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3년(성종 2) 중앙관제를 정비한 성종은 민간경제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여섯 군데에 주점을 설치하고 성례(成禮)·낙빈(樂賓)·연령(延齡)·영액(靈液)·옥장(玉漿)·희빈(喜賓)의 상호를 붙였다.
이들은 사설로 세워진 주점이 아니라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개설한 것이므로, 이들을 공설주점 혹은 관설주점(官設酒店)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주류는 예로부터 대중적 기호품이었으므로, 주류의 판매는 일반상품의 교환진흥의 매개적 구실도 하였다.
따라서, 성종은 고객을 끌기 위한 상술로서 다분히 호기심을 끄는 주점의 명칭을 사용하여 당시의 상업발달을 위한 조성기관적(助成機關的) 구실을 하게 하였다.
이처럼 상업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국가의 계획적인 정책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숙종 때도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특히, 이미 화폐제도를 시행하였으나 백성의 빈곤과 의식부족으로 통용되지 않자, 1104년(숙종 9) 주·현에 미곡을 내어서 주식점(酒食店)을 열어 백성들에게 매매를 허가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돈의 이용을 알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화폐경제 사정의 불균형을 고려하여 취해진 숙종의 특이한 상업적 시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화폐유통의 미발달단계에 있어서는 각 주·현의 교통요충지나 상인 및 상품의 집산지에 주점을 개설하여 관에서 선정한 사람이 경영하게 함으로써 상업자본의 융성을 꾀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 주점에서 관진(關津 : 관문과 나루)의 상세(商稅)도 징수하였을 것으로 보고, 이들 주·현의 주점을 상세징수기관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