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례 ()

춘관통고 / 군례
춘관통고 / 군례
유교
의례·행사
오례(五禮)의 하나로 군대에서 행하는 유교의례. 오례 · 군대의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오례(五禮)의 하나로 군대에서 행하는 유교의례. 오례 · 군대의식.
개설

군대의 규모·실정과 병마(兵馬) 등을 검열하는 열병의식, 무술을 조련하는 강무의식(講武儀式), 싸움터에 나가는 출정의식, 적을 죽이고 귀나 목을 잘라 임금에게 바치는 헌괵의식(獻馘儀式),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베나 비단에 글씨를 써서 매다는 노포의식(露布儀式) 등의 예절과 수렵·축액 등이 포함된다.

연원 및 변천

군례의 의식은 중국 고대에 있었던 육례의 하나인 사(射)의 의식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예기』 사의편(射儀篇)에 기록된 활 쏘는 의식은 덕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살상에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의식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보존과 영토의 확장, 수비나 방어를 위한 필연적인 군대의식과 예절이 요구된 것이었다.

『국조오례의』 서문에서 “국가의 방비 때문에 군례가 있게 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쟁이 없을 때는 성을 쌓고 보루(堡壘)를 막아서 적의 침략에 대비했으며, 조련과 열병을 통해 군사력을 기르는 의식이 있었다. 전쟁 때는 천자나 군주가 직접 출정하거나 장수를 임명하여 출정하게 하였다.

『주례』 대종백(大宗伯)에는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 등 다섯 가지 예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의 군례는 대사지례(大師之禮), 대균지례(大均之禮), 대전지례(大田之禮), 대역지례(大役之禮), 대봉지례(大封之禮)의 다섯 가지로 규정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형태의 군례는 당대(唐代)에 이르러 23개의 의칙으로 발전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군례 23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1) 삼국시대의 군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군인의 직제와 의식이 이루어졌다. 군인은 대개 금(衿)이라는 휘장 또는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었고, 신라에서는 푸른 색과 붉은 색으로 구별하고 반달모양이었는데, 그 길이는 분명하지 않았다. 대장군화(大將軍花)는 셋의 장식으로서 길이 9치(長九寸), 너비 3치 3푼(廣三寸三分)이었으며, 상장군화(上將軍花)·하장군화(下將軍花)·대감화(大監花) 등의 규격이 조금씩 달랐다. 영(鈴)은 황금으로 둥글며 1자 2치(一尺二寸)이었고, 품계에 따라서 흰 은[白銀], 흰 동[白銅], 또는 철(鐵) 등으로서 각각 달랐다.

(2) 고려시대의 군례 고려시대의 군례는 견장출정의(遣將出征儀)·사환의(師還儀)·구일월식의(救日月食儀)·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 등이 있었다.

  1. 견장출정의: 전쟁에 장수를 파견할 때 올리는 의식이다. 이때는 사당에 제사하고 태묘에 고하는데, 의식의 진행은 유사(有司)가 맡되 왕에게 아뢰는 것과 같다.

사설서(司設署)에서는 하루 전에 궁전 앞에 왕이 관람하는 전각(殿閣)을 만들고, 원수·부원수가 앉을 자리를 뜰 가운데 북쪽을 향하여 마련한다. 수궁서(守宮署)에서는 궁전 앞 조당(朝堂)에 원수·부원수의 장막을 설치하고 의장대는 뜰에 늘어선다. 원수·부원수가 융복(戎服)을 입고 모든 군종사관(軍從事官)을 거느리고 문밖에 나아가 항오를 가다듬고, 북향하고 선다. 왕이 붉은 관복을 입고 앉으면 의장대는 회초리를 휘둘러 좌중을 진정시킨다.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절한 다음에 원수와 부원수를 인도하여 궁전 뜰로 들어가 자리에 서서 북향하고, 집례의 외침에 따라 두 번 절한다. 합문(閤門: 통례원)이 칙명이 있다고 소리치면 원수·부원수가 다시 두 번 절하고 왕 앞에 나아간다. 왕 오른편에 꿇어앉으면 상장군이 큰 도끼를 바치고 왕은 자리에서 내려와 도끼를 원수에게 전한다. 원수와 부원수가 정문으로 나가면 낭장은 도끼를 받들고 앞에서 인도한다. 문밖에 나가면 주악이 울리고 병부(兵部)에 이르게 되면 그친다.

  1. 사환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아갔다가 개선하여 돌아와서 올리는 의식이다. 군대가 개선하기 하루 전에 사설서에서 왕의 자리를 궁전 앞에 만들고, 원수·부원수의 자리를 뜰 앞에 만든다. 수궁서에서는 원수·부원수의 장막을 대전 문밖 조당에 만들고, 숙정(宿亭)에다 연회에 참석하는 대신의 자리는 서쪽으로, 원수·부원수의 자리는 동쪽으로 하여 만든다.

대신들이 도착하면 원수 이하는 서로 읍하고 들어가서 궐로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왕의 안부를 묻고 다시 절한 다음 인도되어 나아가 자리에 선다. 원수가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표(謝表)를 받들고 왕을 모신 관리에게 꿇어앉아 올리면 앞으로 나와 표(表)를 받들고 자리에 올라간다. 원수 이하가 또다시 두 번 절하면 함(函)을 가진 관리에게 표를 전한다.

동쪽에 공(公)·후(侯)·백(伯)의 자리를 정하고, 서쪽에 원수·부원수의 자리가 정해지면 군대와 의장대를 이끌고 개가를 울리며 광화문에 이른다. 이때 좌우의 신하들이 궁전 뜰에 나아가고, 원수·부원수가 궁전 문 앞에 이르면 이들을 인도하여 왕 앞에 나아간다.

왕은 붉은 관복을 입고 자리에 앉는다. 모든 신하들이 절하고 원수를 왕의 오른쪽에 인도하면 꿇어앉아 도끼를 올리고 두 번 절한다. 왕이 이를 받아 상장군에게 전하면 원수 이하가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궁전 뜰에 나아가 대열을 짓고 북향하여 두 번 절하면 왕의 만복을 연주한다. 무도와 절이 끝나면 왕이 술과 음식을 하사한다.

1107년(예종 2)에 윤관을 명하여 여진을 정벌할 때 출정의식과 개선의식이 있었으며, 서경(西京)이 모반할 때 김부식에게 토벌을 명하면서 실행한 출정의식이 있었다.

  1. 구일월식의: 일식과 월식을 구제하는 의식이다. 당일 신하들은 검은 관을 쓰고 흰옷을 입으며, 왕은 소복차림을 한다. 때가 되면 전(殿)을 내려가서 두 번 절한다. 왕이 내려가면 별감은 향을 피워 받드는데, 왕은 두 번 절하고 다시 전으로 올라간다.

  2. 계동대나의: 겨울에 역귀(疫鬼)를 쫓는 의식이다. 의식을 행하기 하루 전날 12살부터 16살까지의 아이를 뽑아 역귀를 쫓는 아이로 삼고, 가면을 씌우고 붉은 바지저고리를 입혀 24인을 한 대열로 여섯씩 짝을 맞추어 12인씩 둘로 나눈다.

집사는 붉은 수건을 두르고 소매가 달라붙는 홑옷을 입고 채찍을 잡고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가 되어 가면을 쓰고 황금빛 네 눈을 그리고 곰 가죽을 덮어쓰고 검은 옷과 붉은 치마로 창과 방패를 들고 깃발과 북을 든 네 사람을 따르게 하여 악귀를 쫓는다. 의봉(儀鳳)·광화(廣化)·주작(朱雀)·영추(迎秋)·장평(長平)의 문에다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문 옆에 구덩이를 마련한다. 북을 치고 떠들며 나아가 소리치기를 마치면 축을 읽고 제사를 올리고 음식을 묻는다.

(3) 조선시대의 군례 조선조의 군례는 중국의 군례와 우리나라의 예를 종합해 세종조에 완성된 것이다. 큰 조목별로는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壇儀)·대열의(大閱儀)·강무의(講武儀)·취각의(吹角儀)·구일식의·계동대나의 등 여덟 가지 의식이 있었다. 이와 함께 『국조오례의』가 태종 때부터 허조(許稠) 등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어 1474년(성종 5)에 완성되었다.

그 뒤 영조 때 이루어진 『국조속오례의』에는 대사의(大射儀)·선노포의(宣露布儀)·친림구일식의(親臨救日食儀) 등이 증보되었다. 1778년(정조 2)에 간행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위에서 제시한 의칙과 열한 가지의 군례가 소개되고 있다. 연사의(燕射儀)·친림시사의(親臨試射儀)·친림융무당문신삭시사의(親臨隆武堂文臣朔試射儀)·친림연륭대시사의(親臨鍊戎臺試射儀)·친림춘당대호궤의(親臨春堂臺犒饋儀)·강무의·성조의(城操儀)·야조의(夜操儀)·용주도섭의(用舟渡涉儀)·친림구일식의 등이다. 위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조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우사단의: 2품 이상의 문관·무관이 참가하여 활 쏘는 의식이다. 2품 이상의 문관·무관은 왕과 함께 풍악에 맞추어 사단에 올라 왕이 4개의 화살을 쏘면 문무백관이 차례로 살을 쏘아 과녁에 맞히는 사람은 이름을 적어 포상하고 빗나간 사람은 벌주를 준다.

  2. 관사우사단의: 왕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사장(射場)에 이르러 종친과 문무백관의 활 쏘는 모습을 참관하는 의식이다.

  3. 대사의: 영조가 사우사단의에 한 가지 의식을 더 보태서 창안한 활 쏘는 의식이다. 1764년(영조 40) 2월, 종친과 문무 2품 이상 70여 명의 관원과 함께 건명문에서 대사의를 행하였다. 영조는 두 개의 화살을 맞히고 웅후(熊侯: 가장자리에 곰가죽을 달아 묶도록 한 과녁을 덮어씌우는 천)는 거두어서 영수각에 보관하게 하고 활쏘기를 명하게 하였다.

  4. 연사의: 연회의 흥취를 돋우기 위해 베풀었던 활 쏘는 의식이다. 불운정(拂雲亭)의 90보 앞에 곰·범·사슴·꿩 등 그림이 서로 다른 9개의 과녁판을 걸고, 맞추는 과녁에 따라 북치는 횟수와 깃발을 들어 다르게 알리는 것으로 맞추지 못하면 징을 쳐서 신호한다. 이는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한 것이므로 부정기적으로 베풀어졌으며 화려한 것이 그 특징이다.

  5. 친림시사의: 전시나 정시에 왕이 직접 나아가서 활 쏘는 모습을 참관하고 문사와 무사를 선발하였던 의식이다. 쇠붙이로 만든 화살을 사용하였으며, 북을 울리고 응시자의 이름을 부르면 화살을 다 쏜 다음 적중한 개수를 큰 소리로 아뢰었다. 풍악이 없으며 힘의 기량을 평가하는 의식이다. 1692년 (숙종 18) 3월 춘당대의 시사에서 신이익(愼爾益) 등 6인을 뽑았으며, 속종조에는 여러 번 춘당대에서 무과를 시행하였다.

  6. 친림융무당문신삭시사의: 매월 초하루에 융무당에서 열리는 문신의 시사의식이다. 이는 문신들의 무예 단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문신들의 덕행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7. 친림연륭대시사의: 왕과 모든 백관들이 모두 융복과 우립(羽笠: 깃달린 모자)으로 연륭대에 나아가서 무예를 익혔던 의식이다.

  8. 대열의: 열병의식을 끝내고 진법을 조련하는 의식이다. 열병 하루 전날, 왕은 임시로 마련한 열병장 근처의 임시 전각에서 하루를 지내고, 그 날 갑옷을 입고 교장에 나아가서 각 영을 지휘하고 진법을 조련하며, 끝난 다음에 모든 것을 평하고 포상과 벌칙을 내렸다.

이 의식은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어 1426년(세종 8)에는 전곶(箭串: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대열의를 시행하였다. 1450년에 세종은 유신(儒臣)을 명해 『동국병감』을 짓게 하고, 또한 오위친제진법(五衛親製陣法) 9편과 용겁승패지세(勇怯勝敗之勢) 28법으로 병사를 조련시키고, 수시로 친히 열병하여 각 군영의 병기를 통합하고 더욱 정예화시켰다.

1457년(세조 2) 8월 세조는 전곶에서 열병이 끝난 다음 호궤연(犒饋宴: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잔치)을 베풀고, 1459년에는 교외에서 대열을 시행했으며, 1464년에는 경회루에서 처음으로 삼갑전법(三甲戰法)을 익혔다. 삼갑전법은 백병전으로, 갑·을·병이 번갈아 추격하는 전법이다.

1467년에는 군제를 개편하고, 1489년성종은 지휘와 신호의 방법을 새로 세웠다. 1534년(중종 29)에는 칠덕정에서, 1536년 11월에는 전곶에서 대열을 시행했고, 1624년(인조 2)에는 모화관에서 열병 후 호궤연을 베풀었으며, 1629년에는 2천인의 열병의식을 가졌다. 1654년(효종 5)에는 노량에서, 다음 해에도 노량에서 1만 3000인을 열병하였다. 1691년에는 사아리(沙阿里)에서, 1778년(정조 2)에는 노량에서 각각 열병식을 가졌다.

  1. 친림춘당대호궤의: 춘당대의 열병을 참관한 다음에 군사를 위로하는 의식이다.

  2. 친림호궤의: 왕이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는 의식으로서 춘당대 호궤의보다 훨씬 장엄하다.

  3. 강무의: 수렵을 통하여 무예를 단련하고 포획한 짐승을 종묘에 제사하며, 백관에게 잔치를 베푸는 의식이다. 대군(大君) 이하 종친 및 백관은 임금을 따라서 사냥한다. 그러나 잔혹한 사냥과 남획을 금한다. 수렵이 끝나면 잔치를 열고 종사 관원을 대접하였다. 1415년(태종 15)에 해주의 강무장을 농토로 바꾸었고, 1467년(세조 12)에는 응방(鷹坊)을 없앴다.

  4. 성조의: 실전과 같은 가상적인 적의 습격에 대비한 수비와 공격의 훈련의식이다. 행전 앞에서 분열을 마친 뒤, 각 우두머리의 지휘에 따라 매복하고 성문을 닫는다. 매복한 병사가 대포와 횃불로 적의 내침을 알리면 왕은 적을 물리칠 것을 명한다. 적이 갑자기 나타나면 천아성(天鵝聲: 군사를 급히 불러 모으기 위하여 불던 나발)을 불어 신호하고, 이어서 적을 격퇴시킨다. 적을 격퇴한 다음 성문을 열고 복병을 철수시킨다.

  5. 야조의: 성조의 의식과 같지만 밤에 이루어진다. 밤에 이루어지므로 불빛을 신호로 한다.

  6. 용주도섭의: 배를 이용한 도강훈련의 일종이다. 왕이 선창에 이르러 용주(龍舟: 임금이 타는 배)에 오르면, 5방에 5색 깃발을 세우고 모든 장수의 배는 사방에서 호위를 맡아서 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의식이다.

  7. 헌괵의와 노포: 싸움터에 나아가서 승리하고 개선한 장수는 적의 머리나 귀를 임금에게 바치고, 승전의 사실을 기록한 노포를 세워 널리 알리는 의식이다. 1624년 2월에 이괄을 토벌한 다음 공주의 행재소에서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제정한 의식절차에 따라, 인조는 융복을 입고 임시로 마련한 행재소에서 나아가고, 문무백관들은 내외로 나누어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노포를 갖추고 진문 밖에서 이괄의 머리를 바치니 선전관이 이를 받아 인조에게 드렸다.

1728년(영조 4) 3월에 청주를 습격하였던 역도(逆徒) 권서봉(權瑞鳳)·이인좌(李麟佐) 등을 토벌한 다음, 돈화문에서 헌괵의를 행하고, 또 다음 달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이 괴수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나숭곤(羅崇坤)을 평정하고 개선하여 숭례문에서 헌괵의를 시행하였다. 오명항이 세 사람의 목을 올리니 영조는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승리의 취타(吹打)를 울리게 하였다. 이 의식은 자주 실행되지 않았던 이유로 고증과 격식이 부족하게 되자, 1744년영조의 명에 의해 의식의 항목을 더 보충하고 『국조속오례의』에 보충하였다.

  1. 구일식의: 구일식의는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의식과 비슷하다. 일식이 시작하기 5각(1각은 15분) 전에 시위하는 군사는 근정전 문밖에 정립하고, 3각 전에 모든 장수와 사금(司禁)은 필요한 기구를 갖추고 일식을 살피다가, 1각 전에 왕을 근정전으로 모시고 태양을 향해 앉게 한다. 관상감이 일식을 알리면 관리는 향불을 피우고 북을 두드리다가 일식이 끝나면 멈춘다. 1429년 8월세종은 근정전에서 구일식의를 행했고, 영조 이후로부터는 천담복(淺淡服: 엷은 옥색의 祭服)으로 바꾸어 입고 행하였다.

  2. 친림구일식의: 일식의보다 더 자세하고 정성껏 행하는 것이다.

  3. 구월식의: 구일식의와 비슷하다. 다만 징을 쳐서 의식을 진행하는데 북은 태양을, 징은 달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4. 계동대나의: 고려시대에 있었던 계동대나의와 비슷하다. 전염병이나 액귀를 쫓기 위한 초라니를 등장시키는 의식이다. 복장과 인원수는 고려의 의식과 같고, 사대문을 향해 횃불을 들고 행진하면서 악기를 울리며 고함을 지른다. 이들이 4대문을 나오면 재랑(齋郎: 제관)은 수탉을 죽여 제사를 올리고 구덩이에 묻는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조 중엽 이후로는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국조속오례의』에서는 “오늘날은 행하여지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5. 향사의(鄕射儀):활쏘기 대회의식이다. 매년 3월 3일에 거국적으로 실시되었으며, 개성을 비롯하여 도·주·부·군·현에서 향음주례와 함께 시행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조 중엽 이후부터는 폐지되고 대사의에 속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밝힌 조선조 군례의식은 모두 문덕(文德)을 함양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왕은 연륭대시사의에만 융복(戎服: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을 입고 참관했고, 나머지 의식은 거의 익선관(翼蟬冠: 임금이 평복때 쓰던 관)과 곤룡포(袞龍袍: 임금의 정복)의 차림이었다. 이것은 군대의식을 하나의 예절로 여긴 때문이었다. 비록 이 의식은 후기에 많은 병란을 겪으면서 점차 전쟁의식으로 바뀌었지만, 헌괵의와 노포의는 자주 시행할 수 없었고, 영조 이후로는 한 번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은 군례의 의식은 오늘날도 그 모습과 용어들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국가를 방어하고 외적을 막기 위한 기본 임무는 같은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대전회통(大典會通)』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춘관통고(春官通考)』
『삼봉집(三峰集)』
『주례(周禮)』
『예기(禮記)』
『논어(論語)』
『구당서(舊唐書)』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