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은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나 공공단체가 각 분야에서 경제적 모순을 완화하거나 조정하는 정책이다.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쳐, 바람직한 수준의 정책목표를 달성하도록 적절한 정책수단을 선택·행사하는 행동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정책목표가 서로 상충될 때는 하나 혹은 소수만 전략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투표로 선정된 정권의 성격이나 이념이 정책목표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특정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미시경제정책과 국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시경제정책으로 구분된다.
모든 개인들은 이러한 경제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생활환경을 개선하며,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각종 불안이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
현대 국가는 이들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각 개인의 바람을 국가적인 목표로 부각시켜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가능한 수단을 활용한다. 여기서 국민이 바라는 바를 종합한 것을 정책목표라 부르고 이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을 정책수단이라 칭한다.
그래서 경제정책이란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쳐, 바람직한 수준의 정책목표를 달성하도록 적절한 정책수단을 선택 · 행사하는 전략적 행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정책목표로는 실업의 축소, 인플레이션의 억제, 국제수지의 균형, 높은 경제성장의 지속, 생활의 질 향상, 소득과 부의 공평한 분배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 상충되어 하나 혹은 소수만 선택해야 할 경우도 있다.
더구나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정책목표들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정책당국자의 가치관에 기초하여 정책목표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투표로 선정된 정권의 성격이나 이념이 정책목표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국민의 물질적 풍요를 중시하거나 실업의 폐해를 중시하는 정권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정책목표로 설정할 것이고, 환경이나 후세대의 복지를 중시하는 정권은 현재의 높은 성장보다는 공해방지정책을 선호할 것이다. 그리고 계층간의 소득분배에 관심이 있는 정권은 공정한 소득분배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한편 정부에 의해 선정된 정책목표는 적절한 정책수단의 사용을 통해 달성된다. 가장 널리 활용되는 수단으로는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이며, 이자율이나 세율을 높이거나 낮추며, 각종 보조금이나 이전지출을 증대하거나 감소시키는 등의 방법이 있다.
이 외에도 국제수지에 영향을 미치는 환율, 산업조직의 개선을 위한 규제 및 제도의 변경 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가 민간을 포함한 각종 경제주체에게 정책의도를 설명하고 이 정책 의도에 맞게 활동하도록 요구하는 권유와 지시도 정책수단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정책은 그 운용방식이나 정책이 미치는 영향의 범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기준에 의하면 경기변동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느냐 아니면 소극적으로 대응하느냐, 그리고 경제정책을 미리 결정된 준칙에 따라 실행하는냐 아니면 정부의 재량에 따라 실행하는가 기준이 될 수 있다.
반면, 정책이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대내적이냐 아니면 대외적이냐, 그리고 특정 산업 혹은 특정 주체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국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느냐로 나눌 수 있다. 통상적으로는 후자 특히 특정 산업이냐, 아니면 국민경제 전반이냐 라는 기준을 따른다.
특정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미시경제정책이라 하고 국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거시경제정책이라 한다. 미시경제정책으로는 특정 산업을 육성하거나 합리화하는 산업정책, 고용과 노사관계를 지원하는 노동정책, 농가소득을 지원하는 농업정책, 과학기술을 제고하는 과학기술정책, 시장경제질서를 유지하는 공정거래정책, 사회복지정책, 환경정책, 무역정책 등이 있다.
그리고 거시경제정책으로는 경제안정, 소득분배, 그리고 자원배분을 목적으로 하는 재정정책,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금융정책, 국제수지를 개선하려는 환율정책 등이 있다.
전통시대의 경제활동은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정부의 주요 관심은 봉건적 소작체제하에서 국민의 생존을 유지하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업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 있었으며 공업은 관영공장을 통해 정부의 수요를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제정책에는 농업정책(토지정책)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에 더하여 왕실의 운영을 위한 조세 및 재정정책, 점차적인 상업발달로 인한 교환의 어려움과 현물납의 불편 해소를 위한 화폐정책, 그리고 사회정책의 일환인 구휼정책 등이 당시 경제정책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신라 말기부터 토지에 대한 공동체적 집단지배체제 속에서 사적지배 관계가 발생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동체 내 농민의 토지점유 현상이 발생하여 균전제는 무너지고 농민 경작면적에 차등이 생기면서 토지소유를 둘러싼 계급분화가 촉진되었다.
계급분화가 가속되면서 귀족, 지방호족 및 지방향리의 농민수탈이 가중되고 농민의 토지이탈 현상은 속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공동체적 지배체계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어 신라 말기 토지소유와 관련된 제도는 문란해졌다.
고려 태조는 집권과 동시에 토지에 대한 직접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균전제를 폐지하고 이 토지를 모두 공전으로 개편하기 위한 수정전제(首正田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이미 사전화된 토지와 지방성주나 호족의 지배하에 있던 토지를 식읍(食邑:국가에서 공신에게 내리어, 개인이 조세를 받아 쓰게 한 고을)이나 하사형식으로 지급하여 사전으로 만들었다. 다만 국가의 지배기구를 통해 제도화하고 지배기구를 이탈하지 못하게 하여 사전의 확대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 뒤 975년(경종 원년)에는 전시과(田柴科:고려시대의 토지제도)를 창설하여 왕권중심의 집권봉건국가에 어울리는 토지제도를 확립하였다.
전시과는 관직과 더불어 지급되었으며 관리권과 수조권을 위임하는 형식이었다. 전시과 제도하에서 관직으로부터 이탈되면 그 토지를 국가에 반환하도록 하고 있었으나 이 원칙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결국 사전화되어 갔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전제를 개편하고 전국의 토지를 일단 왕의 지배하에 두고 왕의 권위로 재분배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국가 또는 왕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토지제도 개편에도 불구하고 점차 전시과 규정에 내포된 모순이 표출되고 규정이 준수되지 않음으로써 사전은 날로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의 토지제도도 고려시대의 토지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는 구정권하의 지배층인 귀족의 물질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제를 개혁하고 사전을 몰수하여 토지를 재분배하기 위한 양전사업과 더불어 새로운 과전법(科田法:고려의 문란한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1391년 단행한 새로운 토지제도)을 실시하였다.
고려시대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조선시대의 토지제도는 과전에 처음부터 세습을 인정함으로써 이후 사전확대 현상을 오히려 격화시킬 소지를 두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후 왕족, 귀족, 지방호족의 사전 확대열은 더욱 고조되었다.
고려 전기 국가재정 내지 조세부담은 농민, 상인, 수공업자가 전담하였으며, 이 중에서도 조세의 대부분은 농민이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인이나 수공업자의 조세부담은 극히 미미하였다.
농민의 부담내용은 전세 · 공물 · 군역 · 요역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역시 전세였으며 전세의 수조를 처음에는 조세기준을 10분의 1로 하였으나 1480년(성종 11)에 조세율을 높여, 조세율은 4분의 1로 개정하고 토질에 따라 상 · 중 · 하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이처럼 농민은 국가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는데, 조세수납 과정에서는 공전의 세미수납 향리의 농간과 사전에서 귀족의 강요로 인해 세율이 무시되고 기준세율보다 초과 징수되었다.
공물수납에 있어서도 과도하고 무리한 부과가 성행하였고, 특히 몽고의 침략 이후에는 몽고에 대한 세공 때문에 부정의 정도가 극심해졌다. 아울러 대납제도로 인한 대납자의 착취까지 겹쳐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가혹한 수탈을 피하기 위해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거나 귀족 또는 사원의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조선시대의 조세제도 역시 고려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상공세의 비중이 커진 점이 특색이었으나, 재정수입의 절대적인 비중은 여전히 농민부담이었다. 관노비와 사노비에 대한 재정부담 면제는 고려와 마찬가지였으나 양반, 귀족의 사전에 대해서도 과세함으로써 이들도 농민과 함께 국가재정 부담의 일부를 담당하게 하였다는 점이 고려시대와 다르다.
그러나 사전에 대한 과세는 형식상 귀족의 부담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작농민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농민부담의 과세기준은, 처음에 1392년(태종 원년)에 수확에 따라 과세율을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실시하였다. 뒤에 평년의 평균수확량을 기준으로 조세율을 결정하는 공법(貢法)을 병용하다가 1444년(세종 26)에는 전분연분법(田分年分法)을 실시하였다.
전분연분법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구분하고 그 해 작황에 따라 10등분한 뒤 이를 참작하여 과세율을 정하도록 하고 있었다.
공부(貢賦:공물과 부세)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이 있었고, 사주인(私主人:벼슬아치가 객지에서 묵는 개인 살림집), 경주인(京主人:吏胥나 서민으로 서울에 머물러 지방 관청의 사무를 연락 · 대행하던 사람)에 의한 방납(防納)이라는 공물대납청부제는 농민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방납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1608년(선조 41)에 공부제를 폐지하고, 공물 대신 미곡으로 부과하는 대동법(大同法)을 제정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는 각종 세원을 토지에 집중시켜 단일화하였다는 점에서 경제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조선시대 농민의 군역, 요역부담은 노역부담으로 그치지 않고 조세부담 증가라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고려시대 996년(성종 15)에 우리 나라 처음으로 철전을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뒤에도 1097년(숙종 2)에 주전관을 두고 유문전(有文錢)을 주조하여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정에 음식점을 설치하여 주화의 통용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숙종 대에는 은병형 은화도 주조되었으며 몽고침략 이후 몽고지폐가 잠시 동안 유입되어 통용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주화통용 장려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교환의 매개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국가가 현물재정을 고수하고 조세의 납부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국가가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일반화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 대신 쌀과 직물이 일반 등가물로서 매개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화폐제도를 보면 1401년(태종 원년)에 저화(楮貨)가 발행되었고 1633년(인조 11)에는 처음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조되었다.
상평통보가 일반적인 통용력을 갖게 하기 위해, 정부는 대동미(大同米) 등 일부 공과를 전납하도록 허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상평통보가 점차 통용되자 정부기관으로 하여금 상평통보의 주조를 명령하여 허가함으로써 17세기 후반기에 주조사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주화통용을 촉진시키기 위해 정부의 공과도 현물과 함께 화폐로 납부하도록 허용하여 조선 후기 화폐경제는 점차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폐제도의 실시과정에는 많은 사주전의 출현과 조악한 주전의 남발로 인한 폐해도 끊이지 않았다.
동양의 전통적인 통치이념은 애민애휼(愛民愛恤: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품)로 표현되는 왕도정치 사상이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로 치국술로서 민본주의를 굳게 지녀 왔다. 고대국가의 재정은 대부분 농업에 의존하였고, 이에 따라 사회정책도 관개시설 정비, 농업진흥책의 실시, 토지 및 조세제도 개선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사회정책의 형태로 고구려에는 진대법(賑貸法), 신라에는 점찰보(占察寶), 백제에는 근로구호사업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도 전체적인 틀은 변하지 않은 채 법령, 제도가 더 정비되고 신분질서의 확립에 따른 사회안정을 기하기 위한 시책들이 펼쳐졌다.
추수를 한 뒤에 갚게 하는 곡물대여 제도인 흑창(黑倉), 곡물 외에 생활용품까지 대여해 주었던 의창(義倉), 물가조절 기능을 하였던 상평창(常平倉), 계와 비슷한 제도인 인호미법(姻戶米法) 등이 있었고, 질병구호의 임무를 지닌 제위보(濟危寶),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혜민국(惠民局) 등도 운영되었다.
공적인 구호사업으로는 비황(備荒:미리 흉년이나 재액에 대한 준비를 해 둠) · 구황(救荒:기근 때에 빈민을 구제함) · 구료(救療:병자를 구원하여 치료하여 줌) 등을 위한 제도가 있었으며 사적 구빈제도의 형태로는 계가 대표적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이렇게 다양한 사회정책 수단들도 초기의 의욕적인 건설기에는 제도적 실제적 성과가 있었으나, 점차 타성화되고 부패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 갔다.
고려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 때 확립된 조용조(租庸調)라는 조세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다. 조(租)는 토지를 대상으로 곡물에 부과하였으며 토지가 세원이었다. 용(庸)은 노동력에 부과하는 역(役) 대신에 하는 물납이며 호를 대상으로 하였다. 조(調)는 토산물에 부가되었으며 역시 호를 대상으로 한 현물세였다.
그 밖에 상인, 공인에 대한 과세와 어업세, 관세 등이 있었다. 전세의 불공평, 군역을 대신하는 군포제도의 남용, 환곡에 의한 불법수탈 등 삼정의 문란이 심하였다. 이러한 조세제도는 도입초기를 지나면서 대부분 부패되었다.
조선 후기는 신분제적 봉건사회의 모순점이 드러난 시기였다. 이와 함께 사회 자체 내에서 실학과 동학이라는 조류가 생성되었으나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내부모순으로 허약해진 체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에게 흡수되었다.
일제시대 경제정책은 우리 나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일제의 필요에 의한 농업정책 · 산업입지정책 · 노동정책이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일반 대중은 국가적인 정책보다 계 · 두레 · 향약 등 상호부조제도에 더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일제의 경제운영 목표는 기본적으로 일본경제를 위해 필요한 식량공출과 자원수탈, 그리고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 건설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국가경제의 비정상적인 운영, 전통적인 운영 및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해체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었고,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같은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우리 나라를 병참기지로 삼아 수탈을 가속화하였다. 특히 1930년대는 우리의 경제구조가 일련의 큰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일제는 이전까지 비교적 저조하였던 제조업 부문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제조업의 성장은 주로 일본회사의 투자증가에 의한 것으로서, 1930년에서 1937년까지 직물, 가공식품, 시멘트 부문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제조업 발전은 한국기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37년 일제의 만주침략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은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중화학 분야(금속 · 화학 · 전기기구 등) 확장에 역점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주로 일본인들의 소유였으며, 우리 중소기업은 중간재의 부족과 1940년대 초 총독부의 생산규제에 의해 대부분 폐쇄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1940년대 제조업 생산의 94%를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면 일제하 제조업 발전의 실체를 잘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들어서 민족계 기업은 전면적인 소멸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한국경제는 또 다른 이유에서 정상적인 경제정책을 수립할 형편에 있지 않았다. 종주국인 일본의 경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한국경제는 일본이 철수함에 따라 식민지 경제의 구조적 기반이 해체되었고 남북분단으로 인해 경제발전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나타났다. 그리고 미국 군정청은 한국경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단지 사회안정과 정치적 현상유지를 위한 미봉책으로 일관하였다.
이어서 새로이 수립된 한국정부에 의해 자주적인 경제운영이 시작될 무렵 6.25전쟁으로 기존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미국의 원조로 전후 복구를 시작하여, 1962년 본격적인 공업화가 개시되기 전까지 한국경제는 두 가지 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수입 극대화와 인플레 수속을 통한 민생의 안정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름대로 구축한 경제정책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미군정은 일제하에 실시되었던 공출(供出:국가의 수요에 따라 국민이 곡식이나 기물을 의무적으로 정부에 팔아 넘김)제도와 배급제도를 철폐하는 대신에 자유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 농산물 가격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사전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오히려 곡물가격의 급등을 초래하여 이를 폐지하고 다시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소유하였던 토지에 대한 농지개혁도 단행하였다. 1945년에 신한공사를 설립하여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관리하게 하였으며 신한공사가 관리하고 있던 약 24만ha(당시 총경작지의 11.7%에 달함)를 농가에 분배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49년에 새로운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1950년에 <농지개혁법> 시행령을 공포하였다.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다시 33만ha를 농가에 분배하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정부는 농업증산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종자개량, 경지면적의 확장, 비료증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식량수급사정이 매우 악화되어 1955년에는 미국잉여농산물 도입협정을 체결하여 막대한 양의 식량을 수입하였다. 또한 1958년에는 농업은행을 설립하여 농업금융을 지원하였다.
이상에서 보인 노력들은 농업생산성의 증대라든가 식량 수급사정의 완화 등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의 재분배를 통해 국민들 사이에 위화감을 불식시켜 1960년대 이후의 급속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 시대의 산업정책 목표는 당면한 경제혼란을 안정시키고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달성하려 하였다.
1945년에 주둔한 미군은 연합국의 전후 귀속재산처리를 위한 기본원칙에 따라, 패전국 소속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 조치를 공포하고 귀속재산을 접수 관리하는 형태의 공업정책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일본인의 재산은 1946년부터 미군정청의 관리하에 들어갔는데 그 규모는 전체 공장수의 85% 이상에 달했다. 한국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관리경험 부족으로 공업 부문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12월에 <한미경제원조협정>을 체결하고 휴전 후 타스카(Henry Tasca) 보고서에 기초하여 공업재건을 위한 방안을 수립하였다. 독자적으로 수립한 한국경제부흥3개년계획의 일환으로 공업부문종합계획 · 중소기업부흥계획 · 경인지구산업부흥계획 등 다양한 공업정책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의 주요 목표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증대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출의 증대보다는 국내수요를 충족시키려는 수입대체정책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곡물가격, 이자율, 그리고 환율을 낮은 수준에 유지하였다.
이 기간의 공업화과정에서 두 가지 사실이 특별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적의 재산 처리이고 둘째는 미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원조이다. 미군정 하에서 귀속재산의 불하는 미미하였고 본격적인 불하(佛下: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 넘김)는 한국정부에 의해서이었다.
1949년 12월에 제정된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해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불하되었다. 각종 연고에 의해 불하되었고 그 조건도 매우 파격적이었다. 이러한 정책적 특혜는 1950년대 한국경제의 기본 성격을 규정지을뿐더러 재벌 등의 독점대기업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1945∼1961년 동안에 미국의 경제원조는 31억 달러에 달하고 이 중 약 25억 달러는 비계획사업 원조로서 구호사업을 위한 소비재 구매용이었다. 휴전 후 한국경제는 약 10년간 4.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12.7%의 투자율에 기인하였다. 당시 평균 국내저축률이 4.7%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한국경제에 미친 원조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과 산업재건 비용의 부담으로 인해 매년 거액의 재정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적자는 원조물자의 도입과 그 판매과정에서 나온 대충자금으로 보전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는 두 차례의 세제개혁을 실시하여 세율을 인하하고 재조정함으로써 국민의 조세부담을 경감시키고 민간의 투자활동을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금융질서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1950년에 세 차례의 통화교환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통화가치는 계속 떨어졌고 1953년에는 통화개혁을 실시하여, 전시 인플레이션 요인과 여러 가지 경제적 왜곡요인을 제거하고 통화의 교환가치를 높이고자 하였다. 정부는 일반 시중은행을 국유화하여 직접 경영하고 기업을 지원할 목적으로 대출이자율을 매우 낮게 책정하였다.
6 · 25전쟁을 전후하여 발생한 하이퍼 인플레이션 기간에도 명목이자율을 20% 내외로 고정하였다. 그래서 실질이자율은 항상 마이너스가 되어 차입자를 보조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이러한 마이너스 실질이자율의 수준은 귀속재산을 취득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혜택이 되었다.
당시 정책의 기본적 경향은 수출 증대나 국민경제의 자립적 발전을 마련하기보다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외화 획득의 원천은 주로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주한 미군으로부터의 달러 수입이었다. 이러한 수입을 높이기 위해서는 환율이 낮은 것이 유리하므로 원화를 고평가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수출입 종류에 따라 환율을 달리하는 복수환율제를 채택하였다.
광복 뒤 3년간 계속된 미군정 아래에서는 주로 월남한 피난민, 해외 귀환 이재민, 구호를 요하는 빈민 등에 대한 구호사업이 이루어졌다. 1946년에는 <아동노동법규>, 1947년에는 <미성년자노동보호법>이 제정되어 아동복지에 대한 획기적인 조치로 인정되었으나 실제적인 효과는 미흡하였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헌법에는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생존차원의 여러 권리와 단결권 · 단체교섭권 · 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이 명문화되었다. 1953년 <노동조합법>과 <근로기준법> 등 주요 노동관계 법령의 제정을 계기로 기본골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하여 1992년까지 6차례의 5개년계획이 연속적으로 실시되었고, 1993년부터는 기존에 확립된 제7차 5개년계획을 대신해서 신경제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국내외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비현실적인 정책의 추진으로, 각종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동안의 과정을 보면 35년 동안 일관된 정책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공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달성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모든 경제정책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정부는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목표와 관련 기업의 수출 목표를 설정하고 이의 달성을 위해 재정 · 금융상의 모든 지원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보완적이어야 할 산업정책이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금융정책 · 재정정책 등은 본래의 목표를 제쳐두고 산업정책을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행하는 특성을 보이게 되었다.
정부는 국제시장에서 한국상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주요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을 정부 주도로 건설하고 이와 관련하여 민간부문에도 투자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여기에 소요되는 자본은 재정투융자, 정책금융, 그리고 외자의 동원에 의해 조달되고, 특히 민간부분에 대한 지원은 가격기구의 조정을 통해 금리, 환율, 상품가격 등을 유리하게 설정해 주었다.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수단으로는 인가 · 허가 · 금지 · 규제 등이 동원되었다.
개발 초기 우리 나라 산업구조정책의 핵심은 값 싸고 질 높은 노동력을 이용해 경쟁력이 있는 경공업제품을 생산하여 해외시장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있었다.
1970년대 초부터 우리 나라 산업구조정책은 1960년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으로부터 자본집약 산업인 철강 및 조선 등 중화학 공업으로 중점이 옮겨졌다. 이러한 중화학 공업화는 국제시장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바탕으로 수출의 역군이 될 것이기도 하지만, 국내 사회간접 자본 확충 및 건설토목 사업육성을 위해서도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와서는 제조업 중에서 석유화학, 철강, 금속제품, 기계, 전기 · 전자, 조선, 자동차 등을 중요 산업으로 지정하여 이들의 육성을 위해 각종 시책과 법률적 지원을 마련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우리 나라 산업구조는 노동, 자본집약 산업으로부터 자본 ·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이행되기 시작하였다.
1987∼1988년을 통해 전자, 반도체, 자동차 등 성장을 선도하는 유망제조업이 성장동력을 계속 확충해 나갈 수 있도록 설비투자를 촉진하였다. 그리고 전통적 경공업인 직물과 염색가공업에 대해서는 노후시설의 폐기, 감축, 대체를 지원함으로써 제품의 고급화를 통해 산업을 고부가가치화 하도록 구조개선을 유도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 경공업은 중국과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되어 갔으며, 문제되는 산업에 대해서는 구조조정 내지는 타업종으로의 전환을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부실기업이 과감하게 정리되었다.
한편, 산업조직 측면에서는 독과점규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면서 1976년에 <공정거래법>, 1981년에 <독과점규제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986년에는 경제력집중도 독과점규제법의 적용대상이 되었다.
그 동안의 산업정책의 자연스런 결과이지만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이 낙후되어 산업조직에서의 이중구조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중소기업 고유영역 지정,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지원 등을 실시하였으나 그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나라의 재정정책은 1960년대 경제개발 단계에서는 경제성장의 극대화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재정금융을 통한 투자재원의 조달이 경제안정을 저해하지 않도록 하고 국제수지를 악화시키지 않는 방향에서 안정적 성장을 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재정정책은 경제의 안정과 국제수지의 개선보다는 사회간접자본의 확충과 기간산업의 건설을 통한 목표성장률의 달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규모가 확대되고 경제구조가 고도화되어 경제운용에 대한 민간 부문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그리고 재정의 역할 또한 종래의 성장자원보다는 저소득층 및 낙후부문의 복지증진과 균형발전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경제개발비의 비중이 점차 감소되어 왔다.
경제개발비의 비중이 줄어드는 과정에서도 민간 부문이 담당할 수 없는 도로, 지하철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경제의 균형발전을 위해 정부의 지원이 불가피한 농어촌 및 중소기업 등에 대한 재정지원은 계속되었다.
또한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앞두고 지방재정의 확충이 요구되었다. 또한 농수산물 수입개방에 대비한 농어촌 구조개선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확대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조세수입에 있어서도 1991년에는 경제성장률 12.9%를 전제로 일부 세법개정에 따른 세수증감 요인을 반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 경제성장률의 전망치 초과, 수입규모량 증가, 환율 및 물가상승 등에 따라 초과수입이 예상되었는데, 결국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으로 1990년에 비해 조세수입 예산은 3.2% 증가하였다
재정정책의 하나인 소득재분배를 위한 조세정책을 보면, 우선 1967년의 세제개혁은 종전의 세제가 지니고 있던 제도적 결함을 시정하고, 경제개발을 지원하는 기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개발지원적 내자조달을 겨냥한 이 개혁에서는 국세와 지방세를 전반적으로 개편하고, 세원확보를 도모하고 있었다. 동시에 공개법인의 육성, 저축의 증대, 중요전략산업의 육성, 과학진흥 등을 위한 <조세감면규제법>에 의한 감면조치가 취해졌다.
1971년의 세제개혁에서는 장기적인 세제전망과 관련하여 기존세제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동시에 합법적인 납세회피를 봉쇄하여 현실에 부응할 수 있고 장래의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제마련에 중점을 두었다. 즉, 분류소득세제 중심에서 종합소득세로 과세대상을 확대하고 근로소득세와 사업소득에 대한 기초공제제도를 도입하였다.
1974년의 세제개혁에서는 직접세 계통에 종합소득세제가 채택되어 조세제도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976년에는 간접세 계통의 부가가치세가 채택되어 간접세의 현대화가 이룩되어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수출증대정책에 부응하는 현대적 조세제도가 확립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경제개발기의 우리 나라 조세정책은 법인세를 포함한 직접세보다는 일반 소비자에게 과중한 간접세 위주로 운영되었다. 그 주요 이유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자원을 동원하여 이 자원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하고 기업에게는 세금부담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생산활동에 힘을 실어주려는 데 있었다.
조세정책의 또 다른 역할은 오히려 수출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수출보조금의 형태로 내국세와 관련되는 것으로 부가가치세의 징수유예,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경비의 손비 인정, 수출품에 대한 특별소비세 면제, 수출용 시설에 대한 고속감가상각 등이 있다. 그리고 관세와 관련해서는 면세, 관세환급, 관세경감, 징수유예제도 등이 있다.
이 시기의 금융정책은 1980년대 초를 기준으로 하여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기에는 특정 산업 분야의 육성에 필요한 자금 동원의 극대화와 이를 위한 제도 금융권 통제를 주요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후기에는 정부주도의 금융 운용에 대한 반성으로 금융자율화를 추구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 산업자금의 동원을 위해 추진된 제도개편과 긴급조치들을 간단히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1962년에 <한국은행법>을 개정하여 한국은행을 정부의 관리에 두었고 이어 일반은행과 특수은행을 개편하였다. 그리고 특수 분야의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특수은행을 추가 설립하였으며 지방의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1971년까지 10개의 지방은행도 설립하였다.
경제건설에 필요한 외국자본을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외국은행의 국내진출을 허가하고 공공차관은 물론 민간차관에 대해서도 정부가 보증할 수 있도록 1962년에 <외국차관지급보증법>을 제정하였다.
정부의 산업정책이 중화학공업을 중시하면서 더욱 대규모의 자금이 필요하게 된 1970년대에 와서는 비은행금융기관의 설립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72년 이른바 8 · 3조치에 의해 그 설립근거법이 마련되었다. 단기금융법의 제정으로 어음의 할인 및 매매업무 등 단기금융시장 업무를 담당할 투자금융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어 상호신용금고, 신용조합 및 상호금융이 설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1차 석유파동으로 외국자본의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1975년의 <종합금융에 관한 법률>의 제정으로 종합금융회사를 만들어 민간베이스의 산업차관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증권회사 · 보험회사 · 벤처캐피탈회사 등을 설립하여 명실공히 산업지원 금융체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정부는 1962년에 <긴급통화조치법>을 공포하여 화폐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것의 목적은 기존예금의 일부만을 신권으로 교환하고 나머지를 산업자금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1965년 9월에 금리현실화조치를 취해 예금은행의 예금금리를 연 15%에서 26.4%로, 은행의 대출금리를 14%에서 24%로 높였던 것이다. 예금금리가 대출금리보다 높은 역마진에 더하여 수출산업에 대한 대출금리는 6% 전후이었다.
정부는 각종 금융기관들로부터 조달된 금융자금을, 투자 우선 순위에 따라 중요 산업에 배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책금융과 여신관리제도를 도입하였다. 정책금융은 특정 산업 혹은 기업에 우선적으로 배분되는 자금으로서 이자, 만기일, 그리고 지급보증 등의 대출조건에서 유리하였다.
특히 자금에 대한 만성적인 초과수요 상태에 있던 당시로는 자금의 배분 자체만으로도 기업에게는 크나큰 특혜였는데 금융기관 총 대출금의 절반을 상회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배정된 자금이 비업무용 부동산의 구입과 같이 다른 용도로 전용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여신관리제도였다. 이는 1974년까지 사후적으로 관리하는 형태를 취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사전적으로 관리하는 형태로서 주거래은행제도로 발전하였다.
한편 통화신용정책의 정책적 기초는 충분한 성장통화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화증가율은 연평균 30% 내외의 높은 수준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율도 평균 15%에 달하였다. 통화관리 방식을 보면 1965년까지 분기별 또는 연간계획을 세워 통화량을 중심으로 유동성을 규제하였다.
1965년 9월의 금리현실화를 계기로 하여 1966년부터 본원통화를 규제하고, 1970년 이후는 국내여신을 규제함으로써, 1966년 이래의 통화관리방식이 직접규제에서 간접규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간접규제는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의 미발달 등 환경적 제약 때문에 본격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정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선별적 직접규제방식이 정교화되면서 널리 활용되었다.
즉, 정통적 간접규제수단만으로는 효율적인 통화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는 금융기관의 대출한도에 대하여 창구지도 형식으로 암묵리에 직접규제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금융기관의 여수신 금리 및 여타 요금의 최고율을 정부가 결정하였다. 또한 통화량이 이례적으로 팽창하는 경우에는 금융기관의 자금 일정액을 한국은행의 통화안정계정에 예치하는 방법도 동원하였다.
1980년대에 와서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사회적인 비능률 요인의 팽배, 그리고 지역 · 계층간 불균형의 확산 등이 나타남에 따라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에 대한 한계가 부각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국제 환경적 요인으로서 미국 등으로부터의 국내시장의 개방 압력도 큰 몫을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민간주도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금융자유화 및 금융자율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먼저 금융제도 개편을 보면, 그 기본 경향은 국내금융제도의 선진화, 각종 규제의 간소화 및 투명성 제고이다. 그리하여 금융기관의 신설 및 업무 전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다양한 금융상품의 취급도 허락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와서는 종합금융회사가 대거 신설되어 단기자금을 비롯하여 자본거래가 전면 자유화되었다.
1984년에는 고객의 신용도에 따라 차등금리를 적용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고, 1991년에 4단계 금리자유화계획을 발표하는 등 정부는 금리자유화를 금융개혁의 첫걸음으로 인식하고서 금리자유화를 조기 추진하였고, 1997년까지 요구불예금 금리마저 자유화하였다.
한편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각종 금융규제를 폐기하거나 단순화하고 명시화하였다. 금융기관간의 상호경쟁을 제한하였던 금융단 협정을 1984년에 폐기하고 이어 각종 수수료율의 결정도 자율화하였다.
그러나 대기업에 대한 여신규제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부동산 취득이나 기업투자에 대한 금지 및 제한이 엄격하였다. 1994년에는 정책금융 축소 · 정비 방안을 마련하여 농어촌, 중소기업지원 등의 국민경제상 지원필요성이 인정되는 부문은 점차 재정지원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1993년 8월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 경제명령을 발표하고 금융자산의 실명화를 유도하였다.
개발 초기부터 1990년대 초까지 우리 나라의 무역은 수출제일주의에 입각한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진흥정책에 의해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다. 정부는 수출과 관련된 산업에 대해서 시중 금리보다 낮은 금리 또는 마이너스 금리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수출보조금, 수출장려금 같은 직접적 지원수단을 동원하여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에 전력을 기울였다.
1960년대 초 우리 나라의 수출은 수산물, 광산물을 중심으로 한 제1차산품의 수출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으며, 상품구성도 큰 변동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1962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이 수립, 실시되고 수출을 통한 고도성장 전략이 채택되면서 1970년대 중반까지 섬유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이 수출을 주도하여 왔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중에는 중화학 부문 중심으로 수출구조가 개편됨으로써 1982년 이후에는 자동차, 선박, 철강, 전자제품 등 중화학 공업제품의 수출비중이 경공업 제품을 상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1차산품의 수출비중은 1975년의 18.6%에서 1987년에는 5.2%로 크게 저하된 반면, 공산품은 1970년 이래 연평균 26.4%의 급격한 증가율에 힘입어, 1975년의 82.4%에서 1987년에는 94.8%로 크게 높아져 수출산업 구조의 고도화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수출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수출물량의 증대에 따라 수출상품의 구성 및 순위가 공산품 위주로 전환되었다. 즉, 1970년대 초반만 하여도 섬유류, 합판, 가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이 전체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공업화 육성과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확대로 선박, 전자, 철강제품이 수출주도 상품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중화학 공업 제품의 수출이 10대 수출상품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무역의 추이는 세계무역에서의 한국의 위치를 굳히게 하였는데, 1989년에는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 이어 12위를 차지하는 무역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수출제일주의 정책에 기반한 무역발전은 무역상대국간의 무역마찰을 초래하였으며, 특히 미국, 유럽공동체(EC), 오스트레일리아 등과의 마찰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미국의 개방압력은 1980년대에 이르러 기존의 가격, 물량규제가 강화되었으며 지적재산권 침해에 따른 불공정거래행위의 규제가 크게 강화되었다. 1986년 이후에는 환율의 절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농산물의 수입개방을 요구하는 등 농업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이에 따라 선진국으로부터 후진국이나 개도국에게 부여되던 특혜가 축소되어 갔다.
이와 함께 선진국으로부터 정부의 직접적인 산업지원정책의 폐지되고 국내시장에 대한 개방압력이 강화되어 감으로써, 이제 선진국으로부터 특혜대우를 받던 시대로부터 세계시장에서 동등한 경쟁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 나라 농업정책은 사실상 이름은 있으나 농업이나 농민을 위한 정책은 부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경제개발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농민은 저곡가정책과 저농산물 가격정책을 통해 도시 근로자와 함께 산업의 자본축적 기반 역할을 하여 왔다.
정부가 2중곡가제를 통해 농민과 도시민에게 함께 유리한 정책을 편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농산물 유통구조의 전근대성과 폐쇄성 때문에 농민은 풍작일 때나 흉작일 때나 똑같이 손해를 보았고, 반면에 유통상인만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1980년대 이후 붕괴되어 가는 농업기반과 농민의 농촌이탈 현상을 막기 위해 대규모 자금을 여러 가지 형태로 농업과 농촌에 투입하여 왔다. 그러나 이 정책 역시 감독 소홀로 자금의 비효율적인 유실현상으로 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 나라 농업은 대부분 공업화 우선정책의 그늘 속에서 일방적으로 경시되었다. 이 밖에도 우리 나라 농업은 다른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최근 농촌단체 조직은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고, 농촌사회정책은 농촌생활의 합리화 및 개선에 치중하여 전근대적인 잔재를 탈피하려는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농업생산 구조 역시 격감하는 농업인구와 방치되어 가는 농지 증대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소농생산에서 기업농 생산위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정책으로 변해가고 있다.
노동정책이 가시화된 것은 1960년대 후반 산업노동력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종합적 관리의 필요성이 커지면서부터이다. 1970년대에는 전태일(全泰壹) 분신사건으로 노동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집단적 노사관계에 대한 규제를 강화시켜, 근로자의 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장기간 유보되었다.
1980년대에는 노동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노동청이 부로 승격되었으나 노동관련법은 집단적 노사관계를 더욱 규제하였다. 1990년대에는 노동정책이 규제위주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대등한 노사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6 · 25전쟁을 거치면서 사회정책은 응급구호 등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3년에는 <노동조합법> · <노동쟁의 조정법> · <노동위원회법> · <근로기준법> 등이 제정되는 외형적 성과가 있었다.
이후 1960년 <공무원 연금법>, 1963년 <산업재해 보상보험법> 등이 제정되는 등 법제적 정비가 이루어졌으나 현실적인 어려움 등으로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1976년 <의료보험법>, 1977년 <의료보호법>, 1981년 <공무원 연금법>, 1982년 <생활보호법>, 1986년 <국민연금법> 등이 제정 실시되었다.
우리 나라 사회정책은 사실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큰 발전을 보였다.
우리 나라의 사회정책은 복지국가 건설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1997년 겨울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는 과거 10여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 오던 우리 나라 사회정책을 제자리걸음 또는 퇴보하게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인당 소득이 1만 달러를 넘던 1997년과는 달리 경제위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폭증하는 실업에 대한 신속하고 폭넓은 대책이 요청되고 있으나 이를 위한 지원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대부분 적자재정을 통해 임시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2년에 출발한 문민정부는 정부가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경제운영시대로부터 민간주도의 경제운영시대로, 그리고 중상주의적 대외 경제정책시대로부터 개방적 대외경제정책시대로의 대전환기에 출범한 만큼 주어진 과제도 막중하였다.
문민정부에게 주어진 국민경제 운영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요구는 거기에 걸맞는 내적 준비와 개혁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국민적 기대를 안고 출발한 문민정부는 우리 경제수준에 맞는 경제운영 방식의 전환과 도도하게 밀려오는 시대의 변화에 대한 안이한 대처로 결국 금융 · 경제위기를 낳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다.
1997년 겨울에 시작된 금융 · 경제위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주체적인 개혁과 경제구조 전환의 기회를 소홀히 한 결과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던 각종 구조조정 작업과 개혁 프로그램은 이제 국제통화기금과 채권국가들의 요구와 압력 하에서 신속하고, 또 자율적인 조정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단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문민정부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부터 자율 경제시대로의 전환기에, 정부의 미시경제 주체에 대한 감독, 감시 및 조정기능까지 포기하는 무책임성을 보였다. 여기에 정권 말기의 누수현상이 겹쳐 정치지도자나 경제관료 모두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다.
그리고 외환보유고에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도 여전히 정부의 직접적인 외환시장 개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음은 물론, 준비가 미흡한 가운데, 무리하게 강행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급격한 금융시장 개방은 외국 단기 투기자금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라 경제위기의 주요인은 정경유착, 관치금융, 정부의 무정견과 무정책, 재벌기업의 무분별한 차입경영, 무분별한 외자도입 및 과잉 중복투자, 여기에 더하여 동남아 금융위기와 함께 시작된 국제 단기투지자금의 금융시장 공략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에 빠진 결과 만 달러를 넘던 일인당 국민소득은 6천 달러 수준으로 급락하였고 150만 명을 넘는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있다.
1998년 후반기부터 선진국이 금리를 인하하고 경기부양정책 등을 취함으로써 세계경제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호전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외채를 갚고 1997년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98년 2월에 출범한 새 정부(일명 국민의 정부)는 다음과 같은 정책지표를 내걸었다. 먼저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데 경제운영의 중점을 둔다. 그리고 철저한 경쟁원리를 지켜 보호, 특혜, 특권 또는 독점이 아닌 시장에 의해 공정한 경쟁이 확보되는 사회를 구현하는데 주력한다.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기술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한다. 문어발식 확장, 과다차입 경영, 계열기업간 상호지급보증, 총수 일인에 의한 독단적 경영 등으로 얼룩진 재벌기업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재벌기업으로 하여금 경쟁력있는 부문에 집중투자하도록 하고 국가경제를 중소기업 중심 구조로 개편한다.
산업은 전반적으로 지식정보산업 위주로 개편해 나간다. 새 정부는 수출 못지않게 외국자본의 투자유치에 힘쓴다. 농업을 중시하고 특히 쌀의 자급자족을 실현한다. 그리고 금융산업의 부실을 철저하게 개혁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없애 금융시장을 시장원리에 의해 운영되도록 한다.
새 정부의 경제운영 목표는 한마디로 철저하게 시장원리에 의해 경제가 운영되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구조를 재벌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개편하고, 산업은 지식정보산업을 집중육성하여 정보화시대에 발맞춰 나간다는 점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운영 방식과 경제구조의 대전환을 필요로 한다.
이상과 같은 정책지표들은 사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개발시대 이후 정권들도 모두 내세웠으나 실천하지 못했던 내용들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는 경제위기중이어서 정부가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유리한 시기이고 국민경제가 구조조정이 유리한 경제침체기에 처해 있다는 점 등 유리한 요소가 지원세력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사항이 상당부분 우리 경제가 가야할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로서는 과제가 무거운 만큼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게 주어진 무거운 과제들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