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37년에 설립되었던 영화제작단체.
개설
기능과 역할
1940년 가난한 소년의 향학심을 앙양시킨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수업료>를 내놓았는데, 제작에 이창용, 원작에 우수영(禹壽榮), 각색에 유치진(柳致眞)으로 출연진은 복혜숙(卜惠淑)·김신재(金信哉)·문예봉(文藝峰) 등이었다.
1940년 11월<승리의 뜰>을, 1941년 2월<집 없는 천사>를 발표하였다. 1941년 3월 만주에서 현지촬영하고 만주영화사(약칭 滿映)와 합작한 전창근(全昌根) 감독의 대작 <복지만리>가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전창근의 귀국 데뷔작으로서, 만주로 집단이민한 우리 동포의 협동정신과 크게는 동아시아 민족의 화합을 그렸다. 그러나 주인공역을 맡았던 전창근은 일본에 저항을 드러냈다 하여, 일본경찰에 붙들려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작품의 성과와 연출은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처음으로 크레인촬영을 시도함으로써 촬영기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제작 및 기획에는 이창용, 출연진은 전창근·유계선(劉桂仙)·전옥(全玉)·전택이(田澤二) 등이었다.
1942년 1월 계몽영화 <풍년가>를 개봉하였고, 마지막 작품으로 1943년 4월 29일<망루의 결사대>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일제는 1942년 9월 전쟁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어용단체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하여, 기존의 모든 영화제작단체와 회사들을 통합, 재산몰수 등의 방법으로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고려영화협회는 이 통합에 반대하고 스스로 탈퇴함으로써 해산되었다. 광복 후 최인규 형제가 고려영화사라는 이름으로 재기해서 <안중근사기>·<3·1혁명기>·<해방된 내고향>·<독립전야>·<파시 波市> 등을 발표하였으나, 6·25전쟁 때 최인규가 납북됨으로써 결국 문을 닫았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삼애사, 1969)
- 『한국영화총서』(한국영화진흥조합, 1972)
- 『한국영화자료편람』(영화진흥공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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