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남양주시, 서쪽과 남쪽은 서울특별시, 북쪽은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6'∼127°10', 북위 37°33'∼37°39'에 위치한다. 면적은 33.29㎢이고, 인구는 18만 672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8개 행정동(7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며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토지의 50% 이상이 고도 500m 이하의 지역에 속한다.
서북쪽에는 구룡산(九龍山 178m), 남서쪽에는 아차산(316m)이 서울시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는 왕숙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하고 남쪽에는 한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다.
한강과 왕숙천 주변에는 넓은 충적지가 발달하고 있는데 이들 충적지는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북쪽에는 갈매천(葛梅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띠고 있는데 연평균기온은 11.9℃, 1월 평균기온 -6℃, 8월 평균기온 27℃이며, 연강수량은 1,109㎜로 1월 강수량과 8월 강수량의 차가 250㎜ 이상으로 계절간 강수량차가 크다. 서리는 10월 중순에 시작하여 4월 중순에 끝나는데 무상기일은 약 180일 전후이다.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굴된 바 없으나 인접한 남양주시의 화도읍 검터 · 두촌 · 마진 · 마재 등지에서 구석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에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주로 아차산의 동쪽인 사로동 · 인창동 · 교문동 · 갈매동 등지에서 유구석부와 흑토 · 토기 · 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초기 철기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는 삼한시대에 해당한다.
삼한시대에 구리는 마한의 영역에 속했으며, 마한 54개국 중 고리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구리는 마한지역에서 성장한 백제에 속했으며, 장수왕의 남진으로 인해 475년 이후부터는 고구려에 속하였다.
특히, 구리지역은 남진한 고구려의 전진기지가 있었던 곳으로서 아차산 능선으로 따라 약 20여 개소의 고구려 보루 유적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551년 나 · 제연합군의 한강유역 탈환으로 이 지역은 다시 일시적으로 백제에 속했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553년 이후부터는 신라의 영토가 되어 신주 · 한산주 · 한주에 속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 견주(見州)로 변경되었고, 1036년(정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4년(태조 3)에 한양부에 도읍이 정해질 때 양주의 주치(州治)가 아차산 남쪽인 대동리(大洞里)로 옮겨지면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칭되었다가 부(府)로 승격되었다. 1397년 부치(府治)가 양주의 옛 견주지역인 주내면(州內面)으로 이전되면서 양주로 칭해졌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 이르러 고구려 때 골의노현(骨衣奴縣)이었던 남양주군 일원의 풍양현(豐壤縣)이 양주에 소속되어 폐현이 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목(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에 폐지되었고, 1506년(중종 1) 목으로 다시 복귀되었다.
임진왜란 때 양주목사 겸 경기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이 검암산에 보루를 구축하여 왜적 42명을 참살한 곳이 지금의 동구릉(東九陵) 주산(主山)으로, 이 때 왜병들은 태조의 능침인 건원릉(健元陵)에 신병(神兵)의 도움이 있어 감히 접근을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1894년(고종 32)의 행정구역 개편 때 양주군에 소속되었으며, 1907년 이인영(李麟榮) · 허위(許蔿) · 이강년(李康秊) · 민긍호(閔肯鎬) 등 13도의병연합부대 1만여 명이 서울 점령을 목적으로 작전을 개시할 때 최종집결지가 지금의 교문 · 수택 · 토평동 일대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양주군의 망우리면(忘憂里面)과 구지면(九旨面) · 노해면(蘆海面) 일부가 합병되어 12개 리가 구리면으로 귀속되었다. 1919년 3월 28일과 29일에는 이강덕(李康悳) 등의 주민들이 아차산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면 청사가 소실되어 망우리에 임시청사가 설치되었다가 1955년에 현재의 청사가 신축된 뒤 망우리에 출장소가 설치되어 상봉리 · 중하리 · 묵동리 · 신내리 · 망우리를 관할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의 동대문구역 확장에 따라 망우리출장소 관할구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 양주군 구리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 4월 1일양주군이 남양주군과 동두천시로 분리, 개편될 때 남양주군에 속했다가 1986년 1월 1일에 구리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3월 13일교문동이 교문 1,2동으로 나뉘어졌고, 1996년 1월 8일에는 수택동이 수택1동으로 개칭되면서 수택 2,3동으로 분동되었다. 서울특별시와 인접한 위성도시이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매우 빠르게 발전되고 있다.
사로동에서 고인돌 · 돌널무덤이 조사된 바 있으며, 동구릉 주위에서 빗살무늬토기 · 평저검은간토기[平底黑陶] · 흑요석(黑曜石) · 옥수석기(玉髓石器), 인창동에서 기반식 고인돌과 돌칼 · 돌도끼 · 반월형 돌칼 · 돌화살촉, 수택동에서 흑요석조각, 갈매동에서 석기 · 토기가 발굴되었다.
1970년대 도로확장공사 때 교문동에서도 고인돌이 발굴된 바 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동구릉의 주산 정상에 양주목사를 지낸 고언백이 임진왜란 때 쌓은 고루(古壘)가 있었다고 하나 없어졌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많은 수의 고구려보루성이 확인된 아차산일대 보루군(사적, 2004년 지정)에서는 복발투구 · 화살촉 · 도끼류와 고구려식 토기가 다량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교문동에 청각사가 있으며, 동구동의 동구릉(사적, 1970년 지정)이 검암산에, 아천동에는 세종의 후궁인 명빈김씨를 안장한 명빈묘(사적, 1991년 지정), 사로동에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하면서 기록한 56일간의 난중일기인 『병자록(丙子錄)』을 저술한 「나만갑선생신도비」가 있다. 나만갑선생신도비는 198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무형유산으로는 갈매동의 갈매동도당굿이 있다. 갈매동도당굿은 199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교육기관은 1924년에 설립된 인창초등학교이다. 8·15광복과 더불어 1945년에 갈매국민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66년에 서울삼육학교, 1973년 미동전자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5개교, 중학교 7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다.
이 지역의 민속놀이는 경기도 지역의 놀이와 비교하면 특별한 형태는 보이지 않으나 다만 그 명칭이 특이함을 알 수 있다. 타 지역에서 행해지듯이 정월 대보름날이나 농사일에서 행해지는 농악과 답교놀이 형태가 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댁겨놀이 · 오곡밥과 가장(假裝)놀이 · 박첨지놀이 · 종지돌리기 · 꽃단치기와 갈퀴치기 · 새끼공차기 · 자치기 · 각시놀이 · 정월 대보름놀이 · 선소리타령 · 농악 · 전라우도농악 · 오고무 · 벌마다리밟기가 있고 그밖에도 윳놀이나 연날리기 등이 있다.
민속놀이 중에 농악과 전라우도농악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이 지역에서 농악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정월 대보름놀이라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타 지역에서 보이는 줄다리기 · 횃불싸움 · 달집태우기와 같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대보름날에 행해지는 모든 놀이를 지칭한다.
그리고 댁겨놀이는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댁겨하는 날이라고 별도로 날을 잡아 마을사람들이 넓은 마당에 높은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삼현육각을 잡혀 소리하고 춤을 추는 놀음놀이를 하고 무대 아래에서는 2∼3층 무동을 썼다. 이렇게 무동을 타는 것을 댁겨놀이라 한다.
종지돌리기는 여자들끼리 방안에서 하는 놀이로 역시 정월대보름날 전날 밤에 하는 여자들 놀이이다. 놀이꾼들은 다리를 오므려 세운 채 둥글게 원을 만들어 앉고, 술래는 원 가운데 선다. 놀이꾼들이 치마 밑으로 오므려 세운 다리 아래로 옆 사람이 준 종지를 받아 다시 옆 사람에게 종지를 돌리다가 멈추면 술래가 종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놀이이다.
그리고 꽃단치기와 갈퀴치기는 친구들끼리 나무를 하면서 놀던 놀이로 꽃단치기가 있다. 각자 베어 모은 억새풀을 한 묶음 뭉쳐 세워 놓고 멀리서 이 나뭇짐에 낫을 던져 꽂는 사람이 그것을 따먹는 놀이이다.
그리고 갈퀴치기라고 하여 나뭇잎을 수북이 쌓아 놓고 갈퀴를 빙빙 돌려 던져서 갈퀴가 엎어지면 이기고 제쳐지면 지는 것으로 내기를 하여 나뭇단을 따먹는 놀이이다. 긁어모은 나뭇잎을 세 명이 해서 두 번을 이기면 그것만 가지고 와도 편하게 일을 마치는 것이다.
또한, 각시놀이는 여자 아이들이 각시풀과 수수깡을 이용해서 사람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천으로 옷을 입히고 각시풀로 댕기도 만들어 달아 각시인형을 만들어 노는 놀이이다.
현재 구리에서는 지역 축제의 하나인 구리문화예술제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아직 그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아서 주민들의 참여와 홍보가 미흡한 상태이기는 하나 사라져간 구리지역의 민속놀이를 복원하고 현재에 행해지는 민속놀이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축제라 할 수 있다.
동제는 갈매동의 도당굿, 우미내 서낭제, 사로동의 동당굿과 서낭제, 수택동 수늪마을 산신제, 토평동의 우물고사와 도당굿, 교문동 한다리 대동고사, 인창동 동창마을의 산신제와 부군제가 있다.
특히 갈매동도당굿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갈매동의 전체적인 경관을 보면 앞에는 도로가 나 있고 뒤편에는 검암산 산줄기가 흐르고 있다. 산줄기 쪽으로 동구릉이 있어 자연적으로 녹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산구릉에 배경으로 마을이 길게 이어져 있다. 당집은 바로 산 쪽에 위치하여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갈매동 도당굿의 제의에 관련된 문서는 두 건이 전해져 오는데 하나는 ‘戊辰三月初五日山致誠節次(무진삼월초오일산치성절차)’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하나는 ‘檀紀四二九三年三月致誠節次(단기4293년3월치성절차)’라고 쓰여 있어 역사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갈매동 명칭은 갈매동 산치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당과 하당 형식으로 산신당이 상당, 도당이 하당격이 된다. 도당산의 중턱에 산신당이 있는데 당집은 없고 나무만 서 있을 뿐이다. 산신당 안에는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 내외분이 모셔져 있다.
제일(祭日)은 봄에 하는데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대동의 제축을 마련하여 꽃 피고 잎이 돋아나는 봄을 축하하는 축제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이는 대부분의 경기도 도당굿이 추수를 끝낸 시월 상달에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음력 2월 1일에 삼화주를 뽑고 음력 3월 초하룻날이 되면 당주 · 숙수 · 도가 · 화주 · 시주 총 5명이 제일을 결정하고 곧바로 당집에 가서 대들보에 첩을 붙여 날이 잡혔음을 도당에게 아뢴다. 3월 2일 밤에 산치성이 이루어지고 그 날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유가를 돈다. 3월 3일에 본굿이 이루어지는데 대개 격년으로 정일에 한다.
제의 비용은 집집마다 갹출한 것이 원칙이다. 예전에는 개인별로 쌀을 내었다고 하나 현재는 쌀과 돈을 함께 낸다. 현재의 호구수는 대략 200여 호가 되고 정액제인데 생활여건에 따라서 정성을 바친다.
제물(祭物)은 삼도가가 서울의 청량리시장으로 사러가고 장에 가서도 지켜야 할 금기가 있다. 제물의 마련은 숙숫간과 찬방에서 이루어진다. 숙숫간은 굿청과 찬방 사이에 있는데 이 곳에서 산치성 및 도당굿에 진설될 제수를 정리한다. 찬방은 화식을 만드는 곳으로 익히는 음식은 모두 찬방에서 마련한다.
갈매동 도당굿의 특별한 제물은 조포 · 계면떡이고 술은 정종을 사용하기도 하나 조라는 여전히 빚는다. 시루는 숙숫간에서 도가와 시주 · 화주의 손으로 아궁이에 직접 불을 때서 만들어지는 순서대로 당에 올린다. 또한 산치성에 쓰일 향은 향나무를 조각내 깎아서 직접 만들어 쓴다.
제의 철차는 예고제 · 부정풀이 · 당집청소 · 나무준비 · 조포모시기 · 안반고사 · 산치성 · 서낭맞이 · 유가 · 본굿 · 회계의 절차로 되는데, 본굿의 절차는 또 초부정 · 가망청배 · 조상거리 · 산할머니 · 별상 · 대감놀이 · 제석거리 · 호구거리 · 바리 · 계면떡 · 군웅거리 · 걸립 · 당굿 · 뒷전의 순서로 진행된다.
갈매동 본마을의 도당굿이 현재로서는 가장 성대하지만, 갈매동 담터마을의 도당굿도 예전에는 대단했다고 한다. 담터의 도당굿은 할머니라고 하여 본 마을보다도 먼저 날을 잡고 매년 성대히 올렸다고 한다.
이 지역의 옛 명칭은 구지(龜旨 · 九旨)였다. 그래서 마을의 명칭에서 나타난 지명유래가 있는데 현재의 행정구역에 따라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구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차산의 유래가 3∼4가지가 있고, 그리고 현재의 구리에 관한 유래가 있다.
또 지금은 행정구역상 서울에 속한 망우리에 관한 것과 각 동에 있는 지명에 관한 유래가 있는데 갈매동에는 담터 · 장기(墻基)와 범데미 · 범더미 그리고, 섬말 · 도촌(島村)에 관한 유래가 있다. 그 중에서 범데미 · 범더미 지역의 유래를 보면 지금은 갈매초등학교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 서울로 넘어가는 고개에 범이 자주 나타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또한 동구동의 두레물골 지명유래를 보면 마을 가운데에 단 한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물을 마을사람들이 모두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두레는 그 어원이 ‘두레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돌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인창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베틀고개의 유래가 남아 있는데 베틀고개는 간촌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왕숙천이 넘쳐 흘렀을 때 이 고개에서 배를 타고 피했다 하여 배달고개인데, 이것이 뒤에 베틀고개로 변한 것이다. ‘배탈’에 대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 배를 탈 수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교문동에는 아천동 · 딸기원 · 덕고개(德峴) · 도래미 · 박촌 · 백교(白橋) · 한다리 · 아치울 · 우미내(牛尾川) · 이문(里門)안 · 동사골 · 미암(米巖) · 시루봉의 지명유래가 있다. 샛다리 북쪽과 안골의 남쪽 사이에 있는 마을인 박촌의 마을유래는 예전에 이 곳에 밀양 박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박씨성을 가진 호수는 옛날에는 16호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0호 정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수택동의 검배 지명유래를 보면 원래 그 지역에 크고 검은 바위가 있어 검배라 불렸는데 일제 때 산대촌으로 바뀌었다. 일제시대 때의 신대촌(새터말)은 새말(신촌)과 구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구말은 안말 또는 너머말 등으로 불렸다. 현재에도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검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의 민요는 강원도 지역의 민요인 정선아리랑이 보이고 그 밖에도 경기도 일대에서 보여지는 창부타령과 같은 유사한 형태의 민요가 불려지고 있다.
조사된 민요를 살펴보면 「저자거리」 · 「떡타령」 · 「피(평)양구경」 · 「조종노래」 · 「자장가」 · 「제절가」 · 「동동」 · 「창부타령」 · 「노랫가락」 · 「조강지처노래」 · 「각설이타령」 · 「뱃노래」 · 「범벅타령」 · 「아리랑」 · 「논매는 노래」 · 「모심는 노래」 · 「궁초댕기」 · 「담바구타령」 · 「방아타령」 · 「베틀가」 등이 불러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범벅타령」이나 「창부타령」 · 「자장가」 등은 다른 여러 사설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피(평)양타령」과 「제절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피(평)양타령」은 “구경을 가자 구경을 가자/ 피양이 좋다고 하니/구경이나 가볼꺼나/대동강을 약주를 삼고/모란봉을 안줄 삼고/연강(광)정은 요리를 삼고/부벽루는 촛댈 삼고/평양기생 월선일 불러/요지경속으로만 놀아보자/지경지경이 요지경인줄만 알았더니/돈떨어지고 님 떨어지니/죽을 고비가 여기구나/얼씨구나 좋다/요렇게 좋은건 처음 봤구나”와 같다.
다음에 「계절가」는“표고 동풍에 절이를 당하여/님의 분묘를 찾아가니/분묘 앞엔 황토요/황토 위에다 제석을 깔고/제석 위에다 조조반 놓고/조조반 위에다 상간지를 펴고/차려간 음식을 좌우로 벌려놀 때/염통산적 양볶이 녹떡 살지지미며/인삼 녹용 도라지 채며/고비 고사리 두릅 채며/왕십리 미나리 채며/먹기 좋은 녹두나물이며/쪼개쪼개 콩나물도 놓고/심계곡산 무임초에 머루 다래며/함종에 약물이며/연안 백천의 황밤 대추도 놓고/경상도 풍기 준시 수원 홍시며/능라도 썩 건너서/참모릉에 둥글둥글 청수박은/대모장두 드는 칼로/꼭 꼭지를 스스르르르 돌려 ○고/강릉 생황을 주루룩 구워서/메 한 그릇은 굉이로구나/술이라니 입에 귀경/포도주며 떨어졌다 낙화주요/산림 처소에 송록주로다/도연명의 국화주며 마곡노소 천일주요/맛 좋은 감홍로/빛 좋은 청소주며 홍소주라/온갖 술을 다 그만두고/청명한 약주술로/모사에 재배에/첫 잔 부어 산제하고/두 잔 부어 첨작이요/석 잔 부어서 분상 묘제에/퇴배 연휴에 옷은 벗어서 나무에 걸고/그냥 그자리에 되는 대로 털썩 주저 앉아/오열 장탄에 애곡을 할 뿐이지/뒤따를 사람은/전혀 없구나/선영에 풀이 길고/한식 명절 당도하여도/잔 드릴 사람이 전혀 없으니/일구 황본이 가련하구나/천지로다 집을 삼고/황토로다 표막 삼으며/금잔듸로다 이불을 덮고 누워/산천초목을 울고 삼으니/두견 잡동이 벗이로구나…….”와 같다.
전 토지의 39.2%가 산림지인 이곳은 경지가 전체의 19.8%인 485㏊이며, 이 밖에 대지 8.4%, 도로 4.6%, 하천 용지가 3.4%이다. 경지 중 논은 7㏊, 밭은 478㏊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채소류로 호박 · 상치 · 배추 · 시금치 · 파, 과실류로 배가 많이 생산된다. 서울 근교에 입지하여 과수원 · 수목원 · 화훼 단지 등이 도로변에 입지하고 있다. 특히,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에 속해 있어 토지 이용이 제한을 받고 있어 타지역에 비해 과수원이 많은데, 그 중에서 배 · 복숭아 · 포도 등이 많다.
산지지역에서는 밤 · 대추 등도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인근에는 동구릉 아차산성 등의 유적지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모이고 있다. 이들 관광객을 위한 수목과 화훼원예 이외에 도 음식업이 발달해 있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0.8%인 1,660명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1.7%인 3,319명이다. 주요 제조업은 식료품공업 · 비금속광물 · 조립금속 · 섬유공업이 발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제조업은 소규모로 영세성을 띠고 있다.
시장은 수택동 · 교문동 · 인창동 · 수평동에 6개의 상설시장이 있는데 수택동의 구리시장은 남양주의 도농 · 덕소 · 퇴계원 일대에까지 상권을 형상하고 있다.
도로는 국도 43호선이 시의 중심을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6호선이 구리시의 북부를 서남∼동북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시는 경춘선 · 중앙선이 지나고 국도 43호선 · 국도 46호선 · 국도 47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의 하나이다.
그러나 서울에 인접해 있고 교통량이 많은 서울∼춘천간의 경춘가도의 길목에 있어 항시 교통 체증이 심한 지역의 하나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퇴계원∼구리간, 구리∼양수리간의 도로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중부고속도로가 연장되어 하남을 거쳐 구리를 지나 퇴계원으로 나가고 있다. 철도는 경춘선이 갈매동 북부를 서남∼북동향으로 지나고 있으나 구리시의 교통량 수송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중앙선은 시를 중심으로 국도 46호선과 평행하게 지나고 있다. 중앙선은 시를 남북으로 구분하는 역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용산∼덕소간 전철화 사업이 완료되어 구리시의 교통량 수송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의 본류가 흐르고 서쪽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왕숙천이 흐르고 있다. 수택동을 축으로 한 서쪽에는 아차산이 있고 동북방에는 동구릉의 주산인 검암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강 주변 토평동 일대는 넓은 충적지가 발달하여 근교농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주변 구릉성 지형에는 당도가 높기로 유명한 먹골배의 주산지를 이루고 있어 서울 시민의 나들이 관광농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시의 주변에는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어 1일 관광코스 및 학생들의 유적답사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많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교문 · 토평 · 인창지구에 주택지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문화유적지들은 도시 속에 점점 파묻혀가고 있다.
역사문화 유적지로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구릉이 있다. 이곳은 이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9위 17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서 봄 · 가을 역사탐방 관광객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는 구리시의 역사 · 문화 대변지역이다.
또한, 아차산 일대의 처녀림에서 발견된 고구려 토기를 비롯한 백제 초기에 축조된 성터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문화유적 관광명소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더욱이 최근에 발견된 고구려보루군은 고구려 역사유적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아차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서 백제의 한성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3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아차산성의 형태는 테뫼식으로 산 정상부를 돌아가면 축성하지 않고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지역을 조망하기 편하도록 작은 계곡을 포함시켜 지형을 적절히 잘 이용한 성으로 유명하다.
민속놀이의 하나인 벌말다리밟기는 마당놀이 형식으로 5마당으로 구성되어 전 시민 행사로 치러지고 있어 앞으로는 문화관광 도시로의 발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