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경우 광복 이후 근대 국가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근대적인 국가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이므로, 광복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국가관이 우리 고유의 국가관으로 존재했다고 보이며, 광복 이후에는 전통적인 나라의 개념 위에 새로이 근대적 국가의 개념이 첨부되어 국가관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라와 국가의 개념은 서로간의 의미 차이가 있고, 또 나라의 개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법적·정치적인 개념으로 파악되지만, 나라에 대해서는 국가와 나라를 동일시하는 설, 말과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설, 공통적인 역사적 유산을 소유한 집단이라는 설, 국가의 영토를 뜻한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들은 대부분 서양에서 발전된 것이고, 우리 나라처럼 동양문화권에 속하는 경우에는 나라와 국가에 대한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동양 전통사회에서는 예로부터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구절이 나라 또는 국가 개념의 기준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치국(治國)’의 개념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보다는 나라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라를 대표하는 이가 곧 임금으로서의 나라님이었다.
우리의 전통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온 공통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공통의 역사적 체험과 고향으로서의 영토의식이 복합적으로 결집되어 나라의식을 향유해 왔다. 예컨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동국(東國) 군왕(君王)의 개국 연대는 단군의 수명과 같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들어가서 신이 되어 죽지 아니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東國]에는 단군이라는 임금이 1,038년을 통치하다가 결국 멸망했다는 것이다. 단군이라는 개인이 1,038년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군이라는 여러 임금들의 보통명사가 그만큼 나라를 지속적으로 통치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그러다가 단군조선이 멸망했지만, 나라님이 죽지 않는 신이 되었다는 것은 사라진 나라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통일신라의 위업을 성취한 문무왕의 평생 이념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崇奉佛法 守護邦家]’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문무왕의 강렬한 애국정신과 나라사랑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나라에 대한 애정과 숭상의식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 고대사회에서부터 우리에게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우리 역사를 통하여 나라에 대한 가치관은 전통사회에서 주로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문화를 통하여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까닭은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모든 가치관과 정신문화의 핵심은 주로 종교생활을 통하여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의 단적인 보기가 앞에서 거론된 문무왕의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이념일 것이다.
(1) 불교시대의 국가관
우리나라 역사를 통하여 가장 불교신앙이 왕성했던 시절이 삼국시대(특히 신라)와 고려시대일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나 광복 이후에 불교신앙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가 그 시대의 정신문화를 대표적으로 이끌던 시대는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가운데서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의 불교문화가 나라의식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문헌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진단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로 제한하려 한다. 신라에 들어온 불교문화는 일찍부터 애국주의 신앙과 조화되었다. 화랑의 세속오계를 가르쳐 준 원광(圓光)이나 의상(義湘)·자장(慈藏)·원효(元曉)의 사상이 그러한 예이다.
신라 불교인들이 불교사상을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방향에서 토착화시킨 실천적 결과가 곧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이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조국을 지키는 호국신(護國神)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주위의 신하가 “지존하신 대왕께서 죽어 극락왕생은 못할망정 어찌 인간 이하의 축생인 용이 되려고 자원하십니까?”라고 안타깝게 물으니, 왕은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면 짐승으로 태어나도 무엇이 언짢은가?”라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이전에 신라에서 불법을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나 순교자 이차돈(異次頓)도 다 같이 나라와 국민생활에 복을 닦게 하려는 정신에서 불교를 숭상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나라사랑과 불교신앙의 관계가 신라시대만큼 긴밀한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신라인들은 자기 나라를 가장 훌륭한 현실적인 불국토(佛國土)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단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 와서야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신라인들은 자기 나라가 먼 과거에서부터 불법과 인연을 맺어 왔다는 믿음을 가졌다.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 또는 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전에 그의 어머니가 ‘신라는 지금 불법을 모르지만……, 그 나라 도읍 안에 일곱 개의 절터가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전불(前佛) 때 가람의 터전이라 앞으로 불법이 길이 유행할 곳’이라고 말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또, 같은 책 문무왕조에 135세나 되는 낭지(郎智)라는 노승이 살았는데, 그가 거처하던 절터가 가섭불(迦葉佛) 당시의 절터였기에 땅을 파서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다고 한다. 가섭불은 석가모니불 이전에 있었다는 전불(前佛)이다. 또한 유명한 황룡사도 전불시대의 일곱 절터 가운데 하나라는 기록도 전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신라인들이 자기 나라가 역사적으로 불교와 인연이 깊다고 보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 가득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신라인들이 자기 나라가 석가모니의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전세불(前世佛)인 가섭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믿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이미 자기 나라에 대해 아득한 옛날부터 부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고귀한 불국토라는 역사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둘째로, 신라인들은 자기 나라를 서축(西竺:지금의 인도)에 견줄 만한 동축(東竺)의 불교주인국이라는, 강한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인도가 불교의 발생지라고 해서 인도를 종주국으로, 신라를 아류국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신라를 새로운 불교의 종주국으로 여겼던 당당한 주체정신이 『삼국유사』의 황룡사장륙조(皇龍寺丈六條)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라 24대 진흥왕 때 남쪽에서 큰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는데, 인도의 불교 중흥주인 아육왕(阿育王: Asoka왕을 이름)이 황철(黃鐵) 5만7천 근과 황금 3천 푼을 모아서 석가의 불상 셋을 주조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인연이 있는 곳에 가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달라고 했다는 공문이 실려 있었다. 이에 진흥왕은 경주 근교에 동축사(東竺寺)라는 절을 세우고 아육왕이 성공하지 못한 불상을 단번에 이룩하였다.
그 뒤 자장이 중국에 유학갔을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에게 비결(祕訣)을 건네주며 “너희 나라 황룡사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했던 곳이기에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인도 아육왕이 황철을 약간 띄워 바다에 보냈는데, 1천3백여 년이 지나 그것이 너희 나라에 도착해서 불상이 주성되어 그 절에 안치되었다. 대저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옛이야기는 신라인들이 불교를 수용하고 믿되 인도의 불교를 위해 마음을 인도 쪽으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불교사상을 자기 나라의 정신문화로서 주체적으로 구심화했던 정신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로, 신라인들도 자기 나라를 부처나 보살들이 사는 깨끗한 땅, 즉 정토(淨土)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즉불정토사상(新羅卽佛淨土思想)’이다. 신라인들은 자기 나라를 저주받은 땅이 아니라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고 여겼기에 우리는 신라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예컨대, 강원도 낙산사에서 의상과 원효가 관음보살의 거주처와 현신(現身)을 보았다는 기록,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거주한 곳이고 거기서 자장이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기록, 효소왕 때 망덕사 낙성시 석가모니 진신불(眞身佛)이 나타나 공양을 받고 하늘로 승천한 기록, 원효가 신라의 땅 밑에서 극락을 보았다는 기록 등은 모두가 한결같이 신라가 진신상주(眞身常住)의 나라이기에 고귀하고 축복받은 땅이라는 정신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신라인들이 보여준 호국정신은 이와 같은 불교적 정신사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즉, 불법 수호와 나라 수호를 일치시킨 신라인들의 나라의식에서 우리는 화랑도가 펼쳤던 애국활동의 철학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이 사회적으로 팔관회(八關會) 및 백고좌(百高座)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의 「십훈요 十訓要」에 보이는 팔관회의 뜻과 의종의 팔관회 부활 취지도 단지 불교적 행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의 정신을 부활시켜 나라의 융성에 이바지해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몽고의 고려 침략 때 이루어진 대장경판 제작도 저 신라 정신의 의지를 승계한 것이고, 그 경판 제조 때 이규보(李奎報)가 쓴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의 정신도 이러한 전통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휴정(休靜)의 호국정신도 신라 원광의 「걸사표(乞師表)」에 나오는 정신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고려불교는 신라불교만큼 불교신앙을 통한 나라 흥륭의 강렬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인들은 불교에 바탕을 둔 정법(正法) 수호가 곧 국가를 수호하는 것과 같다는 국민정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와서 불교 이외에 탈속적인 도가사상(道家思想)이 큰 영향을 미쳐 불교를 통한 현실적 나라의식이 신라시대만큼 진하지 못하였다. 몽고의 침략 등 내우외환으로 시달린 고려를 중흥시키기 위해 지눌(知訥)은 수연이물(隨緣利物:인연 따라 모두를 이롭게 해줌)과 행보살도(行菩薩道:보살정신을 행함)의 이념에 충실한 결사(結社)의 필요성을 제창했지만, 그의 결사이념이 신라의 불교만큼 나라의식·국가의식을 강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2) 유교시대의 국가관
유교시대란 곧 조선시대를 말한다. 그러나 최초로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이고, 그때부터 학교교육과 현실정치의 이념은 줄곧 주로 유교정신에 의해 짜여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 화랑의 대명사 격인 김유신(金庾信)의 충효사상은 그의 국가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소자는 평생 충효로써 스스로를 기약했으므로 전투에 임하여 용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옷소매[領]를 잡아당겨야 갑옷이 발라지고 벼리[綱]를 이끌어야 그물이 펴진다는 것을 소자는 자주 들었습니다. 소자는 그 강령(綱領)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김유신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단적으로 유교적 국가관이 곧 충효에 바탕을 둔 가치관임을 뜻한다. 이 충효적 국가관이나 나라의식은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면히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나라 유교인들의 나라 생각, 즉 국가관은 근본적으로 민본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라는 백성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본사상의 원류는 물론 맹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이 유가적 민본사상이 한국 유학사에서 강력히 흘러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자는 이민위심(以民爲心: 백성으로써 마음을 삼음)의 민본적 정치원리를 제시하고 실천하려고 하였다. 그 표현이야 어떻든 조선시대의 모든 성리학과 실학에 이러한 민본주의적 정치관과 국가관이 연면히 흘러왔던 것은 사실이다.
둘째로, 유교시대에 유교인들은 인륜도덕적 나라의식을 그 어떤 시대보다 강렬하게 지켰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유가의 나라의식은 근본적으로 ‘수신(修身)’에서 출발하여 ‘제가(齊家)’를 거쳐 ‘치국’으로 나아간다. 자기 자신의 인륜도덕적 정체성(正體性)이 확립되지 않으면 가정이나 나라가 자신의 정신적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나라는 국민 모두의 인륜도덕적 질서의 연장이요, 확장인 셈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한국 유학사에서 인륜도덕에 입각한 사회질서 확립을 위하여 향약(鄕約)의 의미를 강조해 왔다. 이황(李滉)의 예안향약, 이이(李珥)의 파주향약·서원향약·해주향약이나 안정복(安鼎福)의 향사법(鄕社法)도 모두 인륜적 풍속과 상부상조의 예의를 바탕으로 한 도덕사회, 인륜적 나라를 창출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셋째로, 유교가 우리 문화에 끼친 나라 생각은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함)적인 행동 애국사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미 유교가 들어온 삼국시대에 김유신은 고구려에 외교사절로 간 김춘추(金春秋)를 구하기 위해 3천 인의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라는 말을 나는 들었노라. 어려움을 당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음은 열사(烈士)의 뜻이다…….”라는 유교적 ‘견리사의’의 행동철학을 말한 바 있다.
많은 화랑도들의 구국적 행동도 이러한 이념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당하여 이 땅의 많은 선비들이 구국의 이념을 행동화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시킨 것도 견리사의적인 국가의식의 소산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이 제창한 ‘활국활모(活國活母)’의 정신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고 조국을 살리는 길에 온몸을 던지는 행동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넷째로, 주체적 나라의식을 들 수 있다. 일찍이 최치원(崔致遠)도 「진감국사비문(眞鑑國師碑文)」에서 주체적 진리의 중요성을 말하였고, 고려시대 최승로(崔承老)도 그의 「시무책(時務策)」에서 문화의 특수성에 바탕을 둔 주체성을 정책화하였다.
그런데 주체적인 국가의식을 특히 강조한 이가 정약용(丁若鏞)이다. 그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중용강의(中庸講義)」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한 동방도 아니요,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중(中)이라고 하면서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려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대하여 타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한말 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이 말한 ‘자수지도(自守之道)’와 ‘자강지책(自强之策)’도 박은식(朴殷植)의 ‘자주적 얼’과 같이 유교시대에 제기된 주체적 국가의식의 산 실례라고 볼 수 있다.
현대는 다종교시대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였다. 삼국시대부터 풍류교·불교·도교·유교가 더불어 존재했고, 지금은 불교·유교에다 많은 민족종교,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가 들어왔다. 교리가 다 다르고 가르침의 방법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일단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상 한국 종교여야 한다.
신라시대에 불교가 들어왔어도 인도의 불교가 아니고 신라의 불교였듯이, 또 인도를 위하는 불교가 아니고 신라가 신성한 불국토이기를 바랐던 불교였듯이, 그리고 원광이 사문(沙門)이면서도 호국의 출사표를 냈듯이, 오늘날의 한국 종교들도 그러한 우리의 옛 전통을 재음미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의 여러 종교들이 이 땅에서 화합하여 각기의 특징과 장점을 잘 살려 나갔을 때는 우리나라가 흥륭(興隆)하였고, 종교간에 서로 갈등을 일으켰을 때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쇠퇴했던 교훈을 살려 자기 종교의 배타적 우월성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산업화시대는 정치적으로 민주화시대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공통적인 말과 문화, 같은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같은 역사적 유산과 체험의 기억에 바탕을 둔 나라의식이 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감적인 나라 생각은 산업시대에 등장한 민주국가를 유지하는 국가의식으로는 불충분하다.
정감적인 나라 생각은 영어로 ‘네이션(nation)’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제 우리는 현대국가를 창조해 가는 마당에 서 있는바 ‘스테이트(state)’, 즉 법적 국가의식이 더욱 요청된다. 다시 말하면, 법적 질서에 대한 합리적 준법정신과 공익을 우선하는 시민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시민의식은 합리성과 준법정신에서 성공적으로 자란다. 그러므로 민족의식과 시민의식은 우리가 가져야 할 국가의식의 두 기둥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