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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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이론에 의거하여 기존사회의 변혁을 이루려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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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공산주의 이론에 의거하여 기존사회의 변혁을 이루려는 운동.
내용

19세기 중엽 마르크스(Marx,K.)와 엥겔스(Engels,F.)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주의는 당시 노동운동의 사상과 이론적 지침이 되면서 주로 서부유럽에 전파되었는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의 레닌(Lenin,N.)에 의하여 보다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1917년 10월 볼셰비키(Bolsheviki)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을 탄생시켰고,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인 ‘코민테른(Comintern)’이 창설되었다. 이 코민테른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으로서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 해외공산주의운동

초기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발원지는 러시아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두만강을 넘어 극동노령(極東露領)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이고, 경술국치 후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3·1운동을 계기로 정치운동가들의 이주가 많아졌다. 1926년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관구집행위원회(管區執行委員會) 발표에 의하면, 관구 내 거주하는 한인 수가 18만5480명에 이르고 있다.

이 무렵 독립사상을 품고 있던 이동휘(李東輝)는 1918년 5월 볼셰비키당 간부인 크라스토체코프, 김알렉산드리아과 협의해 원조를 확약받고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이동휘는 곧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1919년 4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됨(11월 취임)으로써 그의 일파들은 상해로 옮겨갔다. .

이동휘는 1920년 말 모스크바 자금이 도착하자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1921년 1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했고 5월 한인사회당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파에 대항하여 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 등과 같이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을 조직하였다. 중앙간부로서는 이동휘·김립·조완구(趙琓九)·조동우(趙東祐)·이동녕(李東寧)·김두봉(金枓奉) 등이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여운형(呂運亨)은 당으로부터 문서번역을 책임지게 되어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여 간도지방과 기타 지역에 배포하였다.

한편, 중앙시베리아지역인 이르쿠츠크 한인들은 1918년 1월 22일에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를 창립하기 위하여 회합을 가졌다.

그 뒤, 1920년 1월에 남만춘(南萬春)·김철훈(金哲勳)·최동순(崔東順) 등이 중심이 되어 이르쿠츠크공산당 코르뷰로[고려국(高麗局), 이칭: 고려부(高麗部)]를 조직였다. 이르쿠츠크파라고 지칭하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파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들 이르쿠츠크파는 7월 '전로고려공산당(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을 업고 1921년 5월 6일 이르쿠츠크에서 제1차 재로선인공산주의대회(第一次在露鮮人共産主義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안병찬(安秉讚)·한명서(韓明瑞)·남만춘·한규선(韓奎善)·이재복(李載馥)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이재복과 안병찬은 북경(北京)에 근거를 두고 중국에서 활동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들 두 파간에는 심한 의견대립이 있었고, 양파의 제휴·합동이 실패하게 되자,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비롯한 모든 조직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대신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총국(極東總局)에 속하게 되는 코르뷰로를 설치하였다. 이 코르뷰로는 보이딘스키·가타야마센(片山潛)·정재달(鄭在達)·한명서·이동휘 등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 국내공산주의운동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바뀌어짐에 따라, 언론·출판·결사 등에 대한 통제가 다소 완화되어 『동아일보』·『조선일보』가 창립되고,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일본자본의 침투로 공장노동자가 증가되어 청년단체·노동단체들이 조직될 수 있었다.

① 1919.12.:서울에서 차금봉(車今奉)·박중화(朴重華)·김사용(金思容) 등 50여 명이 조선노농연구회 발기준비위원회를 조직, ② 1920. 4.:위 명칭은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총회로 개칭하여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③ 1920.6.15.:인천에서 인천노동연맹을 조직, ④ 1920.6.:안확(安廓)·장기욱(張基郁)·이병조(李秉祚) 등이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期成會)를 조직, ⑤ 1920.12.1.:정식으로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113개 청년단체, 3만 명), ⑥ 1921.1.27.:청년연합회 간사인 장덕수(張德秀)·김명식(金明植)·오상근(吳祥根) 등 민족주의자들이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조선청년회연합회내의 좌파인 김사국(金思國)을 중심으로 김한(金翰)·박일병(朴一秉)·이영(李英)·박형병(朴衡秉)·임봉순(任鳳淳) 등이 서울청년회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청년연합회는 2개 조류로 분열이 되었고, 연합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덕수 등은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운동이 쇠퇴하는 반면, 김사국·이영 등 서울청년회파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하고,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적 제반결의를 하게 됨으로써 사회주의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밖에 1921년 11월 일본에서 박열(朴烈)·김찬(金燦)·정재달 등이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는데, 이에 가입한 김약수(金若水)는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1922년 12월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이 입경하여 활동하게 되자 서울의 급진적 청년들은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그리고 2월 신인동지회(新人同志會)를 조직하였다. 북성회계는 1923년 5월 토요회(土曜會)를 조직, 계속해서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와 제휴하는 등 자기들의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서울청년회계와 북성회계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 서울청년회계가 요리점 낙양관(洛陽館)에서 북성회일파에 대하여 폭행을 가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사상은 주로 지식인을 통해서 수용되었고, 각종 운동단체 내에 침투되고 여러 개의 사상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 경 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총국의 코르뷰로(이동휘·정재달·한명서 등 3명의 한인위원)는 이르쿠츠크 군정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던 김재봉(金在鳳)과 신철(辛鐵, 본명 辛容琪)에게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할 지령을 내려 파견하였다. 즉, 김재봉은 공산당을, 그리고 신철은 공청(共靑)을 조직할 임무를 주었다.

그리하여 신철은 1923년 4월에, 김재봉은 5월에 서울에 들어왔고, 주로 북성회계와 접촉을 가졌다. 그리고 1923년 5~6월 김찬의 집에서 이봉수(李鳳洙)·김약수·원우관(元友觀)·신백우(申伯雨) 등과 코르뷰로 국내부(이칭: 내지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7월 김재봉·김찬·구연흠(具然欽)·홍덕유(洪悳裕)·홍증식(洪璔植)·홍명희(洪命熹)·박일병(朴一秉)·원우관·이재성(李載成) 등이 모여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고 북성회와 함께 노농총연맹을 조직하려고 계획하였다.

한편, 서울청년회에서는 1923년 3월 신흥청년회 및 기타 청년단체를 망라하여 전 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개최하였고, 북성회계의 노농총동맹조직계획에 대응하여 같은 해 10월 노농대회 준비를 시도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중지되었고 북성회계의 계획도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찬·김재봉 등은 신사상연구회를 만들었고,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하였으며, 3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라노농동맹, 그리고 대구에서 남선노농동맹을 조직하였다.

4월 신사상연구회와 북성회가 주도하여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직하게 된다. 이에 맞서 서울청년회측에서는 1924년 4월 21일 조선청년총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는 신사상연구회계의 신흥청년동맹원들이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형식상으로는 노농단체·청년단체가 양파의 통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으나, 주도권 장악을 위한 투쟁은 치열하였다.

1924년 4월 현재 조선노농총동맹에 가입한 단체는 182개였으며, 조선청년총동맹에는 224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어 서울청년회계가 다소 우세한 편이었다.

1924년 7월 11일에 개최된 조선청년동맹 제1차 집행위원간담회를 계기로 서울계와 화요회계는 다같이 당조직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2) 서울계 공산당조직

1924년 10월 김사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계 인물들은 계동에 사는 김사국, 삼청동의 장채극(張彩極), 수송동의 김유인(金裕寅) 등이 황금정6정목(黃金町六丁目)의 박형병 집 등에서 밀회를 거듭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간부를 결정하였다.

그 간부로는 책임비서 김사국, 조직부 김사국, 선전통신부 이영, 교양부 김유연·정백, 청년부 이정윤, 사회부 박형병, 노동부 이병의(李丙儀), 민족부 김영만(金榮萬), 연락부 이항발(李恒發), 검사부 강택진(姜宅鎭) 등이었다.

그 뒤 각 도기관과 세포조직에 착수하고 권태석(權泰錫)·최익환(崔益煥)·권혁근·박태선·한해(韓海)·박원희(朴元熙)·최창익(崔昌益) 등을 가입시켰다. 한편, 서울계 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는데 책임비서에는 이정윤, 그리고 중앙간부로서 임봉순·김병일(金炳一)·조기승(趙紀勝)·이인수(李仁秀) 등이 결정되었다.

(3) 화요회계 공산당조직

화요회계의 공산당조직은 주모자들이 1924년 8월 24일에 검거됨으로써 일시 중단되었다.

다음해인 4월 15일부터 3일간 전조선신문기자대회가 끝난 4월 17일 중국요리점인 아서원(雅敍園)에서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모두 12인으로, 이날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선출되었다.

김재봉의 진술에 의하면, 이날 참석한 사람은 자신 외에 김약수·김찬·독고 전(獨孤佺)·송병우(宋秉瑀)·유진희(兪鎭熙)·윤병덕(尹炳德)·조동우·김상주(金尙珠)·조봉암(曺奉岩)·주종건(朱鍾建)·진병기(陳秉基) 등이었고, 김약수·김재봉·김찬·유진희·정운해·조동우·주종건의 7명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창당식에서 정운해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검사위원으로 송병우·윤병덕·조봉암이 선출되었다. 집행위원회는 두번 소집되었으나, 첫번째만 제대로 개최되었을 뿐, 두번째는 정원 미달로 인하여 아무런 결정도 보지 못하고 유회되고 말았다.

첫번째 집행위원회는 공산당 결성 다음날인 4월 18일 오후 2시 김찬의 집에서 열렸다. 이날은 집행위원 7명 전원이 참가하여 각각의 부서를 결정하였다.

이날 결정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비서부 김재봉, 인사부 김약수, 선전부 조동우, 노동부 정운해, 정경부 유진희, 조직부 김찬, 조사부 주종건 등이었다.

두번째 집행위원회는 5월 하순 또는 6월 중순경에 소집되었는데 김재봉·김약수·유진희·김찬 등 4명만이 참석하여 유회되고 말았다. 원래 이날 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원 미달로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지 못하는 바람에 당의 강령조차 확정짓지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편, 김찬의 집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가 개최되고 있을 때, 박헌영(朴憲永)의 집에서는 화요회계의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약칭은 공청)의 발기에는 18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박헌영·권오설(權五卨)·김광(金光)·김동명(金東明)·김상주·김찬·김태연(金泰淵)·박길양(朴吉陽)·신철수(申哲洙)·안상훈(安相勳)·임원근(林元根)·임형관(林亨寬)·장순명(張順明)·정경창(鄭敬昌)·조이환(曺利煥)·조봉암·진병기·홍중식 등이었다.

공청은 공산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교양단체로 권오설·김태연·김찬·박헌영·조봉암이 당시 서울에서 민중운동자대회·전조선기자대회 등이 개최되는 것을 이용해서 조직한 것이다. 공청의 강령은 김태연이 미리 작성한 것을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사회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경제제도는 사회진화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조직은 지금까지의 법칙에 의해서 사회주의 경제제도로 대체될 운명에 처하였기에, 우리들은 이 사회진화의 법칙에 따라 도래할 사회를 준비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그리고 점점 격화하고 있는 계급투쟁에 의하여 일어나는 수많은 희생자를 극소화하는 데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

② 우리들은 자본주의제도를 폭력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여건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인식하여 회원에게 이것을 교양한다.

계급투쟁에 의하여 발생하는 희생자를 구하는 방법으로 박헌영은 조합운동 등에 의하여 노동자의 대표를 의회에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이 의회에서 노동자의 권리증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날 결성된 공청 조직으로 집행위원에는 권오설·김동명·김찬·김태연·박헌영·임원근·조봉암·홍중식, 검사위원에는 김동명·조봉암·임형관 등이 있다.

그리고 전형위원에는 신철수·조봉암·홍중식, 집행위원의 담당부서와 임무는, 조봉암(국제부)은 국제공산청년동맹과의 연락 담당, 박헌영(비서부)은 공청운동의 방침결정 및 문서·금전출납 담당, 권오설(조직부)은 회원모집·청년회연맹 담당, 임원근(교양부)은 공산주의 교양선전 및 모스크바에 유학생 파견담당, 김태연(연락부)은 해외에 있는 조봉암과 연락, 홍중식(조사부)은 각종 연구 및 조사업무 등이다.

(4) 코민테른으로부터의 승인

이처럼 1925년 4월 현재 서울계 공산당과 공청 그리고 화요회계의 공산당과 공청 등 두 계의 당과 공청이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느 쪽에서 먼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느냐가 그들 파벌경쟁의 핵심이 되었다. 화요회계 공산당은 당을 조직한 뒤, 약 1개월 뒤인 5월 김찬의 집에서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조동우가 기초한 당규약을 토의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견대립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조동우를 당 승인을 받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공청에서는 조동우보다 앞서 조봉암이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 서울계에서도 각 파에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당중앙간부 김영만과 당원 최창익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화요회계중심의 당을 인정하였으며, 서울계에 대해서는 1국1당원칙이 있으니, 화요회계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지령을 하였다. 서울계에서는 대담하게 코민테른의 지령에 불복하여 9월 당 중앙간부를 개선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당을 유지하였다.

개선된 중앙간부는 책임비서에 김사국, 서무부에 이영, 민족부에 이정윤, 청년부에 조기승, 사회부에 박형병, 노동부에 정백, 교양부에 김우연이 선임되었다. 서울계 공청도 강화하게 되었는데 당시 『신생활』 잡지의 기자였던 이성태(李星泰)를 포섭하여 공청간부로 삼았다.

(1) 제1차 공산당사건

이는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화요회계의 신만청년회원(新灣靑年會員)들이 음주로 인한 실수로 신의주경찰서에 의하여 공산당원과 공청원 등 66인이 검거되었다.

그 가운데 56인이 검찰에 송치되었다(뒷날 제1차 공산당사건이라고 불림). 그러나 검거에서 피하게 된 중앙간부 김재봉·김찬·주종건 등은 서로 접선하여 그해 12월 10일경 김찬의 은신장소인 낙원동에서 당재조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강달영(姜達永)·이준태(李準泰)·홍남표(洪南杓)·김철수(金錣洙)·이봉수 등을 후계중앙집행위원으로 추천하여 이들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들은 1926년 1월 하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책임비서에는 강달영, 비서에 이준태, 조직부에는 이봉수·홍남표, 선전부에는 김철수 등으로 결정하였다.

(2) 제2차 공산당사건

1926년 6월 10일 만세시위사건을 계기로 화요회계 당과 공청에서 135명이 검거되었다. 이를 제2차 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강달영은 40일 뒤인 1926년 7월 17일에 체포되었다.

그 뒤 검거에서 피하게 된 고광수(高光洙)와 김철수가 공청과 당을 서울계와 합동하여 재수습을 하게 되는데 1926년 10월경 임시중앙간부를 조직하였다.

책임비서에는 김철수, 선전부는 일월회(一月會)의 안광천(安光泉), 조직부에는 화요회계의 오의선(吳義善), 중앙간부는 화요회계의 원우관과 정우회(正友會)의 양명(梁明)이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서울계의 김준연(金俊淵)·권태석·이인수 등이 입당하게 되어 1926년 12월 6일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중앙간부를 개선하였다.

이때 책임비서에는 일월회의 안광천, 조직부장에는 일월회의 하필원(河弼源), 선전부장에는 서울계의 김준연, 중앙간부에는 서울계의 권태석, 정우회의 양명, 상해파의 한위건(韓偉健) 등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개편이 있은 뒤 김철수는 당 조직상황을 코민테른에 보고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리하여 1927년 4월 김철수와 김영만이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또다시 중앙간부의 개편이 있었는데 책임비서에 김준연, 선전부장에 한위건, 동부원(同部員)에 안광천·양명, 조직부장에 최익한, 동부원에 하필원·김세연(金世淵) 등으로 개편하였다. 계속해서 1927년 11월 당 간부선정의 전권을 위임받은 양명이 하필원과 상의하여 김세연을 책임비서로 정하고 그에게 간부구성을 의뢰하였다.

(3) 제3차 공산당사건

책임비서 김세연은 서울계의 소장파를 포섭하여 1928년 1월 5일부터 5일간 예정으로 당대회를 개최하고 간부를 새로 구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3차 공산당사건이 일어나 중단되고 말았다. 제3차 공산당사건은 1928년 2월 2일에 착수되어 김세연·최익한·하필원·최창익 등 26명이 검거되었고, 그 뒤 1개월 만에 총 49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제3차 공산당사건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고 검거를 모면한 자들은 집요하게 당대회를 추진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검거선풍이 불고 있는 속에서, 대회준비위원으로 선정되어 있던 김영식(金泳植)·이정윤·안광천 등은 비밀리에 서로 연락하여 1928년 2월 27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사이에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하현리에서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당 중앙간부 개선 및 기타 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중앙간부를 선정하기 위하여 이경호(李京鎬)·정백·이정윤 등 3명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대회가 끝난 바로 그날 전형위원 3명 가운데 정백과 이정윤이 제3차당사건과 관련, 경찰에 의하여 검거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중앙간부전형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후계간부를 선정하고, 그것을 이경호에게 연락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3월 10일이 되자 역시 같은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윤택근(尹澤根)이 석방되어 출감하게 되었는데, 정백·이정윤 등 두 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들이 선정한 중앙간부명단을 윤근택에게 주어 이경호에게 전하였다. 그 결과 9명의 중앙간부와 4명의 중앙간부후보 및 검사위원장 등이 결정되었다.

그 뒤 3월 17일 안광천·김재명·이성태 등은 서울의 죽첨정(竹添町)에 있는 차금봉의 집에서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각 위원들의 부서를 협의, 결정하였다.

책임비서에는 차금봉, 정치부장에는 안광천, 동부위원(同部委員)에 양명, 조직부장에는 김한경(金漢卿), 동부위원에 이성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김재명, 책임비서후보에 한해, 중앙검사위원후보에는 강석봉 외 1명, 중앙집행위원후보에는 윤근택 및 한명찬(韓明燦) 등으로 부서가 결정되었다.

(4) 제4차 공산당사건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제4차 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3월 19일에 열린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이미 상해에 가 있는 양명을 정식으로 당의 상해연락요원으로 임명하였다.

뒤이어 4월 23일에 열린 제5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7월에서 8월에 걸쳐 개최될 제6차 국제공산당대회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논의하고, 양명을 대표로 선정하여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록, 조선공산당 당칙 및 예산안 등을 양명으로 하여금 제출하도록 결의하였다.

양명은 예산안을 작성하는 것과 모스크바로 밀항하는 기회를 엿보느라고 많은 시일을 끌다가 같은 해 9월 겨우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연히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모스크바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던 한빈(韓斌)을 만나 같이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의하여 이병의·박형병 등 48명이, 그리고 6월 17일 이영·정학원(鄭鶴源) 등 28명이 검거됨으로써 서울계가 전멸상태에 빠졌고,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4차 공산당간부들을 포함, 163명이 검거되어 당 조직은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차금봉은 검거되어 공소중 1929년 3월 10일 사망하였다.

(1) 12월테제

코민테른은 6차대회(1928.12.10.) 직후에 조선공산당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하여 지령을 하달하였다.

<조선의 혁명적 노동자 농민에게>라는 제목의 간단한 서문과 <조선문제를 위한 결의>라는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12월테제(These:정치적·사회적 운동의 기본이 되는 강령)’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공산주의운동이 왜 부진한가 하는 원인에 대하여, 공업이 발달하지 못함으로써 공장근로자의 수가 적고 그 조직이 미약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객관적 제조건과, 한국공산주의운동을 수년간 괴롭혀 온 내부적 분열과 파쟁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당재건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공산주의자는 첫째로 공장노동자들, 그 다음에 생산과 관련되고 있는 빈농을 그들의 대열에 획득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zia:지식계급)의 서클식의 케케묵은 조직방법을 피하고 볼셰비키당의 대중활동으로 향할 때만이, 그들이 우선 공장과 노동조합 내의 활동에 그 노력을 집중하는 때만이 이 커다란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된다.”

(2) 당재건활동

1929년 1월 당재건을 위하여 만주의 둔화(敦化)에 있는 주건(朱建)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는 김철수·김영만·윤자영·김영식·김규열(金奎烈)·주건·김일수·오이세·강문수·안상훈 등이 참가하였다.

여기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으로 김철수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12월테제에 완전히 합의하고 1월 25일 4개 항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는 12월테제와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의 성명을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모스크바 동방공산대학 졸업생인 안상훈을 입국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안상훈은 이준열·방한민이 이끄는 14명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성명을 전달한 뒤 체포되었다. 그뒤 계속해서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검거되고 말았다.

1930년 1월 김철수와 20명의 당원들이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고 당재건활동을 시도하였으나 김철수는 1930년 3월에 체포되었으며 당재건을 하지 못하였다.

그 뒤 재건준비위원회는 함흥으로 장소를 옮기고, 1930년 9월 재건준비위원장으로 김일수를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공장지구에 침투하게 되었다. 김일수는 1931년 3월 23일 좌익노동조합평의회 준비회의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김일수, 정치국은 강문수, 노동쟁의국은 오이세가 맡았다.

이 평의회준비회의는 1931년 서울에서 개최된 노동절(May Day)데모를 계기로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강문수·오이세와 108명의 평의회준비위원회 회원이 체포되었다. 12월테제 후 김철수가 중심이 된 당재건운동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는 동방공산대학 졸업생들도 합류해서 시도한 것이다. 한편, 상해에 있었던 ML파의 지도자인 한위건은 상해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국내에 당을 재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일본에는 고경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고광수 등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고광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를 규합, 1929년 초 서울로 돌아와서 당재건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29∼1931년 겨울까지 수명의 공작원을 침투시켜 1931년 2월 27일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권대형(權大衡)을 위원장으로 창설하였다.

그리고 1931년 4월 10일 조직명칭을 조선공산당협의회로 변경하였다. 이 협의회는 월간 『코뮤니스트』와 월간 『봉화』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1932년 3월 모두 검거되었다. 그 뒤 당재건운동은 계속하여, 지하에서 소수에 의하여,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1939년 이관술(李觀述)·이순금(李順今)·장순명(張順明)·권오직·이현상(李鉉相) 등이 당재건을 위하여 조직한 것이 경성콤그룹이다. 이들은 마침 출옥한 박헌영을 책임자로 추대하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40년과 1941년에 걸친 검거로 명맥이 끊기고 만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특별히 지적할만한 것은 6·10만세운동과 함께 신간회운동을 들 수 있다. 1927년 2월 15일에 조직된 신간회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두 진영이 제휴하여 형성된 합법적인 결사였다.

즉, 일제하의 유일한 범민족적 성격을 띤 좌우합작단체로, 민족단일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간회가 제시한 강령(綱領:일의 으뜸이 되는 줄거리)은 첫째,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둘째, 우리는 단결을 확고히 한다. 셋째, 우리는 기회주의를 반대한다 등이다.

당초, 중앙의 회장에는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는 홍명희가 선출되었으나, 홍명희의 사의로 대신 권동진(權東鎭)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중앙위원 37명, 간사 34명이 선임되었다. 신간회의 회원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1931년 5월 지회 141개 소, 지회설립준비지 6개 소, 도지회연합회 2개 소, 그리고 회원은 3만9410명에 달하였다.

신간회의 성격에 대하여 이 회의 조직에 중요한 구실을 한 홍명희는 “신간회의 나아갈 길은 민족운동만으로 보면 가장 왼편길이나 사회주의운동까지 겸하여 생각하면 중간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민족운동에 있어서는 민족좌익전선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이 말은 사회주의를 뜻하기보다는, 우파민족진영의 자치론자에 대한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간회는 지방조직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민족정당다운 조직체였다. 그러나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파쟁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신간회의 내부 갈등은 1927년 3월 29일 초대회장 이상재가 사망하고 후임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1928년과 1929년의 정기대회가 일제에 의하여 금지되고 전국복대표대회(全國複代表大會)가 소집되면서부터이다.

이 대회는 몇 개의 지회가 한 사람을 합동선출하여 그들을 복대표로 하여 구성하는 약식대회를 의미한다. 1929년 7월에 개최된 전국복대표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허헌(許憲)이 선출되고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 가운데 대부분이 좌익으로 지목받는 인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사건이 11월 3일에 발생하자 신간회에서는 12월 13일 서울에서 민중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신간회 간부가 검거되었다. 이로써 신간회본부가 공백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주도권은 다시 민족진영에 돌아갔다. 그 뒤 신간회 해소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1930년 12월 6일 신간회부산지회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으며, 그 뒤 각 지회에 크게 확산되었다.

결국, 1931년 5월 16일 일본경찰 다수가 포위한 가운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지방대의원 77인이 참석하여 총회를 열고 사회주의자들의 주도하에 가(可) 43, 반(反) 3, 기타로 해소(解消)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간회는 창립대회와 해소대회의 단 두 번밖에 전체대회를 열지 못하고, 더 투쟁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자진 해체되고 말았다.

신간회 안에 좌우의 대립이 있었고 민중대회사건으로 좌익세력이 대부분 구금되고, 그것을 통한 민족진영의 중앙회 독점이 있었으며, 따라서 투쟁이 점차 약화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신간회의 자진해산을 정당화시킬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파에서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게 된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코민테른의 국제공산주의 혁명전략의 변화와, 그를 좇는 일본 노동당의 자체해체라는 일련의 국제적 움직임을 뒤따른 결정이라고 한다면, 이는 민족의 주체성·자주성을 결여한 사회주의이데올로기의 기계적 수용자세가 빚은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동기와 목적이 서로 다르지만, 민족의 광복과 독립이라는 공동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합작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독립과 계급해방이라는 이원적 목적(二元的目的)이 있었으며, 또한 주도권 장악에 실패함으로써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1)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

상해에 있던 조봉암은 최원택과 김동명을 동반하고 1926년 5월 16일 만주로 떠났는데, 1926년 7월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이르쿠츠크파의 수뇌 김철훈의 집에서 여섯 사람과 만나 총국을 결성하였다.

이 총국은 주로 조직부장인 최원택이 총지휘를 하였는데,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북만구역국(北滿區域局)·남만구역국(南滿區域局) 등 세 개의 구역국으로 조직하였다.

1926년 10월 28일 김인국(金仁國)·김용락(金龍洛)·이순(李淳) 등 9인이 동만구역국을 조직하였는데, 김용락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그 뒤 동만구역국은 13개의 세포와 3개의 프락션을 조직하였다.

동만구역국은 책임비서가 김용락으로부터 김인국을 거쳐 안기성(安基成)으로 넘어갔는데, 1927년 10월 3일부터 시작된 경찰의 검거로 28명이 체포되었다.

이는 서울에서 제2차 당사건으로 검거된 101명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재판에 항의하는 데모(1927.10.2.)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구역국·본부사무소를 습격당함으로써 검거된 것이다.

이는 뒷날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뒤 만주총국은 위원장으로서 오기선이 선출되었는데, 만주에서 북풍회(北風會)를 지도한 한상목(韓相睦)은 동만주에 만주총국의 설치를 기도하여 총국의 임시조직이 1928년 2월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1928년 메이데이에 대규모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소규모의 시위가 1928년 메이데이에 일어났다. 그러나 5월 10일 총국의 본부가 습격당함으로써 많은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

또한, 1928년 8월 1일 국제반제(國際反帝)의 날 또다른 시위를 김철산이 주도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85명의 시위가담자가 검거되었다. 김철산은 국내에 송치되어 처형되었다. 이것이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 이후 김찬은 만주총국을 재건하려고 만주에 돌아와서 화요회계의 잔존자들을 규합하여 이동산(李東山)을 위원장으로 총국을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본부는 공산주의활동을 북만구역국으로 집중시키기 위하여 아성현(阿城縣)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김찬은 북만주지방에서 지역조직을 구축한 다음에 남만구역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역은 통일전선을 제창한 ML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찬은 이들의 청산론자(淸算論者)들과 협력하였다. 즉, 이들은 민족주의자와 영합하게 되었고, 특히 광주학생사건 이후 1929년 12월 31일 반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동맹에서는 광주학생사건을 지지하는 대중데모를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 데모는 1930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진행되었고, 그 뒤 3·1운동을 계기로 대중폭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남·북과 동만주위원회로 구성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폭동은 규모가 예상보다 작았으며, 1930년 4월 17일의 대량검거를 야기시켰다. 이것이 제3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그런데 만주총국에 망라된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 말경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고, 총국은 해산되고 말았는데 이는 코민테른의 명령 또는 중국공산당의 요구, 그 밖에 한국인의 요구에 의한 것 등 세 가지의 설이 있다.

(2) 조선공산당 일본총국(日本總局)

조선공산당의 일본지부 설립은 제2차 당책임비서 강달영이 김정규(金正奎)·정운해·이상호(李相昊)·김한경·이석(李奭) 등 5명을 파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김정규는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 뒤 1927년 4월 안광천은 일본에서 교육받은 일월회의 회원 박낙종(朴洛鍾)과 한림(韓林)을 일본총국의 재조직을 위하여 파견하였다. 그런데 1927년 5월에 설립할 수가 있었고, 고려공청지부(高麗共靑支部)도 결성할 수가 있었다(책임자 인정식).

이들은 청년단체를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제3차 당사건이 발생하자 총국은 폐쇄되고 박낙종·최익환 등이 체포되고 그들이 발행한 『대중신문 大衆新聞』도 정간되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뒤 검거를 피한 송언필(宋彦弼)과 이우적(李友狄)은 서울에서 파견된 김한경과 다시 총국을 부활시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주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즉, 이우적은 잡지 『현단계 現段階』를, 공청의 인정식은 『청년조선 靑年朝鮮』을 발행하였다. 총국은 1928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에 약 150명의 학생과 노동자를 동원하여 시위를 감행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26명이 체포되었다.

이 때 총국의 재건자인 김한경도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김한경은 6년, 김천해(총국책임자)는 5년, 그 외의 21인은 3년형을 받았다.

12월테제 이후 박문병(朴文秉)이 총국의 부활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경(東京)으로 파견되어 인정식과 함께 일본총국을 부활시켰는데 큰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29년 3월 상해에 있는 ML파계의 고경흠이 동경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활동이 어렵게 되었고,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운영하여 신문·잡지를 발간하였다.

고경흠은 1931년 8월에 체포되고, 그 뒤 1931년 10월 일본총국의 해산을 발표하고 재일본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일본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이는 1931년 12월 31일 일본공산당기관지 『적성 赤星』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3)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운동은 일제 관헌의 엄격한 감시와 탄압으로 인하여 그 활동무대를 국외로 삼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공산당의 지배하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이다.

독립동맹을 구성하였던 인물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부류는 중국공산당의 해방구가 존재하였던 화북, 특히 옌안(延安)에서 활동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이다.

그 대표적 인물은 무정(武亭)이다. 그는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홍군(紅軍)의 지휘관을 역임하였고,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장, 1942년 독립동맹중앙위원, 1945년 조선의용군총사령에 취임되었다.

둘째 부류는 중국공산당지구에서 민족주의자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던 공산주의자 및 이들을 따르던 급진적인 청년들로, 이 그룹의 중심인물은 최창익과 한빈·김학무(金學武)·김창만(金昌滿) 등이었다.

셋째 부류는 1935년 6월에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의 민족주의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 내부에 설치되었던 조선혁명간부학교와 중국중앙군관학교 출신들이다. 중심 인물로는 박효삼(朴孝三)·양민산(揚民山)·이춘암(李春巖) 등이다.

그 밖에 이들 세 부류와는 달리 민족주의자였던 김두봉이 독립동맹에 참가하였다. 김두봉은 1889년 경상남도 동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조선 말기의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에게 배웠고, 그 자신도 이름 있는 한글학자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참가하였으며, 또 이동휘가 조직하였던 고려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그 뒤 1935년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南京)에서 우한(武漢)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으나, 다시 1942년 4월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지역에 들어가, 7월 11~14일 제2차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대회에 참여하였다. 이 대회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독립동맹(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이 1942년 7월 11~14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회에서 독립동맹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주석에는 김두봉, 중앙집행위원에는 무정·최창익·한빈·김창만·김학무·박효삼·이유민·이춘암·진한중(陳漢中)·채국번(蔡國藩) 등이 선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선언과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에 의하면 독립동맹의 주요 정치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통치를 타도하여 조선의 독립을 획득하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동맹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첫째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둘째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대를 도모하고, 셋째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무장부대를 확충하고, 넷째 대중에 기반을 두고 그 조직화를 도모하고, 다섯째 동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한다는 것이었다.

독립동맹은 분명히 공산주의자가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독립동맹의 강령은 공산주의적 색채를 거의 띠지 않았다. 채택된 강령의 내용은 김구(金九)와 김원봉이 발표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립동맹의 강령은 우익 민족주의자도 포용할 수 있는 민족해방운동의 공약수를 정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립동맹은 광복 후 1945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에 걸쳐 38선 이북으로 입북하였는데, 1946년 3월 조선독립동맹은 조선신민당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게 되었고, 김두봉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광복이 되자 제일 먼저 정치활동을 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일제하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던 이영·정백·이승엽(李承燁)·조동우·최익한·이정윤 등은 8·15광복이 되던 바로 그날 밤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 모여 16일 이른 아침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 당을 세칭 장안당 또는 장안파공산당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달리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서는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8월테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두 조직(장안파·재건파)간에는 당권을 둘러싼 시비가 벌어지게 되었고, 장안파는 8월 22일 간부회의를 열어 재경열성자대회를 개최해 당의 존속을 토론하기로 하였다. 9월 1일, 6일, 8일 열성자대회를 개최하였다. 9월 8일 열성자대회에서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에 합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정식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발표된 조선공산당(약칭은 조공)의 중앙간부명단은 박헌영 자파일색으로 짜여졌음을 볼 수 있고, 장안당의 이영·정백·최익한·이정윤 등은 제외되어 있어, 형식상으로는 재건되었다. 그러나 파쟁의 불씨를 안은 채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명단을 살펴보면, 총비서에 박헌영, 정치국에 박헌영·김일성(金日成)·이주하(李舟河)·무정·강진(姜進)·최창익·이승엽·권오직, 조직국에 박헌영·이현상·김삼룡(金三龍)·김형선(金炯善), 서기국에 이주하·허성택(許成擇)·김대준(金台俊)·이구훈(李龜壎)·이순금·강문석(姜文錫) 등이다.

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합법당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9월 19일 당발족에 따른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첫째, 1928년 공산당이 해체된 뒤 당재건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937년 이후부터는 콤그룹 중심의 지하운동형태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둘째, 8·15광복 이후 조직된 장안당은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하여 재건위로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셋째,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는 것을 공식화시킨 것이었다. 이때 제시된 당면투쟁목표는 ① 공산당은 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며 투쟁한다. ② 완전한 민족해방과 봉건적 잔재를 일소한다. ③ 인민정부를 수립한다. ④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한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한다는 등 네 가지였다.

이렇게 출발한 조선공산당은 대중단체로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1945.11.5.)·전국농민조합총연맹(1945.11.8.)·전국청년단체총연맹(1945.12.11.)·전국부녀동맹(1945.12.22.) 등을 조직하였다.

1946년 2월 15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좌익계 정당과 사회단체를 총망라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통일전선체를 조직하고, 의장으로 여운형·허헌(許憲)·박헌영·김원봉을 선출하였다.

그 뒤 조선공산당은 좌익노선을 표방하였던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단일한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합당의 방법론 때문에 일어난 내분으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과 사회노동당으로 분열되었다. 사회노동당은 얼마 안 가서 해체되고, 그 뒤 근로인민당이 새로 조직되었다.

남로당의 위원장은 허헌, 부위원장은 박헌영과 이기석이었고, 강령으로는 ①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②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도록 투쟁, ③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④ 8시간노동제와 사회보장제의 실시, ⑤ 중요산업국유화.

⑥ 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 ⑦ 언론·출판·결사·신앙의 자유, ⑧ 남녀 평등권, ⑨ 초등 의무교육 실시, ⑩ 진보적 세금제 실시, ⑪ 민족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 ⑫ 평화애호국가와의 친선 강화 등을 채택하였다.

이렇게 대중정당으로 재출발한 남로당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수립을 투쟁 목표로 설정하고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2차에 걸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쌍방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한반도문제가 미국 측에 의해서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서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그리하여 국제연합에서는 실질적으로는 단독정부 수립안이 채택되었고,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 실시가 확정되었다.

이처럼 단독선거가 명백해지자 남로당은 앞으로 있을 선거를 못하도록 하기 위한 투쟁으로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2·7구국투쟁’이라는 폭동사건을 일으켰다.

주로 파업과 파괴, 경찰관서 습격, 우익에 대한 테러, 그리고 단독선거 반대를 위한 선전과 선동으로 일관된 2·7투쟁은 남로당과 민전(民戰)이 주동이 되었는데, 이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2·7투쟁에서 남로당이 주장한 구호는, ①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UN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②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③ 양군 동시철수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인민에게 맡겨야 한다.

④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겨야 한다. 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등 9개 항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은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을 계기로 절정에 달하였고, 동 협상회의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구성하고 5·10선거를 파탄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2·7투쟁과 5·10선거 반대투쟁은 그들의 전술상으로 볼 때는 폭력과 비폭력의 배합투쟁이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서울에서는 행동대를 조직하고 지방당에서는 무장부대로서 야산대(野山隊)까지 만들게 되었다.

이 야산대는 당의 무장부대이기 때문에 당 조직체계에 준해서 조직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남로당은 인민공화국(약칭, 인공) 창건이라는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비폭력적 정치활동이 주가 되었으며, 무장부대인 야산대는 당활동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4·3폭동을 계기로 제주도에서는 폭력일변도로 전환하게 되었고, 뒤이어 10월의 여순반란사건은 남로당조직에게 완전히 비합법투쟁으로 돌입케 하였으며, 지리산에 입산한 폭동군은 야산대와 합류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장투쟁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남한지역에는 몇 개의 유격전구(遊擊戰區)가 형성되었다.

즉, 호남유격전구·지리산유격전구·태백산유격전구·영남유격전구·제주도유격전구 등이 그것이다. 무장투쟁은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족주의전선의 결성을 계기로 보다 극렬화되었다.

7월부터는 인민유격대를 각 지구별로 3개 병단으로 편성하여, 오대산지구를 1병단, 지리산지구를 2병단, 태백산지구를 3병단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북한에 있는 박헌영일파가 직접 관장하였다.

한편, 남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유격투쟁에 대한 북으로부터의 지원은 1948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화된 것은 1949년의 소위 9월공세 때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남한의 군경병력이 호남지구에 집중되었다.

모든 관심이 이에 쏠리게 된 틈을 타서 북에서는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 출신 유격대를 오대산지구로 침투시키는 한편, 유격대 양성에만 주력해오다가, 조국전선의 결성과 함께 선언문이 발표된 뒤 9월 공세에 대비하여 수백 명씩을 집단적으로 남파시켰다.

군경토벌대는 유격대와 주민과의 연계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산간지대 농가를 이주시켰다.

이주 호수는 남원 859호, 무주 501호, 장수 534호, 광양 1,694호, 구례 2,570호, 곡성 3,478호, 하동 1,240호, 함양 3,772호, 산청 2,363호, 거창 477호 등이다. 이러한 숫자는 당시의 남로당 무장투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949년 말을 거쳐 1950년 초에 이르는 동기토벌작전으로 인하여 유격대의 세력은 거의 전멸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1950년 3월 남로당을 총지휘하여온 김삼룡과 이주하(李舟河)가 체포되면서 남로당조직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5(김준엽·김창순 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67∼1976)
『조선노동당의 형성과 발전』(방인후,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Ⅰ·Ⅱ-(김준엽·김창순 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0)
『남로당연구』(김남식, 돌베개, 1985)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서대숙, 화다출판사, 1985)
『항전별곡』(이정식·한홍구 편, 거름, 1986)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3(스칼라피노·이정식 편, 일월서각, 1986)
집필자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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