그러나 국전에는 계속 출품하여 그의 존재를 보여주다가 1970년 중반기에 재기를 결심하고는 두 차례(1974·1975)의 개인전을 가진 뒤, 1977년 세 번째 개인전을 준비 중 작고하여 유작전이 열렸다.

그의 기술은 일본에서 익힌 것이었지만 무늬 표현에서는 일본 전통기법인 마키에(蒔繪)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우리나라 전통에 부합되는 자연주제인 포도·석류·나비·물고기·대·보리이삭 등을 자개무늬로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특색과 세련미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무문건칠기(無紋乾漆器)로서 특유의 돌출평행선을 기형 표면에 무수히 나타내거나 8∼24각면을 기면으로 한 수많은 화병을 만들었다. 이러한 화병·과반·합 등이 작품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자유자재에 가까운 칠색(漆色) 구사의 능력 또한 뛰어난 것이었다.

단절 위기에 있던 우리나라 건칠공예를 홀로 끈기 있게 고수하며 현대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이지만 뚜렷한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1982년 11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창원건칠작품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상훈

일본총리대신상(1935)·조선총독부상(1936)·이왕가상(李王家賞, 1936)·조선미술전람회20년공로상(1939)·문교부예술상(1949)·서울시문화상공예상(1956) 등의 화려한 수상경력은 초기의 활약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미술사(韓國現代美術史)-공예(工藝)-』(국립현대미술관, 1975)
『디자인』 11(오미출판사, 19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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