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픽션필름 · 팩츄얼필름 · 리얼리스트필름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주로 문화영화로 불린다.
문화영화라는 용어는 영화사 초기 독일에서 사용되던 쿨투르필름(Kultur Film)을 일본에서 직역하여 쓰던 말로, 현재 이 용어를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으며,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용어는 기록영화이다.
이 용어는 그리어슨이 플라허티의 「모아나(Moana)」(1926)를 뉴욕의 『선(Sun)』(1926.2.)지에 평하는 글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프랑스어인 도퀴망테르(documentaire)에서 유래하였는데, 원래 여행영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어슨은 뒤에 기록영화의 정의를 ‘현실의 창조적 처리’로 내렸다.
그러나 이 정의는 극영화(劇映畫) 이외의 모든 영화를 기록영화로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만족할만한 정의가 못 되었다.
1948년 세계다큐멘터리협회에서 내린 기록영화의 정의는 “기록영화란 실제로 있었던 일의 촬영, 또는 진실하고 합리적인 재구성을 통하여 표현된 현실성을 필름 위에 기록하는 모든 방법을 뜻한다.
이를 위하여 이성과 감성으로 경제 · 문화 · 사회계의 진실한 당면문제와 그 해결책, 그리고 인간지식의 이해와 확장을 묘사한다.”라고 되어 있어 보다 구체적이다.
현대에는 기록영화의 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극영화 수법을 더한 선전영화까지도 기록영화의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최초의 영화는 1919년에 만들어진 「의리적구투(義理的仇鬪)」에 삽입된 옥외 장면의 활극(活劇)을 꼽는다.
이 영화는 단성사(團成社) 사주(社主)인 박승필(朴承弼)이 신극좌(新劇座)의 감독 김도산(金陶山)을 시켜 일본에서 흔히 하듯 신파극(新派劇) 연쇄극(連鎖劇: 한 무대에서 實演과 영화를 섞어 줄거리를 이끌어 가며 상연하는 극)으로서 옥외 장면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박승필은 이와 함께 경성의 풍경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10분)을 촬영하여 「의리적구투」와 함께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그 해 다시 박승필은 경성교의 장면을 담은 「경성교외전경(京城郊外全景)」을 연쇄극 「시우정(是友情)」(10분)과 함께 단성사에서 상영하였다.
그 해에 조선총독부에서는 금강산 일대의 관광명소를 다룬 「금강산대활동(金剛山大活動)」(일명 新興朝鮮, 40분)을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일본 작품의 성향이 짙은 것이었다. 박승필은 고종의 국장 광경을 수록한 뉴스영화 형식의 10분짜리 「고종인산실경(高宗因山實景)」을 만들었다.
영화 탄생 첫해에 연쇄극에 삽입되는 활극이 3편 제작되었는 데 비하여 기록영화는 4편이 제작되었다. 김도산은 조선총독부의 의뢰로 콜레라 예방을 위한 30분짜리 극영화 형식의 계몽영화 「호열자(虎列刺)」를 만들었고, 조선총독부는 3·1운동으로 일본에 대한 국내외 여론이 나빠지자 식민지정책을 옹호하는 선전영화 「조선사정(朝鮮事情)」(20분)을 만들었다.
1923년에는 영화의 틀을 갖춘 최초의 계몽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30분)가 윤백남(尹白南)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체신국의 저축 장려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노름으로 폐인이 된 주인공이 약혼자가 저축한 돈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극영화로 분류하기도 하나,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기록영화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사가 최초의 스포츠영화인 「전선여자정구대회(全鮮女子庭球大會)」(20분)를 제작하였다. 1929년에는 민간기구에 의한 최초의 뉴스영화인 「조선일보뉴우스」(10분)가 조선일보사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이 당시 기록영화의 특징은 단순한 기록물이나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제작되는 계몽물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전쟁 참여를 고취하기 위하여 「승리(勝利)의 뜰」(1940) · 「지원병(志願兵)」(1941) · 「나는 간다」(1942) · 「조선해협(朝鮮海峽)」(1943) · 「젊은 모습」(1943) · 「병정님」(1944) · 「태양의 아이들」(1944) 등의 선전영화를 만들었다.
이 시대에 특기할만한 일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의 문화유적을 담은 이창근(李昌根)의 「신라의 고적(古蹟)」(1942)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하에 윤백남을 본부장으로 하는 조선영화건설본부가 설립되어 뉴스와 극영화를 제작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6·25전쟁 이전까지의 대표적인 기록영화를 보면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자인 서윤복(徐潤福)의 연습과정과 보스턴마라톤대회의 실사장면(實寫場面)을 편집하여 만든 유장산(柳長山)의 「패자(覇者)의 수도(修道)」(1947), 육상경비대를 다룬 「민족의 성벽(城壁)」(1947),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연설과 업적을 다룬 「민족의 절규(絶叫)」, 여순사건을 다룬 「여수순천반란사건(麗水順天叛亂事件)」(1948), 하와이 교포들의 생활상을 담은 안철영(安哲永) 감독의 「무궁화(無窮花)」(1948), 그 밖에 「북한의 실정」(1949), 윤봉춘(尹逢春)의 「무너진 삼팔선」(1949) 등이다.
6·25전쟁 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의의 진격」(1951), 윤봉춘의 「서부전선」, 신경균(申敬均)의 「진격만리」(1953) 등이 있다. 6·25전쟁 이후에는 기록영화의 대부분이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되었으며, 「대한뉴스」는 주간물로 제작되어 각 극장에 배급되었으며 1994년까지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기록영화는 선진 여러 나라에 비하여 제작 물량이나 유형이 다양하지 못하나 유 · 무형의 국가유산을 다룬 영화는 높은 수준에 와 있다. 그 종류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국가의 행사를 주로 다룬 「대한뉴스」계열, ② 국가유산을 다룬 민속영화, ③ 스포츠영화, ④ 국내외 홍보를 위한 정책선전영화, ⑤ 자연 풍경을 담은 관광영화 등이다. 사회문제를 다룬 심각한 기록영화는 거의 없는 편이나, 최근 텔레비전 쪽에서 사회성향의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낙동강」(김행오, 1965) · 「한국의 전통음악」(이정실, 1973) · 「한국」(나한태, 1973) · 「신라고분」(김성인, 1974) · 「한국관광」(이지완, 1974) · 「철새」(유시청, 1975) · 「민속박물관」(김성인, 1977) · 「호국무예」(오대환, 1977) · 「태권도」(이규임, 1980) · 「한복」(박순구, 1980) · 「전통음식」(박순구, 1981) · 「이조자기」(한호기, 1982) · 「한의원」(이광수, 1982) · 「국기태권도」(김성인, 1982) · 「좌선(座禪)」(도선상, 1984) · 「씨름」(김항원, 1984)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