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삼국시대의 서울∼부산간 교통로도 이 지역을 지나고 있어, 광나루는 고대부터 교통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광진교·천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楊州牧)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단위의 개혁에 의하여 한성부 양주군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였다가, 1949년 면 전체가 서울로 편입됨에 따라 성동구에, 1995년에는 분구에 따라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