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에 관한 교육에서는 과학을 두 가지 입장에서 보고 그 중요성을 논의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을 자연계와 관련된 ‘체계화된 지식’으로 보는 종래의 과학교육으로서, 이는 체계화된 지식을 학습자에게 전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지식의 전수만으로는 ‘폭발’하는 지식의 양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과학은 물질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으로서의 과학교육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오늘날의 혁신적 과학교육에서는 후자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학습자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탐구를 통하여 얻어지는 능력과 태도 및 과학적 지식을 학습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국가의 번영은 물론, 나아가서는 국가의 안전보장과도 직결된다는 인식하에 학교의 과학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국가적인 노력을 경주해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를 ‘과학교육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혁신적인 과학교육과정의 개발과 과학교사의 재교육을 위하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다.
수준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정책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건국 이후 계속하여 학교의 과학교육을 진흥시킨다는 교육부의 방침하에 진흥방안을 계획하고 추진해왔다.
근래에 이르러 과학교육은 근원적으로 아동의 인간 발달과 일상생활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과 그를 바탕으로 우수한 학생들의 잠재적 과학기술 인력으로의 진출을 도모해야 함을 목적으로 광의의 탐구활동을 통한 수준별 접근을 문화적 상황에서 추구하려고 한다.
(1) 신교육 이전의 우리 과학기술과 교육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사를 고찰해보면 고대로부터 훌륭한 과학과 기술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554년(위덕왕 1) 일본에 천문관측의 기술과 역서(曆書)를 보냈으며, 신라는 647년(진덕여왕 1) 동양 최대의 천문대였던 첨성대를 건립하여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발전시켰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쇄술도 우리 나라에서 창안된 기술이 일본·중국 등은 물론 간접적으로는 서구의 인쇄기술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서양의 구텐베르그 전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주조하여 ≪상정예문 詳定禮文≫을 인쇄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상 그 시대에 과학과 기술이 어느 나라보다 뛰어났던 것은 15세기의 조선 전기 세종대왕 때일 것이다. 당시의 여러 학자들은 천문·기상·지리·의학·음악·문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시키며,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조선 왕조를 굳건히 세우기 위한 필요 때문이었다.
서운관에서는 ≪칠정산≫과 천문 기구를 이용하여 계속적인 천문 관측 활동이 이루어져, 실제 기록을 정리한 자료들 중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을 제정하였는데, 훈민정음은 소리가 나는 기관인 입술·혀·이와 목구멍의 구조와 소리가 날 때의 모양을 이용한 과학적인 글자이다.
또한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들어 혜정교(지금의 종로 1가 주변)와 종묘 남쪽거리에 설치하였다. 또한 현주일구(懸珠一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의 해시계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옥루(玉漏) 등 여러 가지의 시계가 발명되었다.
이 밖에도 도량형의 정리, 측우기, 수표 등의 발명이 이루어졌으며, 기상관측기록들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과학적 자료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1438년(세종 20) 혼천의(渾天儀) 등의 천문관측기계를 설치하고 그 관측을 바탕으로 정확한 역서를 만들었다.
한편 1433년 우리 약재를 사용한 의학처방들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간행하여 한의학의 학문적 체계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에서의 이러한 훌륭한 업적들은 구전(口傳)으로 계승되는 경우가 많아 당대에 그치고 만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꾸준히 맥이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실용과학이라 할 수 있는 천문·의학·산학 등을 관장하는 기술관리의 양성기관은 고대부터 있었다. 신라의 국학(國學)에서는 유학과와 기술과를 두어 유학과에서는 주로 경전을 가르쳤으며, 기술과에서는 산학·의학·천문학을 가르쳤다. 고려 때 국자감(國子監)에 산학과를 두었으며, 별도로 태의감(太醫監)과 사천대(司天臺)를 설치하여 각각 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다.
태의감에는 의학박사(醫學博士), 사천대에는 복학박사(卜學博士)를 두어서 필요한 기술직 관리의 양성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서는 산학을,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을, 전의감(典醫監)에서는 의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유교의 경전 등을 중심으로 한 인문교육 위주였기 때문에 이러한 중앙의 기술직 관리양성교육 외에는 체계적인 과학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대중화되지도 못하였다.
(2) 광복 이전의 과학교육
개화기의 문호개방으로 서구의 문물과 함께 과학문명이 도입됨에 따라 새로 설립된 각종 학교에서 과학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883년(고종20)에 관민 합동으로 설립된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에서는 격치학(格致學:격물치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인 지식을 명확히 함)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교과의 지도내용에는 천문·지지·지리·성학(聲學)·전기·화법(畫法)·산법·대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에서는 천문학과 생리학을 가르쳤고, 1890년경에는 단계가 높은 천문·물리·화학·생물 등이 교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이화학당에서는 산술·과학·물리·화학·박물 등이,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는 교과로 ‘격치만물(格致萬物)’이 있었는데, 이것이 자연과학 교과가 되며 그 내용은 의학(醫學)·농학(農學)·기기학(機器學) 등의 서양 기술을 포함하였고,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생물학(生物學) 등의 서양 과학 분야를 가르쳤다.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하여 제도상으로 신학제에 따른 교육이 실시되었다. 외교와 학사 업무를 관장하던 예조(禮曹)를 폐지하고, 교육문제를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학무아문(學務衙門, 1895년부터 學部로 개칭함)이 설치되었으며, 학교에 관한 각종 법규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설치된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본과와 중학교 심상과 및 고등과에서는 과학교과로 물리·화학·박물을 가르쳤으며, 외국어학교·소학교·한성사범학교 속성과에서는 과학교과로 이과(理科)를 가르쳤다.
그 뒤 1906년과 1909년에 학제를 개정하였는데 1906년 학부령으로 반포된 <사범학교령시행규칙>에 따르면, “물리와 화학은 실험에 기초하여 정확한 지식을 취득하게 하고,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지식을 배양하여 일상생활과 생업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고 하였으며, “박물은 식물 및 표본 등에 취하여 확실한 지식을 갖게 하고 동식물의 상호관계와 생활을 상세히 관찰하여 일상생활과 생업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고 하였다.
이들 사범학교에는 과학실을 갖추고 표본 및 실험기구 등을 구비하였으나 일반학교에서는 이러한 시설확보는 물론 과학교과를 지도할 교사들이 부족하였다. 이는 당시 관보(官報)에서 과학교사를 모집하기 위하여 ‘근대적 과학교육을 받은 인재’를 모집한다는 광고까지 게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의 과학과목은 주로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하여 가르쳐진 것으로 파악된다. 1910년 이전까지에 사용된 과학교과와 관련된 교과서로는 ≪신찬소물리학≫·≪간명물리교과서≫·≪이과교과서≫·≪근세소화학≫·≪화학교과서≫·≪광물계교과서≫·≪광물학≫ 등이 있다.
1910년 국권상실 후 민족항일기 초기에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교육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의 순수한 학문적 발달을 외면하여 기초과학 분야의 교육을 소홀히 하고 저급한 직업인으로 만들기 위한 실업교육만을 강조하였다. 즉, 종전의 박물·물리·화학을 통합한 이과는 지역의 형편에 따라서 뺄 수 있는 수의과목으로 하고, 실업과는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이과의 실제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원리나 응용법칙 등을 이해시키는 과학적 사고력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계·기구의 부속품 명칭이나 구조 및 사용법을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그 뒤 1919년 소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고등보통학교시행규칙>을 개정하여 이과를 다시 물리·화학·박물로 나누고, 1920년 보통학교에서 수의과목이었던 이과를 상급반에서는 필수로 과하게 되었다.
이로써 학교교육에서 과학교육의 비중이 약간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때 각급 학교에서 필수로 가르쳐왔던 실업과는 수의과목으로 되었다. 또한 과학과의 목표와 내용에서는 ‘실험’, ‘법칙의 이해’ 등의 용어가 첨가되어 어느 정도 자연과학의 학문적 성격에 접근하여 갔다. 1938년에는 학교 명칭이 심상소학교로 바뀌면서 초등이과 과목이 있었다.
이과는 천연물 및 현상의 관찰을 정밀히 하여 그들 상호간 및 인류와의 관계를 이해시키고, 아울러 천연물을 애호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함을 요지로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교육의 지도내용은 과일·가축·의복·그네·난로·얼음지치기·도로·인체의 구조·세균과 기생충·빛·태양·돋보기·전등 등을 포함하였다. 1941년 심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칭되면서 이과는 이수과(理數科)로 통합되어 일본과 비슷하게 교육하게 되었다.
(3) 광복 후의 과학교육
1945년 광복 후 교육과정이 제정된 1955년까지의 10여년 동안은 교수 요목기로 불리운다. 해방 후 군정청 학무국은 교육 심의회의 건의에 따라 1946년 3월에 홍익인간의 이념을 내세우고 과학교과 교수 요목을 제시하였는데, 종전의 과학교과 편제를 그대로 사용하여 국민학교 4∼6학년에서는 이과를, 초급중학교에서는 물상과 생물을, 고급중학교에서는 물리·화학·생물을 과하였다. 실제는 이에 따라 극히 소수의 학생만이 과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농업학교에서는 1∼4학년에서 과학을, 공업학교에서는 1∼5학년에서 물리와 3∼5학년에서 생물을, 상업학교에서는 1·2학년에서 이과를 과하였다. 정부수립 후 1949년부터는 국민학교 4∼6학년과 중학교·사범학교의 모든 학년 및 고등학교 1·2학년에서 과학을 가르쳤으며, 고등학교 3학년에서는 물리·화학·생물을 선택하게 하였다.
1949년 <교육법>이 제정되어 각급 학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과 과학적 사고력을 배양하여 합리적인 생활을 하도록 할 것을 목표로 과학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1948년에는 문교부에 과학교육국 과학진흥과가 설치되었으며, 1949년부터 과학전람회를 개최하였으나, 6·25전쟁 이후 1954년까지 중지되었다가 다시 계속하게 되었다.
1955년에 제정된 교과과정은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 사조의 영향을 받아 일상생활 중심의 초·중고 과학 교육과정을 구성하였으나 지도방법은 설명 주입식이었다. 이때 <교육과정시간배당기준령>이 제정되어 이에 따라 과학과 교육과정 제정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교육과정심의회의 심의를 거쳐서 1955년 최초로 과학과 교육과정이 공포되었다.
이의 공포로 종전과 달라진 점은 국민학교에서 교과명이 ‘자연’으로 되어 1953년부터 전학년을 대상으로 과학교육을 실시한 것과 중학교에서 물상·생물을 묶어 과학으로 한 것, 고등학교에서 물리·화학·생물의 교과 중 2개를 택하게 한 것 등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당시 미국에서 대두된 진보주의 교육사조에서 나온 생활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서, 학습자의 흥미와 욕구를 중시하며,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지식과 능력·태도 등을 습득하게 함으로써 합리적인 생활을 하도록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한편 1955년부터 다시 시작하여 1968년까지 계속된 과학 전람회는 1968년 과학기술처가 발족되면서 이관되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편 1961년에는 문교부의 학무국에 과학기술과를 두었다.
1956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과학교육 혁신운동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Sputnik) 발사에 의해 자극을 받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일급 과학자들에 의하여 고등학교 PSSC 물리, CHEM 화학, BSCS 생물, ESCP 지구과학, 중학교의 IPS 물상, 초등의 AAAS, ESS, SCIS 과학 과정 개발과 교사교육 등이 대규모로 시행되었다.
1963년에 경북대에 체제하던 미국인 교수가 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였다. 1964년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내한한 미국인 교수 샌더만(Sanderman) 및 교사 쉬바이하트(Schweihart)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한국 과학교육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1961년 문교부 학무국에 과학기술과를 두었고, 1963년에 개편된 교육과정에서는 첫째, 기초학력의 충실, 둘째 계열의 합리화와 일관성, 셋째 관련성 있는 교과의 통합적 지도, 넷째 교과활동·반공활동·특별활동의 구조화 등을 취지로 삼았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학문주의 교육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당시 고등학교 물리 II의 ‘지도상의 유의점’을 보면, 지식의 구조와 실험을 통한 실증적 학습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 때 ‘지학’을 처음으로 고등학교 교과목으로 설정하였으며, 고등학교에서 선택제로 된 종전의 교과를 4과목 모두 필수로 과하여 대학입시를 의식하고 득점하기 쉬운 교과만을 선택하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응용과학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65년에 구성한 물리교육연구위원회(회장 정연태)를 시작으로 화학교육, 생물교육, 지구과학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여러 교수들이 공동 연구, 세미나, 교사강습, 미국 시찰 및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PSSC 교과서와 실험안내서 등이 국내에 번역되고 중앙고등학교, 이대부고 등에서 PSSC 현장연구도 실시되었다.
아세아 재단의 후원도 있었으며 1968년부터 10여 년간은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사업이 진행되었고 경북 월성지구 60개 교의 ESS 연구가 하나의 시범사례였다.
문교부는 1967년 과학교육국에 과학교육과·기술교육과 등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실무자들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학생을 위한 기술교육과 기능공 양성 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였다. 특히 당시 정부의 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기술 또는 기능에는 관심이 있었으나 기초 과학교육에는 거의 소극적인 태도였다. 1968년에 과학교육진흥법을 제정하였으나 거의 활동이 없어 사장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문교부는 1969년 과학교육심의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과학교육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른 과학교육에서는 종래의 기본철학과 방법이 크게 달라져 탐구학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학생을 ‘작은 과학자’로 보고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도하는 내용에서는 과학의 기본개념들을 구조화하는 것과 학습의 준비성에 관한 브루너(Bruner,J.)의 가설을 받아들인 것이 특징이다. 즉, 발달정도에 알맞게 교과를 조직하여 제시하면 고급 개념이라도 어느 발달단계에서나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교과는 종래의 생활중심 내용에서 교과서에 직접 해답이 제시되지 않고 문제만 제기하여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하는 탐구학습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교육과정 개편과 함께 1973년 3월 전주에서 ‘전국민의 과학화운동’을 위한 전국교육자대회를 개최하여 우리 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외침도 있었다. 이후 사범대와 교육대는 과학교육연구소를 설치하였고, 1970년도에 이미 설치된 경북 학생 과학관에 이어 각 시도에서도 교육위원회 주관으로 학생 과학관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는 24학급 이상의 학교에 실험 보조원을 1명씩 배치하는 등 개선노력들이 있어 얼마간 과학교육이 이루어졌으나 1천만 명의 학생을 위한 과학교육의 개선은 그다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1983년에 경기과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 하나씩(서울은 2교) 과학고등학교를 세웠으며 과학기술대학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하급학교 교육에 영재(과학) 교육붐을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영재(과학)교육 학원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중학생의 우수한 학생들 중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도 시·도 과학교육원을 중심으로 특별과정이 수행되었다. 근래에 이르러 과학기술부는 5개 대학에 과학영재교육센터를 세우게 하고 계속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 과학교육과정으로 전환을 하였지만 교육현장에서는 새로운 과학교육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원인으로 ① 60∼70명의 다인수 학급, ② 지능·흥미·학력 등에서 심한 학급 내의 이질성, ③ 과학과목의 비중이 작고 탐구학습과 동떨어진 각종 시험제도, ④ 교구의 부족 및 교사의 과중한 부담 등을 들 수 있다.
1981년 제4차 교육과정 개편을 실시하였는데, 인간 소외의 폐단을 극소화하고 인간중심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실시되었다. 그러나 학문중심 교육과정의 기본철학과 입장은 그대로 고수하였다. 단지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 정의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76년에는 한국과학교육학회가 창설되어 1978년부터 학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고, 1978년부터 미국에서 과학교육학 박사학위 이수자가 귀국하기 시작함으로써 연구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한국물리학회의 물리교육분과, 대한화학회의 화학교육분과, 생물과학협회의 생물교육학회, 지구과학회, 초등과학교육학회 등의 연구모임과 학술지 발간, 그리고 ≪과학교육≫·≪과학신문≫·≪과학동아≫·≪소년과학지≫ 등의 발간은 과학교육의 활성화에 크게 공헌해 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교육대학원에 과학교육 석사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과학교육학 분야의 연구와 논문은 미흡하였다. 1982년 서울대학교 일반대학원에 과학교육 석사과정이 설치되고 1984년에는 박사과정이 시작되었는데, 그 뒤 한국교원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 과학교육 박사과정이 설치됨으로써 현재까지 수십 명을 배출하였다.
1987년 개정된 제5차 교육과정의 기본정신은 제4차 교육과정과 비슷하다. 새롭게 강조된 내용이라면 과학론(과학철학이나 과학사)에 대한 이해와 과학·기술·사회(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에 대한 이해이다. 고등학교에서는 생물과 지구과학 내용을 과학 I로, 물리와 화학 내용을 과학 II로 교과목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제5차 교육과정은 학습자의 생활이나 경험과 유리되었고 학습자의 진로와 관계없이 학문중심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과정으로서의 과학적 성격이 경시되고 산물로서의 지식과 지식 체계가 강조되었다는 것 등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1992년 제6차 교육과정이 개정되었다. 6차 교육과정에서는 시도 교육청 및 학교에서 교육과정의 편성에 약간의 자율성을 제공하였다. 고등학교 과학과에서는 공통필수과목으로 ‘공통과학’이 새롭게 도입되었으며 통합과학의 정신을 내세우고 탐구과정을 개념과 동등한 관계에서 구별하여 제시하였다.
1993년에 정부가 선포한 “과학교육의 해”의 활동, 특히 학생과학탐구 올림픽대회는 초·중학교 학생들의 학교 내외의 과학활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자연보호 탐사대회, 탐구실험대회, 과학공통탐구 토론대회, 과학공연 등은 학교 과학교육을 재검토하게 하였으며, 교실 밖 과학활동의 가능성을 보였다. 근래에는 유치원까지 포함하여 지역별, 학교별 과학잔치활동이 증가하고 있다.
한편 입시제도와 관련하여 1994년부터 대학수학 능력시험에 과학적 탐구 사고력 문제를 출제하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과학교육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향후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교육과정과 입학시험제도가 바뀌어지고 교육 여건이 점진적으로 호전되면 학교 과학교육의 면모도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21세기를 지향한 제7차 교육과정은 교육과정 편성에 있어서 자율성을 확대하고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7차 교육과정에 새롭게 도입된 개념 중의 하나는 ‘국민기본 공통교육과정’과 ‘수준별 접근’이다.
국민기본 공통교육과정의 과학은 3학년부터 10학년까지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며, 국민의 기본적인 과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하여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능력과 과학의 기본 개념을 습득하고, 과학적인 태도를 기르기 위한 과목이다.
과학의 내용은 에너지, 물질, 생명, 지구 등의 지식과 탐구 과정으로 구성하였다. 과학 지식의 각 분야는 다시 여러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전 학년에 걸쳐서 연계성이 있도록 하며, 과학의 기본 개념을 탐구활동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학습하도록 구성한다고 하였다.
수준별 교육과정에서 과학은 3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기본과정으로 구성하고, 6학년부터 10학년까지는 기본과정과 기본과정에 근거한 심화·보충 과정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심화·보충 과정의 학습은 학생의 능력과 요구에 따라 다양한 선택 활동 중심으로 실시하며, 학생 개개인의 자기 주도적인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고, 과학적인 소질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1988년에는 서울대에서 아·태지역 물리교육 워크숍이 영어로 개최되었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외국인 전문가의 방문기회가 있었다. 1995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과학교육 관계 영어강좌를 개설하였다.
198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과학교육 박사학위 이수자들이 가끔 미국의 NARST(National Association Research in Science Teaching), 영국의 ASE(Association of Science Education), 호주의 ASERA(Australia Science Education Research Association) 등에 참가하고 발표도 하였다.
1995년 ASERA에는 박사과정생을 포함한 한국인 전문가 7명이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99년에는 중국에서 개최한 국제물리교육학회에 한국인이 25명 참가하여, 10여 편의 연구발표와 “계림과학탐방” 워크숍까지 주재하는 등 국제적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미국이나 영국인 지도 교수하에 일부 과학교육 박사학위자들이 JRST(Journal of Research in Science Teaching)나 IJSE(International Journal of Science Education)에 논문을 게재하기 시작하였으나 한국인 교수 지도하에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JRST 등 국제적 학술지에 게재한 것은 1996년이 최초였다. 현재 국내 과학교육 연구는 토착화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실제 학교 교육에 공헌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교육은 세 가지 차원의 조화로운 발전이 요청된다. 첫째는 과학교육의 핵심인 아동의 과학 학습에 있어서 지적·정서적·신체적·사회적 면의 조화로운 과학 소양의 성장이고, 둘째는 이것을 위한 과학 학습지도에 있어서 과학성·아동성·사회성·교육성의 조화로운 통합적 접근이며, 셋째는 과학 학습지도 지원과 관련하여 연구·개발, 교사양성, 행·재정 및 현장 실시의 효율적인 연계체제이다.
우리 나라 초·중등 학교의 과학교육은 국가교육과정 속에 한 과목으로 자리잡고 관계되는 각 분야와 담당자들이 상당한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교육 인구의 증가, 전근대적 행정, 과열스러운 입시제도, 연구개발과 교사교육의 괴리, 현장교사의 사기저하 등으로 21세기에 기대하는 기초 과학교육의 역할을 바람직하게 준비해 왔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연구개발과 고급인력 양성의 틀이 잡혀감으로 더욱 활발한 국제적 활동이 한국문화 바탕의 참다운 토착화로 이어지면서 학교 현장과 더불어 움직이게 되면 놀라운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행·재정과 국민은 우리 전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필수적인 과학교육을 과거와 같은 권위적인 지시나 방관에서 벗어나 성심을 다하여 지혜롭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영역간의 갈등과 시행착오는 얼마간 있을 것이지만 과학시대에 불가피한 과학교육의 혁신적 발전은 이 시대가 요청하는 과업으로 우리의 생존력과 교육열로써 기필코 달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