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안양천을 경계로 서울특별시, 서쪽은 시흥시, 남쪽은 안양시, 북쪽은 서울특별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49'∼126°54', 북위 37°23'∼37°29'에 위치한다. 면적은 38.50㎢이고, 인구는 34만 497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8개 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다.
인근지역인 시흥시 군자동과 정왕동 등지에서 민무늬토기의 후기 양식에 속하는 흑도질(黑陶質)의 토기조각과 빗살무늬 토기조각이 출토되었으므로, 이 지역에도 이미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또 소하동과 가학동 · 철산동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삼한시대에 이 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다고 하나, 그 중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에는 본래 백제 땅이었으나, 고구려장수왕이 남정(南征)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면서 잉벌노현(仍伐奴縣 : 지금의 시흥시와 광명시 · 안양시)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곡양현(穀壤縣)이라 개칭함과 동시에, 율진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곡양현을 금주현(衿州縣, 또는 黔州縣)이라 했으며, 성종대에는 별호로서 시흥(始興)이라 불렀다. 995년(성종 14)에 10도제 실시에 따라 기내도에 예속되었으며, 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그 뒤 5도양계제(五道兩界制) 실시로 1009년에 양광도에, 1018년(현종 9)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 富平)에, 1069년(문종 23)에는 경기에 예속시켰고, 1172년(명종 2)에 이르러 처음으로 감무를 두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좌 · 우도 분정에 따라 경기좌도에 예속되었다.
금주현은 1402년(태종 2)에 경기도에 예속되었으며, 1413년 8도제제도를 개혁하면서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되었다. 1414년에는 과천현을 병합해 금과현(衿果縣)이라 개칭했으나, 몇 달 뒤 다시 양천현(陽川縣)과 합쳐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 그러나 다시 1년만인 1416년에 금천현으로 명칭을 환원하고 현감을 두었다. 1456년(세조 2)에 과천현에 병합되었으나 얼마 뒤 복구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시흥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지방제도 개정으로 시흥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안산 · 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면서, 시흥군 서면에서 4개 리, 군내면에서 1개 리, 남면에서 3개 리를 합해 서면이 신설되었다. 그 뒤 별다른 변동 없이 30여년 동안을 내려왔다. 1912년경의 호수는 총 832호에 인구는 3,842명이었다.
근대 인물로는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병사 4명을 살해하는 등 소위 한일반란반요사건(韓日叛亂反擾事件)이라 하여, 협제관리죄(脅制官吏罪)로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풀려난 성우경(成祐慶)이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인 장원겸(張元謙)과 3 · 1운동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복역한 최호천(崔浩天) · 윤의병(尹宜炳) · 이종원(李宗遠) · 김인한(金仁漢) · 최정성(崔正成) · 유지호(柳志浩) · 최주환(崔周煥) 등이 있다.
1950년대 이후 서울특별시와 인접해 있는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 일대는 서울에서 급격히 유입되어온 인구의 증가로 도시화 현상이 두드러져, 1963년에는 이곳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하는 등 광명시의 전초가 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 6월 10일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에는 광명리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 일부를 교환하여 경계변경이 이루어졌다.
1974년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76년에는 행정동체제인 7개 분소를 두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에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에는 소하읍과 광명출장소를 합해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83년 2월 15일시흥군 소래읍 옥길리 일부가 편입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에는 소하동 일부가 안양시로 편입되었다. 1992년 1월 13일하안동 일부가 철산동으로, 철산동 일부가 하안동으로, 소하동 일부가 하안동으로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95년 3월 1일에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및 금천구와의 경계조정이 있었다.
경기도 중에서도 서울특별시와는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그 사이에 하천이 있으나 경계가 불분명할 만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급격한 시가지의 발전으로 앞으로도 그러한 추세가 계속될 것이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가학동지석묘와 철산동지석묘가 있다. 가학동지석묘는 198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노온사동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비 민회빈(愍懷嬪)의 묘인 영회원(사적, 1991년 지정)이 있으며, 노온사동의 정원용묘, 일직동의 이순신묘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소하동에 충현서원지(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가 있는데, 충현서원은 정조 때 설립되고 그 뒤에 개축되었으나, 현재는 민가형식의 오리이원익종택 및 관감당(경기도 문화재자료, 1996년 지정)만 남아 있다.
그리고 소하동의 충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원익 초상(보물, 2005년 지정)과 이원익 선생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 이원익선생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가 있다.
소하동에는 오리 이원익 영우(경기도 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가 있다. 이 영우는 17세기 경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며, 정면 1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무형유산으로는 명창 이춘목의 서도소리(중요무형문화재, 1969년 지정)와 광명농악(경기도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는 설치되지 않았고, 1658년(효종 9)에 충현서원이 설립되어 교육을 담당했다.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으나, 훼철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 처음 세워진 학교는 1927년에 설립된 서면초등학교로, 시흥군 서면에 있을 당시 1면 1교의 교육체제에 따라 세워진 학교이다.
8 · 15광복 후에 면에서 읍, 읍에서 시로 승격되는 발전추세에 따라, 각급 학교의 설립도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4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11개교가 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광명도당굿을 현대적으로 계승시킨 ‘광명도당놀이’를 들 수 있다. 광명도당놀이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마을굿을 놀이와 잘 결합시킨 형태로, 1986년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놀이이기도 하다.
광명도당놀이는 무당과 텃고사패, 마을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흥겨운 축제의 마당을 연출하는 것으로, 그 구성은 ① 입장, ② 도당(都堂)문안, ③ 텃고사패들이 풍물을 치며 지신을 밟고 축원을 하는 텃고사, ④ 삼헌관이 차례로 절을 하며 독축을 하는 도당제, ⑤ 농사짓는 과정을 놀이형태로 연출한 농사짓기, ⑥ 주민과 무녀가 혼연일체가 되어 춤을 추는 무감, ⑦ 텃고사패들이 주도하여 마을공터에서 풍물을 치며 노는 마을축제, ⑧ 퇴장의 순으로 짜여져 있다.
이런 광명도당놀이는 그 후 다소 변형되어 재현된 바 있다. 즉, 이 때는 제1과장 · 아랫당산 장승제, 제2과장 · 윗당산 도당굿, 제3과장 · 마을 대동굿, 제4과장 · 도당대동놀이 등 네 과장으로 짜여져 장승제가 새로 발굴되어 첨가되는 등, 좀 더 정교하게 짜여진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의 민속놀이로는 마을간에 어느 마을이 풍물을 더 잘 치는가를 경쟁하여 이긴 편에 술을 대접하는 두레싸움이 있었고, 줄다리기나 석전 · 불싸움 · 가마싸움 등이 마을간에 벌어졌다고 한다. 한편 이 지역 성인들의 개인놀이로 윷놀이 · 널뛰기 · 그네뛰기 · 씨름 · 낫치기 · 고누 · 골패 · 엿치기 등이 행해졌다.
아이들의 놀이로는 정월대보름에 연에다 자기 이름과 생년월일을 써서 노끈에 달고 그 노끈에 불을 붙여 하늘로 날려 액을 막고자 했던 놀이인 연액막이와 연날리기 · 풀쌈 · 글자맞추기 · 진뺏기 · 비석치기 · 사방치기 · 가마놀이 · 다리세기 · 땅뺏기 · 자치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원래 시흥군에 속해 있다가 1981년에 분리된 지역으로, 시흥지방이 본래 세습남무(世襲男巫)인 화랭이패의 왕성한 활동권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시 또한 한강 이남의 여타 지역과 동일하게 화랭이패가 중심이 되고 미지라는 여자 강신무가 굿을 돕는 형태의 도당굿이 행해졌던 곳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현재 이런 화랭이패의 존재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때문에 시 또한 무당이 참여하는 형태의 도당굿에서 강신무녀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아직까지도 산신제 또는 도당고사라고 명명되는 동제가 적지 않은 마을에서 존속되고 있거나 근래까지 지속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마을로는 두길 · 식골 · 해방촌 · 자경리 · 양지편 · 가리대 · 서러리 · 사들 · 원광메 · 노리실 · 쇠머리 · 밤일 · 영당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마을은 제관의 독축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식 동제의 모습을 취하는 곳이 많지만, 두길 · 식골 · 해방촌 · 쇠머리 · 영당말 등의 마을에서는 무녀가 참여하여 굿을 하는 마을굿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주목할만한 동제는 현 소하동에 해당되는 영당말 도당굿이다.
이곳의 도당굿은 여타 지역의 동제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그 역사도 오래 되었으며, 광명시와 그 지역민들이 이 도당굿을 발전시켜 ‘광명도당놀이’로 만들어 계승시키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당말 도당굿은 6 · 25 이전까지는 화랭이로 추정되는 짝귀라는 남무(男巫)에 의해 성대하게 치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 쇠퇴했고 1 · 4후퇴 때 이 마을에 정착한 김선화(金仙花)라는 강신무녀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도당놀이로 거듭나면서, 강신무녀들이 굿을 하고 풍물과 선소리를 하는 도당놀이패가 참여하는 형태의 전형적인 축제적 성격을 띤 마을굿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영당말 도당굿은 음력 6월과 9월 그믐날 저녁에 시작하여 자정을 넘긴 다음 날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제의 장소는 소하동구름산 줄기의 도당고개에 위치한 도당나무에서 했으나 산주의 지시에 의해 이 나무가 베어졌고 지금은 이 도당터마저도 구획정리가 되어 사라진 상태이다.
도당굿의 준비 과정은 먼저 대동회의를 열어 당주를 선정하고 경비 추렴 등을 의논하며, 이를 토대로 선당주와 앉은당주에 의해 경비나 조라술을 비롯한 제수음식 등 굿에 필요한 것들이 마련된다.
영당말 도당굿의 열두 거리는 ①부정(不淨), ②가뭉, ③상산(上山), ④불사(佛師), ⑤칠성(七星), ⑥성주, ⑦조상(祖上), ⑧창부(倡夫), ⑨대감(大監), ⑩)서낭, ⑪)군웅(軍雄), ⑫)뒷전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설화의 전승이 강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 곳 소하리에 거주했던 조선조 명신(名臣) 이원익의 사위 취재담(取才談)인 「이원익의 손녀사위 허목(許穆)」과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묻혔던 영회원(永懷園)의 유래를 이야기하는 「영회원의 슬픈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원익의 손녀사위 허목」은 이원익이 손녀사위를 구하려고 항상 젊은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다녔는데, 어느 날 퇴궐하던 중 길에서 초라한 선비를 보고는 하인을 시켜 집에 데려오게 했다. 그 총각은 촌의 가난한 선비였지만 뛰어난 인재여서 이원익이 손녀사위로 삼았지만, 그 부인은 문벌 좋은 도령들을 두고 형편없는 시골 선비에게로 혼처를 정했다고 원망이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허목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거의 말을 하지 않아 주변 어른들이 답답해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허목을 이원익은 항상 두둔했으며, 견문을 넓히도록 여행을 시켰다. 그는 두루 다니며 당대의 석학들과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맺고는 돌아왔고, 뒤에는 이원익의 기대대로 좌의정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회원의 슬픈 이야기」는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으로 인해 두 동생과 함께 청(淸)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풀려나게 되었는데, 청제(淸帝)가 이들 왕자들에게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했다. 소현세자는 청제가 아끼던 용연(龍硯)을 원해 얻게 되었고, 두 왕자는 함께 잡혀갔던 백성들과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해서 결국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귀국한 뒤 이 사실을 한 신하가 인조에게 일러바쳤고, 인조가 노해서 벼루에 목숨을 바쳐 사죄하라고 벼루를 집어던져 그것에 맞은 소현세자가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세자빈 강씨는 이런 비운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원망없이 인조에게 효를 다하여, 인조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간신의 모함에 빠져 결국 사약을 받아 죽게 되었고, 죽은 뒤에는 서민으로 낙적(落籍)되어 노은사동에 묻히게 되었다. 그 뒤 숙종 때 빈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세자빈으로 복위되었고, 그 능도 민회묘(愍懷墓)로 이름되었다가 영조 때 지금의 이름인 영회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시의 민요는 전승이 거의 단절된 형편이다. 과거에 채집된 자료를 중심으로 광명시 민요를 개관할 수밖에 없다. 광명시 민요는 노동요 · 의식요 · 유희요 등으로 전반적 개관을 할 수 있다. 삶의 근간이 되었던 전통사회의 농업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모심는 소리가 희미하게 흔적을 갖추고 있다.
의식요는 거의 전승이 중단된 형편이다. 유희요는 통속민요와 토착민요 모두 발견이 된다. 그래서 전승이 거의 단절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게 한다. 민요에서 부녀요가 특별하게 발견되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부녀요 가운데 시집살이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데, 「시앗요」와 「시집살이요」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민요들은 모두 여성들의 노동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전승되는 사설의 내용이 모두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앗요」의 한 대목을 보이면 이러한 사실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다 벼틀놓고 구름잡아 잉어걸고/짤각짤각 짜느라고 부고한장 들어온다/한손에 받아들고 두손으로 펼쳐보니/시앗죽은 편지로다 고년요년 잘죽었다/인두불로 지질년 고기반찬 갖춘밥도/맛이 없더니만 소곰밥도 달고달다.’
이 내용은 시앗의 죽었다는 편지 한 장에서 말미암는 특별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는 전국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광포유형이어서 이 지역만 특이하게 변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베짜기 작업이나 길쌈일을 하면서 여성들이 불렀을 가능성이 있는 소리이다.
전승되는 민요 가운데 통속민요에 「노랫가락」이 있다. 「노랫가락」은 통속민요이지만, 그 기원을 따지자면 이 소리는 본디 무가에서 불려지던 것에서 파생된 것이다. 서울굿에서 신을 즐겁게 놀리기 위해서 찬양하던 노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소리가 구한말 기생들이 음반에 취입하면서 전국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광포한 확장으로 말미암아 이 시에서도 채록된 것이다. 전승되는 민요는 빈약하지만, 대체로 그 윤곽만은 확인할 수 있어 중요하게 생각된다.
전 토지의 38.8%가 임야이며, 경지는 28.9%, 대지 16.4%, 도로용지 5.6%, 하천용지 2.8%이다. 경지 중 논이 140㏊, 밭이 444㏊이다.
그리고 안양천 지류를 막아 만든 도창골 소류지 · 일직저수지(日直) · 하안저수지(下安) · 노은사저수지가 있다. 이들 저수지는 일대의 논과 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어 이 지역의 농업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저수지는 농업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관개용수 공급지보다는 주민의 휴식처로 바뀌어 가고 있다. 농업활동은 도시화로 계속 감소하고 있으나 남부지역에서 고등소채와 과실류 등과 같은 근교농업이 발달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고구마 · 상추 · 배추 · 무 · 고추 · 오이 · 호박과 특용작물로 참깨 · 들깨, 과실류로 포도 · 사과 · 배 등이 생산되고 있다. 도시의 4분의 3이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있어 개발이 억제되고 있었으나 철산아파트단지의 조성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임산자원으로 밤 · 대추 · 은행이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0.6%인 1,817명인데 농가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또한, 농업양식이 벼중심 농업에서 채소류 · 과실류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노은사저수지나 도덕산 산지 주변에는 과수나 채소를 중심으로 한 관광농업이 발달하고 있다.
광공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2.7%인 8,328명이며 주요 제조업으로는 조립금속제조업 · 섬유의류업 · 종이인쇄업 · 비금속광물업 · 식료품업이 발달하고 있다. 상업은 광명동 · 철산동 · 소하동 등에 7개의 상설 시장과 여러 군데의 슈퍼마켓이 있으나 주민들은 서울의 대형백화점을 이용한다.
교통은 지방도 851호가 서쪽 변두리 지역을 거쳐 시 중심부를 지나고 지방도로 897호가 옥길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서울의 남부순환도로가 철산동 북부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경인국도가 동쪽에는 경부국도가 그리고 제2경인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고 서해안고속도로가 안산에서 일직인터체인지까지 진입하고 있다. 이들 도로와 시군도가 연결되어 서울 또는 인천 등 대도시와 지역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업체가 적어 대부분의 경제활동인구가 서울이나 인천 등으로 이동을 많이 하고 있으며, 도로는 서울이나 인천과의 소통은 잘 되었으나 지역 내 교통로는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철도는 경부고속선, 지하철7호선이 지나고 있다.
서울과 인접한 지역으로 서울에서 오는 인구의 급증으로 옛 서면의 광명리와 철산리 일대가 주거지역으로 확대되어 도시화 현상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따라서 주민의 대부분이 서울로 출퇴근하고 있는 일종의 침상위성도시로 발전하였다. 자연경관을 활용한 시민의 휴식공간을 가지고 있다.
도시 중심부에는 도고내고개가 있으며, 안양천의 지류를 막아 저수지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하여 관개용수로 공급하고 있다. 특히 낚시 관광객들에게 알려져 있는 일직저수지 · 하안삼리저수지 · 노온사저수지 등은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잘 이용되고 있다.
시흥시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관광 명승지로서는 거의 없는 편이다. 가학동에 지석묘가 있고, 조선시대의 유적으로 충현서원지, 이원익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는 영우와 묘소 및 신도비가 있어서 역사문화적 관광지가 되고 있다. 특히 충현서원지와 이원익영우 등이 있는 오리이원익종택은 최근 충현박물관으로 개관되어 광명시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