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국가나 군대, 그밖의 여러 단체나 시설, 혹은 선박 등의 표장(標章)으로 사용되는 특별한 천으로, 일반적으로 정해진 형태·도안·색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보통 장방형으로, 그 한쪽을 깃대 따위의 막대에 매달아 높이 들어올리거나 때로는 벽면 같은 곳에 붙여서 걸치기도 한다.
기는 원래 종교의식에서 위의를 갖추거나 전쟁에서 아군과 적군의 식별, 부대 편성 등 주로 의례와 군사적인 목적에 쓰였으나, 지금은 그런 목적 외에 신호·장식·축제·행렬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기는 표지성(標識性)이 가장 큰 기능이므로 쉽게 눈에 뜨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천은 가벼워서 잘 펄럭이어야 하고, 높이 매달 필요가 있다. 또, 기호나 도안은 기의 양면이 같아야 하고, 일반적으로 글자보다는 단순한 도안이 많이 쓰인다.
기를 매다는 막대를 깃대[旗竿]라 하고, 군대에서는 창 끝에 기를 달기도 하는데, 그 창을 기창(旗槍)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교기(校旗)나 단체기 등의 깃대 끝을 창 끝 모양으로 하는 것은 옛날의 기창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한자에서 기를 나타내는 ‘기(旗)’나 ‘정(旌)’ 따위 글자의 뜻부분인 ‘{{#145}}’의 자원(字源)은 ‘{{#070}}’와 같이 세가닥창[三支槍]내에 기가 휘날리는 것을 상형했으니, 여기에서도 기가 군사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깃대의 끝에 달아서 위의를 나타내는 부분을 깃봉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깃봉은 원래 불교계통의 영향인 듯 끝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연꽃 모양을 많이 썼으나, 현재 우리 국기의 깃봉은 금빛 무궁화봉오리 모양을 쓰도록 되어 있다.
기폭 끝에 딴 천으로 갈개발을 덧단 것을 깃발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기폭을 깃발이라 하기도 한다. 광대놀이에서 솟대라는, 곧추 세운 장대에 한 손과 한 발로 의지하고 사지를 쫙 펼쳐 보이는 것을 깃발붙이기라고 한다. 옛날 군대에서 기를 드는 사람을 기수(旗手) 또는 기관(旗官)이라 하고, 군기에 관한 일을 보던 무관을 기패관(旗牌官)이라고 하였다.
기는 ‘어떤’ 뜻을 나타낸다. 이것이 기의 주요 기능 가운데의 하나인 상징성이다. 의견이 분분할 때 자기 편의 태도를 확실히 밝히면 ‘기치가 선명하다. ’고 한다.
이와 같이 기는 드러내 보일 때와 뉘어서 숨길 때와는 그 상징하는 뜻이 달라진다. 군대가 진격해서 고지를 점령하면 맨 먼저 자기편의 기를 꽂는다. 그러면 한쪽은 사기가 충천하고 한쪽은 풀이 죽는다.
6·25전쟁 때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이 맨 먼저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는 광경을 보고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의 나제전(羅濟戰)에도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 너머에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백제 왕자 태(泰)는 매우 급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군기(軍旗)가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을 보여준다.
또, 기는 정복을 상징한다. 탐험가나 등산가들이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면 거기에 자기 나라 국기를 꽂아 정복을 표시한다.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의 우주인들이 성조기를 꽂고 돌아온 것도 같은 보기이다.
기는 신호로 쓰이기도 한다. 전쟁에서의 백기는 평화 또는 항복을 뜻하고, 철도에서 푸른 기를 흔들면 기차가 진행하고 붉은 기를 흔들면 정지한다. 적십자기는 의료기관을 상징하므로 전쟁에서도 그 표지가 있는 곳은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 전쟁에서 적을 협공할 때 맞은편의 아군과 기로써 신호를 하였다. 이때 쌍방이 미리 정한 방법에 따라 여러 개의 기를 차례로 사용하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도 서로 전달할 수 있었다. 또, 옛날 지휘관은 자신의 지위와 책무를 쓴 기를 높이 세우고, 손에도 수기를 들어 위의를 표시하며, 이것을 휘둘러 군대를 지휘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손에 든 학털 부채는 군사(軍師)를 상징하는 수기의 구실을 하였고, 우리 농악대가 전립(戰笠) 끝에서 돌리는 상모도 지휘용 수기와 같은 구실을 하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위용은 방위에 따라 오색기를 휘날리며 여러 개의 북을 둥둥 울리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병서(兵書)에도 “정정한 기는 맞서 싸우지 말며, 당당한 기는 치지 말라.”고 하였다. 군대의 진용과 사기는 깃발로써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라는 시조에서도 장백산에서 휘날리는 깃발로 김종서(金宗瑞)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성을 수비하며 조련할 때의 예를 보면, 낮전투에서 정문을 닫고 쉬게 할 때는 숙정패(肅靜牌)를 내걸고 표미기(豹尾旗)를 세운 뒤 휴식호령을 내리게 되어 있고, 밤조련에서는 방위에 따라 고초기(高招旗)의 색깔을 달리하여 세우면 그 색깔에 해당되는 대열이 출동하게 되어 있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 정유(丁酉) 9월 16일조의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장수 하나가 물러나 저만큼 간 것을 보고, 곧장 회선하여 그부터 목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나의 배가 돌아서면 여러 배가 동요될 듯하여 중군에게 휘(麾:군령을 내리는 기)와 초요기(招搖旗:장수를 부르며 지휘 호령하는 기)를 세우게 하니 그들의 배가 돌쳐서 왔다.”는 대목이 있어 해전에서 군기의 쓰임새가 실감 있게 표현되고 있다.
어선에서는 풍어가 되면 오색천을 길게 달아 나부끼게 함으로써 용왕에게 감사하고 기쁨을 나타낸다. 무당이 굿할 때에는 색깔을 갖춘 여러 개의 기 가운데에서 하나를 뽑게 하여 그 기의 빛깔로 사람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는데, 붉은색의 기를 뽑으면 운세가 왕성하고 노란색의 기를 뽑으면 운세가 시든다는 등으로 해석을 한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만국기를 다는 것은 축제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기의 상징성은 우리 생활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국가적 의례행렬인 노부(鹵簿)에는 군기까지 포함하여 온갖 기가 대규모로 사용되기 때문에 노부에 사용된 의장기를 중심으로 기의 상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의장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문양이다. 이들 문양은 군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선정은 전통적 사상과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므로 자연히 의장기는 그 시대성과 사회성을 잘 보여준다.
의장기에 쓰인 상징물은 하늘·해·달·산 등의 자연물, 용·봉·호랑이·거북 등의 동물 외에 천상(天象)·신인(神人) 등 다양하다. 이것은 시대와 사회의 변천에 따라 형태·내용·색채에 변화를 보이면서 점차 양식화·도식화 되어갔다.
① 동물문(動物紋):기치 문양의 대부분은 동물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유목생활을 한 우리 민족의 특성과도 일치한다. 우리 고대신화 속의 동물숭배 사상과 신성한 동물이 많이 쓰인 동물문 기치와는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 용문(龍紋)에는 홍문대기(紅門大旗)·황룡기(黃龍旗)·교룡기(交龍旗)·감우기(甘雨旗) 등이 있다. 용은 예로부터 무궁한 조화 능력을 갖춘 초월적인 동물로 여겨졌으므로, 자연스럽게 천자나 군왕을 상징하게 되었다.
㉡ 호문(虎紋)에는 문기(門旗) 등이 있다. 민화 속에 나타난 호랑이무늬는 12지(支)의 인도(寅圖)와 사신(四神)의 백호도(白虎圖)가 있다. 방위로서 12지의 인은 동방의 상징이며, 사신의 백호는 서방의 상징인데 삼국시대의 사신도에서 이미 서방의 방위신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의 민화 속에 표현된 호랑이무늬는 민간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 귀문(龜紋)에는 현무기(玄武旗)·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등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거북과 뱀이 서로 휘감아 얽힌 것을 현무라고 하여 장수를 상징하는 길상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 봉문(鳳紋)에는 주작기(朱雀旗)·적봉기(赤鳳旗)·상란기(翔鸞旗) 등이 있다. 봉새는 봉황새 가운데 수컷인데 조류의 왕으로서 초능력으로 세상의 치란을 미리 알아 밝고 어진 임금이 나타나면 그 모습을 보인다는 서조(瑞鳥)이다. 역시 군왕을 상징한다.
㉤ 12지문(十二支紋)에는 정축기(丁丑旗)·정묘기(丁卯旗)·정사기(丁巳旗)·정미기(丁未旗)·정해기(丁亥旗)·정유기(丁酉旗) 등의 육정기(六丁旗)가 있다. 12지는 동양의 역학에서 지지(地支)의 열두 갈래인데, 각각 동물로 상징되어 달을 나타내기도 하고 방위나 오행을 나타내기도 한다.
육정기에는 축(소·12월·중앙·토)·묘(토끼·2월·동방·목)·사(뱀·4월·남방·화)·미(염소·6월·중앙·토)·해(돼지·8월·북방·수)·유(닭·10월·서방·금) 등 짝수의 달을 나타내는 지지가 쓰인다.
㉥ 기린문(麒麟紋)에는 기린기·유린기(遊麟旗)·각단기(角0x939D旗) 등이 있다. 기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동물로서 어진 임금이 나타나면 모습을 보여 이상적인 평화시대를 상징한다.
㉦ 마문(馬紋)에는 삼각기(三角旗)·천마기(天馬旗)·용마기(龍馬旗) 등이 있다. 천마는 하늘을 날아 천록(天祿)과 벽사(辟邪) 등을 상징한다는, 도가(道家)에서 나온 상상적 동물이다. 특히, 태양과 관계가 있다는 천마의 신화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에 걸쳐 넓게 전해졌다.
㉧ 웅문(熊紋)에는 황웅기(黃熊旗)·적웅기(赤熊旗) 등이 있다. 곰은 우리 고대신화에서 매우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단군신화에서는 웅녀가 사람으로 화(化)해서 단군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 백택문(白澤紋)에는 백택기 등이 있다. 백택은 중국 고대의 상상적 인수(人獸)의 하나인데, 사람의 말을 하고 만물의 모든 뜻을 알아내며, 유덕한 임금이 나타나면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다.
㉩ 사자문(獅子紋)에는 치사기(馳獅旗) 등이 있다. 사자는 서방에서 들어와 천록이나 벽사를 상징한다.
㉪ 학문(鶴紋)에는 백학기·현학기(玄鶴旗) 등이 있다. 학은 길상(吉祥)을 상징한다.
② 사신문(四神紋):주작기(朱雀旗)·현무기(玄武旗)·청룡기(靑龍旗)·백호기(白虎旗)의 네가지가 있다. 고구려벽화의 사신도를 비롯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말엽까지 4방위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왕의 노부에 적극 사용되었고, 풍수지리 등 역학과 관계가 깊다.
③ 천상문(天象紋):해와 달은 하늘에서 음양을 다스리고, 별들은 지상의 만물에 작용한다고 믿었으므로 일월성신은 천·인·지(天人地)를 연결하는 신성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 또한 천명을 받아 지상을 다스리는 왕권의 상징으로서 기의 문양에 많이 쓰였다.
㉠ 28수기(二十八宿旗)는 각·항·저·방·심·미·기·두·우·여·허·위·실·벽·규·누·위·묘·필·자·삼·정·귀·유·성·장·익·진(角·亢·氐·房·心·尾·箕·斗·牛·女·虛·危·室·壁·奎·婁·胃·昴·畢·觜·參·井·鬼·柳·星·張·翼·軫)의 28가지인데, 기의 이름은 ‘각성기(角星旗)’ 따위와 같이 부른다.
㉡ 일월기(日月旗) 등은 일기(日旗)·월기(月旗)·북두칠성기·오성기(五星旗) 등이 있다.
㉢ 태극문 또는 인봉문(人封紋)은 좌독기(坐瀆旗)·어기(御旗)·고초기(高招旗)·팔풍기(八風旗) 등이 있다. 태극은 역학에서 우주만물이 생긴 근원적 본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런 인식은 동양철학의 뿌리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였으니, 우리 국기의 문양 외에도 대문과 여인의 의상 및 북과 심지어 부채에까지 그려졌다.
㉣ 산수문(山水紋)은 오악기(五嶽旗)·사독기(四瀆旗) 등이 있다. 고대의 민간신앙에서 산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신성한 곳이며, 내[川]는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온 것이기에 문양으로까지 쓰이게 된 것이다.
㉤ 신인문(神人紋)은 동물문 가운데에서도 귀문과 관련 있는 가귀선인기 따위이다. 신선은 속세를 떠나 천상계에서 산다는 인식에서, 천상은 곧 하늘이요 군왕은 곧 하늘이 보낸 사람이므로, 신인문은 왕의 상징으로 노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 부적문(符籍紋)은 12지문의 6정기(六丁旗)가 그 예인데, 부적을 쓰면 재앙을 멀리하고 길상을 부른다는 민간신앙의 표현이다.
이상과 같이 노부에 사용된 의장기의 상징은 고대인의 토속적 민간신앙이 바탕이 되고, 그것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천되면서 동양철학 내지는 전통적 관념이 어울려 고유한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기’라고 하는 것은 한자의 ‘旗’인데, 한자에서 기를 나타내는 글자는 그밖에도 ‘치(幟)·정(旌)·당(幢)·번(幡)’ 등 다양하다. 이것들은 자원(字源)으로서는 각각 구분되는 것이지만, ‘정기(旌旗)·기치(旗幟)·당번(幢幡)’ 등과 같이 묶어서 부르기도 한다.
본래 중국에서의 ‘기’는 좌우가 좁고 상하가 길며, 깃대에 매는 부분만을 제외한 삼면에 제비꼬리[燕尾]모양의 술을 단 모양인데, 기폭에 곰과 호랑이를 위아래로 그린 붉은 색으로 장수의 위엄을 상징한 것이었다.
‘치’는 길이가 장오척(丈五尺)에 너비가 반폭이라 하여 기의 경우와는 반대로 폭이 좁고 길이가 길어 바람에 길게 나부끼도록 만든 것이었다.
‘정’과 ‘당’은 ‘기’보다 위아래가 훨씬 긴 것인데, 깃대의 끝을 휘어서 매달게 된다. 이 가운데 정은 천자가 군사의 사기를 돋우는 데 쓰이고, 당은 부처나 보살의 위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사(佛事)를 열 때 달았다.
지금도 일부의 전통사찰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을 다는 깃대를 고정시킨 장치이다. ‘번’은 당과 가깝다.
유럽에서는 기를 다섯 가지쯤으로 나누는데, 스탠더드(standard)·버너(banner)·엔사인(ensign)·페논(pennon)·페난트(pennant)가 그것이다.
스탠더드는 왕실기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가장 대형이어서 들고 다니지는 못하고 왕궁 등 일정한 곳에 게양된다. 본래는 가로가 길고 기의 바깥쪽을 향해서 좁아지다가 끝이 두 갈래로 쪼개진 형태였는데, 뒤에 장방형 또는 정방형이 되었다.
버너는 전투할 때 왕후와 기사들이 휴대하던 작은 기로 형태는 역시 장방형 또는 정방형이다.
엔사인은 군기, 특히 군함기를 가리키며, 페논은 삼각형의 작은 기로 기사들이 창 끝에 달아 사고 방지 및 위세 과시용으로 썼다.
페난트는 펜단트(pendant)라고도 하며, 옆으로 긴 삼각형이고 끝이 제비초리 모양으로 둘로 쪼개졌다. 이것은 크게 만들어 배의 표지기로 쓰기도 하였으나, 뒤에는 우승기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고, 지금은 아주 소형화되어 어떤 행사 따위의 기념기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기는 보통 그 모양과 목적·용도에 따라서 분류된다. 모양으로 분류하면 특히 세로로 긴 종장대기(縱長大旗), 특히 가로로 긴 횡장대기(橫長大旗), 네모 반듯한 정방기, 가로로 약간 긴 장방기, 세모꼴의 삼각기, 세모이지만 가로가 긴 장삼각기, 기의 끝이 제비초리처럼 두쪽으로 갈라진 연미기(燕尾旗)가 있다. 이 연미기는 장방연미기와 장삼각연미기가 있다.
목적 용도에 따라서 분류하면 상징기·군기·의장기와 기타로 대별된다. 상징기의 대표적인 것은 국기이고, 유엔기나 학교의 교기, 회사의 사기, 단체기 등도 모두 상징기로 분류된다.
기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군기인데, 이 군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기의 기원이기도 하였다. 군기에는 대장기와 같이 위엄을 나타내는 게 있는가 하면, 초요기와 같이 명령을 전달하는 신호로 쓰는 것도 있었다. 이 군기는 갈래도 많고 용도도 다양하다.
기 중에서 갈래가 많고 화려하기는 의장기가 으뜸이다. 의장기에는 앞에서 살펴본 노부기 외에도 무속(巫俗)이나 음악연주 때 세우는 기,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 쓴 농기 따위도 넓은 의미의 의장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축제 기분을 돋우기 위하여 운동회나 박람회 때 다는 만국기,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배의 돛줄에 다는 풍어기나 만선기 등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우리 나라에서 기가 사용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되는 일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물증이나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안악(安嶽)3호분의 행렬도와 같은 고구려 벽화에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의식물과 의장기(군기)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낸 실례가 있다.
거기 사용된 기는 긴 기[長幅旗], 톱니 모양의 기[鋸齒形旗], 네모꼴의 기[長方旗], 영자기 모양의 작은 기[令旗型小旗] 등인데, 이것들로 미뤄볼 때 삼국시대의 기는 아직 일정한 틀이 잡히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씩씩한 기상을 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라 때 백제와의 싸움에서 소정방이 군기를 사용한 예는 위에서 보았거니와, 최치원(崔致遠)의 <오기시 五技詩> 가운데 월전(月顚)이라는 탈춤을 읊은 데서 ‘기치’란 말을 쓰고 있어, 당시에도 무희(舞戱)에서 깃발이 쓰였던 것은 알 수 있으나 그 모양은 밝혀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의 권2 <가락국기>나 권3 <금관성파사석탑 金官城婆娑石塔>의 기록에 보이는 허왕후(許王后) 도래장면에는 허왕후가 탄 배가 붉은 돛과 붉은 기를 달았다는 좀더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와 ≪고려도경≫ 등 문헌에 제도화된 기의 종류 및 사용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인종 때의 고려 문물을 적은 ≪고려도경≫의 기치조에는 불과 7종의 기가 소개되어 있을 뿐인데, 의종의 거둥행렬인 <법가노부 法駕鹵簿>에 나타난 기치가 30여 종에 이른 것을 보면 그 사이에 기치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같이 보인다.
이때 우리의 고유색이 짙었을 삼국시대의 기에 중국의 제도가 참작, 혼합되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소개된 기는 상기(象旗)·응준기(鷹隼旗)·해마기(海馬旗)·봉기(鳳旗)·태백기(太白旗)·오방기(五方旗)·소기(小旗) 등의 7종이고 ≪고려사≫ 여복지에 나오는 기는 홍문대기(紅門大旗)·백룡대기(白龍大旗)·좌우용기·오방룡중기(五方龍中旗)·적룡대기·청룡중기·황룡대기·황룡부도기(黃龍負圖旗)·신룡함주기(神龍含珠旗)·오색용기·백상기(白象旗)·백상대기·기린기·백기린기·황기린중기·황사자기·적사자기·흑사자기·백사자기·청사자기·금계기(金鷄旗)·현학기(玄鶴旗)·백학기·적표기(赤豹旗)·신귀함주기(神龜含珠旗)·각단기·삼각수기(三角獸旗)·일각수기(一角獸旗)·용마대기·용마기·추아기(騶牙旗)·백택기·백택대기·해치기(獬豸旗)·천록기(天鹿旗)·벽사도기(辟邪圖旗)·현주기·공작대기·공작기·주작중기(朱雀中旗)·봉기·벽봉대기(碧鳳大旗)·난대기(鸞大旗)·난기·악작기(鸑鷟旗)·좌우서왕모대기(左右西王母大旗)·가운집박인대기(駕雲執拍人大旗)·보주선인대기(寶珠仙人大旗)·여의주선인대기·쌍무선인대기·가운취적선인대기(駕雲吹笛仙人大旗)·호인기(胡人旗)·채기(彩旗)·천하태평대기·사해영청대기(四海永淸大旗)·이의교태대기(二儀交泰大旗)·보주기·화주기(火珠旗)·군왕만세중기·흑기(黑旗)·흑대기·주잡기(周匝旗) 등 61종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기치를 이어받으면서도 중복되고 복잡한 것을 좀더 간결하게 정비하는 대신에 용도가 세분되었다. 조선시대의 기치를 의장기와 군기로 나누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의장기:의장기는 왕·왕비·왕세자·왕세손 등의 경우에 따라 구별되고, 왕의 거둥에 있어서도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 대가 거둥 때에는 홍문대기·교룡기·주작기·천하태평기·군왕천세기·백호기·청룡기·현무기·육정기·백택기·삼각기·각단기·용마기·현학기·가귀선인기·벽봉기·금자기(金字旗)·고자기(鼓字旗)·영자기(令字旗)·후전대기(後殿大旗) 등이다.
㉡ 법가 거둥 때에는 홍문대기·교룡기·황룡기·군왕천세기·주작기·백호기·청룡기·현무기·백택기·삼각기·각단기·용마기·현학기·백학기·영자기·고자기·가귀선인기·벽봉기·후전대기 등이다.
㉢ 소가 거둥 때에는 교룡기·주작기·청룡기·백호기·현무기·삼각기·벽봉기·각단기·용마기·현학기·백학기·영자기·금자기·고자기 등이다.
㉣ 왕비의 거둥 때는 백택기이다.
㉤ 왕세자의 거둥 때는 기린기·백택기·현학기·백학기·가귀선인기 등이다.
㉥ 왕세손의 거둥 때는 기린기·영자기이다.
㉦ 인정전의 정지(正至:정월 초하루와 동지) 및 탄일 조하지도(誕日朝賀之圖)에 나타난 의장기는 현무기·후전대기·벽봉기·가귀선인기·천하태평기·황룡기·주작기·고자기·영자기·금자기·홍문대기·청룡기·육정기·백택기·삼각기·각단기·용마기·현학기·백호기·백학기 등이다.
㉧ 황의장(黃儀仗)의 기는 백택기·정유기·정사기·정묘기·정미기·벽봉기·주작기·황룡기 등이다.
㉨ 기우제 때에는 주작기·청룡기·백호기·현무기·삼각기·각단기·고자기·금자기 등이다. 그밖에도 인정문 조참지도(仁政門朝參之圖) 등의 의장이 더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② 군기:군기는 글자 그대로 군대에서 쓰는 기인데, 넓은 의미로는 의장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고, 의장기가 그대로 군기로 쓰인 것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미를 좁혀서 따로 분류하고, 군기를 열거해보면, 교룡기·대열기(大閱旗)·신기(信旗)·홍순시기(紅巡視旗)·홍령기(紅令旗)·좌독기(坐纛旗)·사명기(司命旗)·수자기(帥字旗)·주작기·청룡기·등사기(騰蛇旗)·백호기·현무기·홍신기(紅神旗)·남신기(藍神旗)·황신기·백신기·흑신기·고초기·문기·각기(角旗)·청도기(淸道旗)·금고기(金鼓旗)·표미기(豹尾旗)·당보기(幢報旗)·순시기·영기·영전(令箭)·관이전(貫耳箭)·본병수기(本兵手旗)·금군별장수기·금군장수기·금군별장인기(禁軍別將認旗)·금군청호령기·금군장인기·금군정기(禁軍正旗)·금군영기(禁軍領旗)·영장수기(營將手旗))·중군수기·별장천총수기(別將千摠手旗)·파총초관수기(把摠哨官手旗)·영장인기·별장인기·천총인기·마총인기·초관인기·기총기(旗摠旗)·대장기(隊長旗)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무예청인기·좌우문기·가전기(駕前旗)·가후기·난후별대기(攔後別隊旗)·가전패두기(駕前牌頭旗)·가후패두기·후별대기총기(後別隊旗摠旗)·대총기(隊摠旗) 등이 있으나, 이것들은 순수한 군기라기보다는 가마나 수레를 호위하는 의장군이 쓰던 의장기의 성격이 더 큰 것같이 보인다.
고종시대의 의장기는 성문(星紋) 등 천상(天象)을 나타낸 것이 많아진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옛날부터 전승된 우리 민족의 토속적 신앙의 발현이라기보다 기울어가는 국위를 진작시키고자 한 의도적 현상으로 짐작된다.
대한제국시대에 사용된 의장기는 다음과 같다.
취화기(翠華旗)·감우기(甘雨旗)·출경기(出警旗)·황룡대독(黃龍大纛)·오운기(五雲旗)·팔필기(八蹕旗)·의봉기(儀鳳旗)·운학기(雲鶴旗)·순사기(馴獅旗)·상란기(翔鸞旗)·유린기(遊麟旗)·벽사기(辟邪旗)·천마기·화충기(華蟲旗)·명대기(鳴○旗)·적조기(赤鳥旗)·진로기(振鷺旗)·공작기·황곡기(黃鵠旗)·적웅기(赤熊旗)·서우기(犀牛旗)·백치기(白雉旗)·황비기(黃羆旗)·천록기(天鹿旗)·오뢰기(五雷旗)·각단기·문기·백택기·팔풍기(八風旗)·청룡기·백호기·현무기·오악기(五嶽旗)·주작기·사독기·오성기·일기·금고기(金鼓旗)·각성기·월기·오색금룡소기·항성기·저성기·심성기·기성기·방성기·미성기·두성기·우성기·허성기·실성기·여성기·위성기(危星旗)·벽성기·규성기·위성기(胃星旗)·필성기·누성기·묘성기·자성기·삼성기·성성기·정성기·유성기·장성기·익성기·청소기(靑素旗)·청도기(淸道旗)·진성기·영기·오색기 등이다.
19세기 말엽에 모든 문물제도가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국기와 황제의 어기(御旗)도 있어야 했고, 군대에서는 새로운 군기를 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기에 대해서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1880년 8월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이라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당시 주일 청국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황준헌(黃遵憲)이라는 이가 지어서 증정한 것인데, 그 가운데 “조선이 하루 빨리 외교의 길을 트고 해륙의 제군(諸軍)은 중국의 기를 그냥 쓰면 좋겠다.”고 언급한 것이 그것으로, 여기서 ‘중국의 기’라는 것은 곧 청국의 국기를 말한 것이었다.
태극기의 도안이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882년 조미조약(朝美條約)의 체결을 주선하기 위하여 온 청국사신 마건충(馬建忠)과 김홍집의 회담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백색바탕 중앙에 반홍반흑(半紅半黑)의 태극을 그리고, 그밖에 8괘를 배치하며 주위를 붉은색으로 두른다는 안이 나왔던 것이다.
8괘는 그 자체가 심오한 뜻이 있을 뿐 아니라 조선 8도를 아울러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도안은 조선 정부에서 논의한 끝에 반홍반청으로 태극의 색채가 수정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4개월 뒤인 그 해 8월 수신사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으로 향할 때 탔던 영국선 선장의 권고에 따라 8괘를 4괘로 고쳐 그려서 처음으로 공식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태극기는 1883년 정식으로 전국에 반포되어 국기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상당기간 8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무슨 의식같은 데에서 두 폭의 태극기를 교차시켜 무대 정면을 장식할 경우, 하나는 4괘로 된 정식 국기를 쓰고, 하나는 나머지 4괘기를 쓰는 것이 상례로 되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국민의 자각과 일제 침략에 대한 반발로 태극기는 더욱 소중히 여겨지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태극기의 자리에 일장기가 대신 걸렸고 태극기는 그 사용은 물론, 보관하는 것조차 죄가 되어 오직 서울 영천(靈泉)의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를 보면서 울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1일, 전국을 진동시킨 만세소리 가운데 태극기가 한번 물결친 뒤로 장농 밑바닥에 깊이 숨겨져 자취를 감추었고, 오직 해외의 독립투사들에 의해서 명맥이 이어졌다.
외래문물이 들어오면서 많은 신식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들 학교는 휘장과 교기를 정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에는 약장(略章)과 약기가 따로 있어 평소에는 이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 무렵, 국산애용운동의 선전을 위하여 악대가 거리를 누비고 다닐 때 그 행렬에는 으레 각색 깃발이 휘날렸다.
또, 극장에서 새로운 연극이나 영화의 선전 전단을 뿌리는 행렬에서도 깃발이 따랐다. 이러한 행렬의 기는 기폭을 깃대에 가로 매거나 농기처럼 가로대에 드리운 것이 아니라, 깃대 끝에 ○자 모양의 막대를 고정시키고 기폭을 다는, 일본식이었다.
이 무렵 학생들은 수기(手旗)를 흔들면서 학교대항경기같은 데에서 응원가를 불렀다. 이 수기는 교표만 남기고 그 학교 고유색으로 물들인 삼각기였다.
당시 조철호(趙喆鎬)라는 이가 창시한 소년군과 그보다 조금 늦게 1923년에 발족한 기독교청년회 주도의 소년척후대에서는 수기신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붉은 기와 흰 기를 좌우 손에 갈라 쥐고 그것을 가로로 뻗치거나 머리 위로 쳐들거나 하여 한글글씨 모양을 만들어 신호를 보내면 저쪽에서 회답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휴일 서울 근교의 언덕에서는 이런 수기 신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민족지들은 본사의 사옥 지붕 높이에서 사기를 펄럭였고, 지방의 지국에까지 게양하였다. 또, 새로이 등장한 민족 자본의 기업체들도 사기를 제정하여 각기 존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동안 우리 고유의 깃발들은 자취를 감추어, 농사철에도 농기 한 장, 명절에도 걸립기 하나 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사당 문짝에 그려진 태극문양마저 깎아내는 수난 속에서 일어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은 민족의 울분에 잠시나마 통쾌한 청량제가 되었다.
즉,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사진에서 앞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의 광복일은 동시에 태극기가 광복된 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나게 흔들어 광복을 느끼고 감격할 국기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학교에서는 그때까지 걸려 있던 일장기에 파란색 잉크로 태극을 그리고, 또 먹물로 4괘를 그려서 급히 만든 태극기를 달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민속문화의 경우 기는 굿패·걸립패·두레패 그밖의 여러 놀이패들이 행진·의식·노동·놀이를 행할 때 주로 쓰였다. 굿패·걸립패·두레패·놀이패들이 쓰는 기는 그 기원이 신대[神竿]에 있다.
신대는 원래 산 나무로 된 장대[生木竿]에 신을 모시고 굿패들이 의식·행진·놀이를 하던 것으로, 긴 장대에 꿩꼬리로 장목(꿩장목)을 달고 기폭을 단 신기(神旗)로 바뀌어 굿패의 의식에 딸린 놀이에 쓰였다. 뒤에는 굿의식에서 파생된 걸립패·두레패·놀이패 등의 의식 및 놀이에 쓰는 기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굿패들이 서낭당에서 골맥이서낭과 같은 지역 수호신을 모시고 풍악을 울리며 집돌이하거나 굿청[本祭場]으로 행진할 때 서낭대[神竿]나 서낭기[神旗]가 쓰인다.
강릉단오제와 같이 산나무 가지에 서낭옷이라 하여 헝겊을 단 것도 있고,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와 같이 긴 장대 끝에 꿩장목을 달아 종이술을 드리우고, 방울과 기폭 및 긴 무명으로 된 벌줄(버레줄·붓줄)을 단 것도 있다.
영산문호장(靈山文戶長)굿의 서낭대와 같이 긴 장대[竹竿] 끝에 꿩장목이나 산나무 가지를 달고 깃대에 서낭옷이라 하여 오색 무명베를 감고, 깃봉 밑에 오색헝겊을 여러 개 달아 밑에 큰 기폭을 단 것도 있다.
기폭에는 인상(人像)·용상(龍像)·호상(虎像) 등의 신상을 그린 것도 있고, 검은 색으로 방형(方形)을 그린 것도 있으며, 신위(神位)를 쓴 것이라 기명(旗命)을 쓴 것도 있다.
뱃사람들이 정초에 마을에서 대동굿을 할 때 각 배마다 서낭기를 꾸며 들고 풍장을 치며 굿청에 나가 뱃서낭을 받는다. 뱃사공이 개인으로 배연신굿을 할 때에도 서낭기를 앞세우고 풍장을 치며 당에 가서 서낭을 받는다. 뱃서낭을 받은 기는 배에 모시고 일년 내내 고기잡이를 한다.
뱃서낭기는 긴 장대 끝에 짚으로 깃봉을 만들고 긴 기폭을 다는데, 색깔을 오색 가운데 하나로 하되 깃대에 다는 기폭의 동정은 다른 색으로 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가는 오색기를 여러 가닥 단 것이 유행하는데, 이것은 일본색이 짙다고 한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만선이 되면 여기에 봉죽을 꽂는데, 봉죽에 깃발을 단 만선기가 봉기이다. 여기에 서리화라 하여 수많은 가는 대에 종이꽃을 여러 개 달아서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만선이 되면 배에 서낭기와 봉기(서리화)를 꽂고 어부들이 에밀양이라는 배치소리를 노래하며 돌아온다.
김매기두레 때에는 농군들이 풍장을 치면서 농신을 모신 두레기[農旗]를 앞세우고 나가 꽂아놓고, 김을 매고 돌아올 때도 모시고 온다. 두레기는 긴 깃대 끝에 꿩장목을 달고 그 밑에 종이술과 방울, 그리고 무명버렛줄을 3개쯤 달며 긴 기폭을 단다.
기폭은 직접 깃대에 달기도 하고, 용두(龍頭) 새긴 막대기에 달아 양끝을 끈에 매어 깃대에 달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용두 양편에 매듭으로 만든 유소를 드리우기도 한다. 기폭의 가에는 검은 지네발을 달고, 밑에는 긴 깃발을 여러 가닥 단다. 기폭에는 농신 또는 용을 그리거나 신농유업(神農遺業) 등 신위를 쓰는데, 근래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쓰는 경우가 많다.
두레기는 용기·용당기·용둣기·덕석기·대기·농상기 등으로 불리던 것으로 근래에는 농기로 통일되고 있다. 두레패의 농기 앞에는 영기(令旗)가 앞을 이끄는데 영기는 비교적 작은 깃대에 삼지창(三枝槍)으로 깃봉을 달며 정방형 또는 삼각형 기폭을 달고 기폭에 영(令)자를 쓴다. 기폭은 흰색·붉은색·푸른색 등 여러가지가 있다.
두레패들은 그들의 축제인 호미씻이에 두레기들끼리 인사를 하는데, 이것을 기절받기·기세배라 하고, 여기에 기내리기·기쓸기 등 농기놀음이 딸린다. 두레기는 먼저 만든 기에서 헝겊 일부를 받고 그 기의 제작연대를 복사해주는 경우가 많다. 풀베기두레는 두레기를 영기로 대신한다.
굿패들이 마당밟이할 때나 걸립패들이 걸립할 때에는 서낭기에 서낭을 받아들고 다닌다. 이 서낭기는 두레기와 같으나 크기가 작아서 들고 다니기에 편하다. 걸립패서낭기에는 흔히 서낭신의 신위를 쓰기도 하고 산신상을 그리기도 한다.
걸립패는 산신당에서 서낭을 받거나 모갑이 집에서 서낭을 받는데, 절걸립패는 절의 산신각이나 국사각에서 받는다. 신청(神聽)걸립패는 신기를 들고 걸립하는데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전라도걸립패는 영기로 신기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서낭받는다.’는 말 대신에 ‘영받는다.’고 한다. 농악대의 판굿에 쓰이는 기는 걸립패의 기와 다른 점이 없다. 근래에는 영기와 두레패의 농기를 모두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농기는 세워두기만 하고 영기는 때때로 판굿의 진놀이에 쓰는 수가 많다.
마을굿[洞祭]의 굿패에는 신기를 쓰고 줄다리기·쇠머리대기·고싸움놀이 등 놀이패에 쓰이는 기는 영기와 농기를 쓰는 경우가 많으나 오방기(五方旗)·12지신기(十二支神旗) 등 여러 기가 동원된다. 이때 동원되는 여러 가지 기들은 대개 군기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
은산별신제의 행렬에는 대기(大旗)·사명기(司命旗)·24방기(二十四方旗)·음양기(陰陽旗)가 쓰인다. 경상북도 경산의 자인한장군제(慈仁韓將軍祭)의 행렬에는 장산사명기(獐山司命旗)·5방기(五方旗)·나대유풍기(羅代遺風旗) 등 여러 기가 쓰인다.
굿의식에는 신장기(神將旗)·오방기(五方旗) 등 여러 기가 쓰인다. 제주도굿에 쓰이는 기는 ‘기매’라 하는데, 기매에는 좌두기·우두기·큰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큰대는 긴 대나무[竹竿]에 푸른 가지로 깃봉을 만들고, 용 모양의 대통기나 종이깃봉을 단다. 깃대 밑에는 솔잎과 방울을 달고 긴 버리줄을 달았다.
오늘날 각종의 기는 우리 생활 속에 다양하게 자리하여 사용되고 있다. 특히, 운동경기가 성행하면서 기는 승리의 상징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명문이라는 학교에 가면 으레 교장실이나 또는 본관 중앙홀에 여러 개의 우승기가 자랑스럽게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국제회의나 국제경기에는 참가국의 국기가 일제히 게양되고, 회의장 탁자 위에는 각기 자기 나라의 기를 세워 그 나라를 대표한다는 표시를 한다. 국가적인 경축일에는 국기를 달아 기쁨을 표현하고, 외국의 원수가 오면 연도의 시민들이 우리 국기와 손님 나라의 국기를 흔들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
각 지방의 시·도·군에는 도기·시기·군기가 정해져 있고, 학교에는 교기, 회사에는 사기, 단체에도 거의 예외없이 단체기가 있어서 각기 그 조직체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민방위훈련을 할 때에는 녹색기·청색기·황색기 등 깃발로 상황을 표시하고, 측량을 할 때에는 흰 기, 붉은 기로 신호를 하며, 농촌에서 농약을 치고 나면 붉은 기를 꽂아서 위험을 표시한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의 효용성은 대단히 높아 그 예를 모두 들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국기 하강식을 할 때면 길을 가다가도 국기를 향하여 멈추어 서서 예의를 표한다. 이것은 국기가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국기에는 국기의 예절이 있다. 국기의 양식·규격·사용법 등은 법으로 정해져 있으므로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된다.
우리 국기와 외국 국기를 교차시켜 게양할 때도 예법이 있다. 이때 우리 국기를 오른손에, 상대국 국기를 왼손에 잡고, 옷깃을 여미듯 오른손에 잡은 우리 국기가 안쪽으로 가고 왼손에 잡은 상대국 국기가 겉으로 나오도록 포개서 교차시킨다.
환영의 뜻으로 상대국 국기를 길게 드리울 때는 2:3 비율의 정식 기폭에 이어 다시 2:3 비율의 흰 천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국기만이 아니라 교기나 단체기 등도 자기가 소속된 기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의 기에도 응분의 예의를 갖추어 대해야 하는 것은, 그 역시 기가 어떤 학교나 단체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축행사 때 만국기를 다는 것도 아무렇게나 각 국기를 주렁주렁 다는 것이 아니라, 적성국의 기가 끼어들어서도 안 되고, 비록 우리와 수교를 한 국가의 국기라 하더라도 알파벳순으로 달아야 하며, 또 행사 뒤에 찢어진 기들이 운동장에 널려 있어도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