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송(高松)’이라고도 한다. 발해 멸망기에 발해에서 태어났지만, 군사 전략에 뛰어났던 그의 활약상은 주로 발해 멸망 후 요나라 조정에서 빛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거란에 충성했던 발해 유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그는 발해 왕실이 멸망할 즈음에 고려로 망명했다가, 고려왕의 딸을 처로 삼았는데 곧 죄를 짓고 다시 요나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발해가 거란에 평정된 후 고모한(高模翰)이 고려로 왔다면 당시는 왕건 재위기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발해인 고모한이 왕건의 공주 가운데 누군가와 결혼했으며 대략 그 시기는 926년경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혼인 기록이 고려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아 그 사실 여부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다만, 고모한이 공주와의 결혼 이후 죄를 짓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으로 도망가서 많은 공을 세우고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 까닭에 그의 혼인기사를 고려 측에서 고의로 누락시켰을 가능성은 있다.
그의 행적을『요사』에 의거해 살펴보자면, 요나라에 망명해와서도 술을 먹고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풀려났다. 그의 재능은 936년 후당(後唐)의 공격에 직면해 구원 요청을 해온 태원(太原)의 석경당(石敬塘)을 도우면서부터 확인되었다. 후당은 936년 7월장경달(張敬達)과 양광원(楊光遠)에게 군사 50만 명을 거느리고 태원을 공격하게 하자, 성주인 석경당이 요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요나라 태종은 고모한을 보내 후당군의 공격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938년 요나라에 협조적이었던 석경당의 후진(後晉)이 친선 동맹을 배반하고 요나라를 공격해 오자, 다시 고모한이 통군부사(統軍副使)로 발탁되어 후진을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그는 시중(侍中)과 태부(太傅)의 벼슬을 받았다.
그 뒤 또 한 차례 후진의 위부절도사(魏府節度使) 두중위(杜重威)가 3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와 요나라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고모한의 계략으로 후진 군대를 패퇴, 항복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의 벼슬을 받고 철군의 개국공(開國公)이 되었으며, 변주(汴州)의 순검사(巡檢使)가 되어서는 범수(氾水)의 여러 산적들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948년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받고, 목종 초 관직이 중대성(中臺省)의 우상(右相)에까지 올랐으며, 959년 1월 좌상(左相)으로 옮겼다가 세상을 떠났다.
고모한과 고려 태조왕건의 딸과의 혼인관계는 고려 초기에 발해와 고려 사이에 보다 긴밀한 유대감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이 국내 호족뿐만 아니라 발해에서 내투한 유민에게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