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의 연구 ()

중국 길림 광개토왕릉비 탁본(탑본) 작업
중국 길림 광개토왕릉비 탁본(탑본) 작업
근대사
문헌
1972년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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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72년 이진희가 광개토왕릉비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서지적 사항

1972년 동경의 요시카와고분관(吉川弘文館)에서 간행되었다. 본문·자료편·별책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일문(日文)으로 세로쓰기의 장·절의 끝에 주를 달고, 마지막에 연구사연표를 붙였다.

자료편에는 15종의 연구문헌과 각종의 능비 사진 및 미즈타니탁본(水谷拓本)을 영인·수록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사카와 쌍구가묵본(酒匂雙鉤加墨本) 등 4종의 탁본과 요코이(橫井忠直)의 석문(釋文)을 비롯한 12종의 석문을 별책부록에 넣었다.

편간/발간 경위

19세기 말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자, 비의 웅장한 규모와 비문 서체의 예술성 및 무한한 사료적 가치로 인해 한·중·일 3국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능비는 고구려사 연구에 활용되기보다는 왜(倭)의 한반도 진출과 그 성격에 대한 논쟁에 치중되어 왔다.

이는 능비의 초기 연구가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학이 주도하고, 이 때문에 능비가 그들이 설정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허구를 토대로 한 고대 일본의 한반도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변조,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정인보(鄭寅普)를 비롯한 한국 학계의 반론이 삼한·삼국의 열도분국설(列島分國說)로 발전하자, 능비를 둘러싼 한·일학계의 논쟁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그러나 연구의 기본 자료인 비문 자체의 불명확성 때문에 이러한 논쟁은 일정한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진희는 능비의 초기 탁본을 비롯한 50여 종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사료 비판의 견지에서 재검토하여 정밀하게 편년, 고증함으로써 일본의 구설을 비판하고 비문 일부가 참모본부에 의해 고의적으로 변조되었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논문을 통해 발표하였다.

이러한 비문변조설은, 비문 연구가 단순한 역사해석의 단계에서 벗어나 일본 근대사학의 한국사 연구 체질비판으로 연결되어, 고대 한일관계사의 근본적인 재검토라는 단계로 전환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기존에 발표하였던 논문을 토대로 이러한 비문변조설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다.

내용

본문은 제1장 광개토왕릉비의 역사, 제2장 광개토왕의 시대와 비의 현상, 제3장 비의 발견과 쌍구본·탁본의 작성, 제4장 사카와 쌍구가묵본과 그 해독작업, 제5장 참모본부에 의한 이른바 석회도부작전, 제6장 광개토왕릉비문의 문제점 및 연구사연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주안점을 둔 내용은 대체로 ① 능비의 연구사적 검토와 비판, ② 일본 참모본부의 석회도부(石灰塗付)에 의한 비문 변조 과정, ③ 변조된 비문의 연구상의 문제점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본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을 능비의 연구사적 검토에 할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한·중·일 3국 학계의 능비연구사를 조감하면서, 주로 일본 학계의 능비연구의 과정과 그 연구 체질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확립기의 일본 근대사학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봉사하였음을 비판하고, 능비도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석회부도의 흔적이 역력한 각종의 탁본자료를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능비의 발견 과정과 초기의 탁본 과정을 정밀히 추적, 쌍구가묵본을 일본에 반입한 중위 사카와의 정체와 참모본부 편찬과의 쌍구본 해독작업 과정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카와가 변조, 오구(誤鉤)한 비문을 은폐, 보강할 목적으로 석회부도를 감행하여 비문을 전면적으로 변조한 참모본부의 음모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끝으로 한일관계사의 쟁점인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를 비롯한 7군데의 변조된 비문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그 연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일본 학계에서 통용되어 왔던 탁본이나 석문이 사카와 및 참모본부에 의해 변조, 오독된 것에 근거한 믿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후의 능비연구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진희의 연구도 현지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과 비문변조설이 구체적인 비문의 내용 연구와 연결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린 왕건군(王健群)의 연구가 나온 이후 이진희가 제시한 비문변조설이 모두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변조 사실을 처음으로 밝힘으로써 한일학계의 최대 쟁점이 능비연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그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해협』(이진희, 삼인, 2003)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탐구(探究)(이진희 저, 이기동 역, 일조각, 1982)
「書評-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 56, 1972)
「書評-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김정배, 『아세아연구(亞細亞硏究)』 50, 1972)
『好太王碑硏究』(王健群, 吉林人民出版社, 1984)
「好太王碑文 ‘改削’說の批判-李進熙氏の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について」(古田武彦, 『史學雜誌』 82-8,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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