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

과학기술
개념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비, 구름, 바람 등의 모든 자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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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비, 구름, 바람 등의 모든 자연현상.
개설

최근에는 우주기상이라 하여 우주 및 지상의 인간 활동에 영향을 주는 우주공간의 물리현상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기상은 물현상(Hydrometeors)·먼지현상(Lithometeors)·빛현상(Photometeors)·전기현상(Electrometeors)으로 분류한다.

물현상은 대기 중에서 물이나 얼음 입자들이 낙하, 상승 또는 부유하다가 지면이나 지상의 물체에 떨어지거나 떠 있는 현상 등을 말하며, 여기에는 비·안개비·눈·진눈깨비·싸락눈·가루눈·눈보라·동우(凍雨)·우박·안개·이슬·서리·해빙(海氷)·유빙(流氷) 등이 포함된다.

먼지현상은 물이나 얼음입자가 아닌 미세한 고체 입자가 대기 중에 떠있거나 떨어지는 현상으로, 연무(煙霧)·황사(黃砂)·연기·강회(降灰)가 있으며, 강한바람을 동반하는 먼지·모래폭풍이 있다.

빛현상은 햇빛과 달빛이 반사·굴절·회절·간섭 등의 광학작용으로 생기며, 햇무리·달무리·무지개·신기루·아지랑이·노을·코로나·채운(彩雲) 등이 있다.

전기현상은 대기 중에서 발생하는 전기 현상으로서, 번개·천둥·극광(極光, 오로라) 등이 있다. 또한 우주기상의 주요 원인은 태양의 폭발적인 활동이며, 인공위성 장애와 통신교란, 지구의 기온 변화에 영향을 준다.

기상요소로는 기압·기온·습도·이슬점온도·풍향·풍속·운량·시정·강수량·적설·일사량·일조시간·대기복사량·증발량 등이 있으며, 기상의 3대 요소는 기온, 강수량, 바람이다. 최근에는 대기의 화학성분 조성이 달라짐으로 인해서 대기 중에서 이산화탄소, 메탄, 오존, 불화염화탄소(CFCs) 등의 대기 성분도 감시한다.

삼국시대의 기상

우리나라에서 기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권제일(紀異卷第一)」의 ‘고조선(왕검조선)’에 나오는데, 환웅(桓雄)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맡아서 다스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환웅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의 아버지이고, 풍백·우사·운사는 도교적 명칭으로 바람·비·구름을 주관하는 신이나 주술사 등으로 이해된다. 선사시대부터 기상이 큰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기상현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을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여기에는 가뭄·서리·우박·비·눈·큰물·천둥·바람·폭풍·안개·흙비·구름·오로라 등이 있다. 이 기상 기록의 개수는 모두 420건이 넘으며, 천문기록이 210건 이상, 지진기록이 90건이 넘는다.

고구려의 기상관측 기록은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일(高句麗本紀第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기상관측에 대한 최초의 예로서, 기원전 35년(동명성왕 3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햇빛이 구름속의 물방울에 굴절되면서 구름이 여러 빛깔로 물들어 보이는 채운현상이다. 또한 여기서 골령은 동명성왕(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수도로 삼은 졸본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중국의 요녕성 환인현 북쪽의 오녀산성 일대로 추정된다.

45년(민중왕 2) 5월에 “나라 동쪽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큰물은 홍수의 뜻으로 수해를 입은 경우이다. 72년(태조 20) 4월에 “경도(지금의 집안현)에 가뭄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414년(장수왕 2) 12월과 581년(평원왕 23) 7월에는 각각 “왕도(지금의 집안현)에 눈이 5척 내리다.”,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기상관측에 대한 기록으로 기원전 16년(온조왕 3) 10월에 “천둥이 쳤다.”, 15년(온조왕 33)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198년(나해이사금 3) 5월에 “나라의 서쪽에 큰물이 났다.”, 231년 4월에 “밤만한 우박이 내려 참새같이 작은 새들이 맞아죽었다”. 606년(무왕 7) 3월에는 “왕도(지금의 부여)에 흙이 비처럼 떨어져 낮인데도 어두웠다.” 등의 기록이 있다.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첨성대는 천문대와 제사의식을 지내는 복합적인 기능을 하던 곳으로 이해된다. 기상 관측 기록의 예로서, 3년(혁거세거서간 60) 9월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며, 금성 남문에 벼락이 쳤다.”, 11년(남해차차웅 8) “봄과 여름이 가물었다.”, 131년(지마이사금 20) 5월에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150년(일성이사금 17)에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763년(경덕왕 22) 7월에 “경도(지금의 경주)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나무가 뽑혔다.”, 822년(현덕왕 14) 2월에 “눈이 5척이나 내렸고 나무들이 약해졌다.” 등이 있어, 기상현상의 기간과 정량을 표시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기상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권53~권55 지(志) 제7~9의 ‘오행일(五行一)~오행삼(五行三)’에서 기상 기록을 볼 수 있다.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모든 대기현상을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오행에 따라 분류하여 정량적인 견지에서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오행일(五行一)~오행삼(五行三)’에 분류, 수록된 기상현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水)에 대하여는 이상강우·홍수·이상저온·지수(池水)와 정수(井水) 및 해수(海水)의 이변, 이음(異音)·무지개, 동물의 이상한 동태, 이상한 사람의 출생과 뇌우·서리·눈·우박 등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둘째, 화(火)에 대하여는 화재사건·지연(地緣)과 한랭기(寒冷期)의 이상고온, 무설(無雪), 이상개화(異常開花), 조류의 이상변동, 적기(赤氣)·적광(赤光), 강물과 우물물의 적변(赤變)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목(木)에 대하여는 수목의 이상, 해충·목빙(木氷)·무빙(霧氷)·이상강우와 뇌우·풍우 등과 같이 기후의 이변과 충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넷째, 금(金)에 대하여는 한발과 같은 천변지이의 모든 현상에 관한 내용이 있다.

다섯째, 토(土)에 대하여는 오행지의 지진·풍(風)·무(舞)·설(雪) 등 여러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가장 피해를 많이 주는 기상 재해 중에는 가뭄과 큰물(홍수)이 있다. 가뭄에 대하여는 양적 규정에 따라 한(旱)·대한(大旱)·구한(久旱) 등이 있고, 강우량에 대하여는 우(雨)·소우(小雨)·대우(大雨)·음우(淫雨)·항우(恒雨) 등의 계급이 있다.

강우량에 대한 기록의 예로서, 1225년(고종 12) 5월에 “대우(大雨)가 이틀째 내려 평지에서 물이 스며든 깊이가 7~8척이었다(大雨二日平地水深七八尺).”라 하여, 빗물이 평지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었던 깊이를 관측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람의 세기는 대풍(大風)·폭풍(暴風)·선풍(旋風)·태풍(颱風)·열풍(烈風)·질풍(疾風) 등으로 구별하고 있으나, 현재의 보퍼트(Beaufort) 풍력계급만큼 뚜렷한 한계가 있지는 않다.

안개는 그 농도에 따라 대무(大霧)·황무(黃霧)·혼무(昏霧)·운무(雲霧)·음무(陰霧)·황무(荒霧)·몽무(曚霧) 등으로 나누어 관측하였다.

구름은 색깔·길이·시간·방향·형태·운량 등을 관측하고 기록하였으며, “구름 없이 비가 왔다”든가 “구름 없이 천둥이 울렸다”든가 하는 특수 관측도 있었다. 구름의 형태에 대한 기록으로서 운둔(雲屯)·운합(雲合)·운래(雲來)·운화(雲華)·운취(雲聚)·운산(雲散)·운무(雲霧) 등이 있다.

『고려사』에는 적기(赤氣)·흑기(黑氣)·백기(白氣) 등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이 광학적인 현상으로 오로라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특수현상으로 흙비의 기록은 삼국시대에 8건의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50건 가까이 수록되어 있고, 이 현상은 현재 관측하고 있는 황사현상이다. 이러한 기상 관측 기록은 여러 지방에서 관측하여 개성(開城)에 보고된 것이 삼국시대와 다른 점이다.

조선시대의 기상

조선시대의 기상자료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비해 매우 풍부하다. 일반기상, 특이기상 등 다양한 자료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여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이들 자료에 대한 정리와 분석 그리고 보존과 활용 연구가 필요한 상태이다. 또한 측우기, 수표, 풍기가 발명되어 활용되었다.

  1. 세종 이전 시대

조선의 새 왕조가 수립됨에 따라 관제가 새로 제정되었으나, 기상관계의 업무는 변함없이 고려시대의 서운관에 속하여 진행되었다.

농산물의 수확고를 좌우하는 주요 인자는 기상조건이었으므로 기상에 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예를 들면, 1398년 5월에는 빗물이 흙속으로 들어가 몇 치도 이루지 못하였다. 1405년 4월에는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했다. 1409년(태종 9) 7월에 폭풍우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서운관의 관리를 현지에 파견하였다. 또한 1414년 6월에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1415년 6월에는 정이오(鄭以吾)로 하여금 각각 우기를 예측하도록 하였다. 특히 1418년 7월에는 왕이 “가뭄이 오래 계속되므로 충해가 있겠다.”고 예측하였다. 이때 대기현상은 비교적 과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세종 이전의 기상학적 업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으나, 빗물이 토양에 스민 정도를 호미나 쟁기 등의 깊이로 대강 측정하는 우택(雨澤) 제도를 고려시대와 똑같이 유지하였으며, 전국적으로 농작물의 작황과 관련하여 기상현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양적 측정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종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1. 세종시대

조선 초기부터 측우기를 발명할 때까지는 우택을 계속 측정하였다. 그러나 비가 온 후 젖은 흙의 깊이는 토양의 종류, 성질, 기본토양의 건조도에 따라 달라져서 서로 비교하기에는 어려웠다. 이 이유로 세종 때 세자로서 후에 문종이 되는 이향(李珦)이 발명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23년(1441년) 기록에 따르면 “세자가 구리로 주조한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깊이)를 조사하였다”고 한다. 이 결과 1442년에 호조의 건의에 따라 측우기가 전국에 설치되었다. 즉 15세기 전반에 전국적으로 강우에 대해 과학적인 정량측정을 개시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과학적 정량적 강우 측정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 시대에 시작된 조직적인 측우사업은 1500년대의 측우기록 6건이 발굴되었으나, 1586년(선조 19) 5월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세종 때 만들어진 원기(元器)까지도 분실되었으므로 이 당시 만든 측우기로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수표(水標)는 강물의 높이를 재는 푯말로 1441년에 청계천과 한강변 두 곳에 설치되어 호조에서 관리하였다.

  1. 세종 이후

영조는 재위 46년(1770년)에 세종 때 만들어진 측우기와 똑같은 형태의 측우기를 만들어 관중(官中) 뿐만 아니라 8도에 배치하여 측우 제도의 재건에 힘썼다. 이때의 측우에 대한 첫 기록은 1770년 5월 13일과 14일에 대한 것이었다.

18세기에 부흥하여 발전·확대된 측우사업은 측기(測器)에 의한 정량적·조직적 관측사업으로서 특히, 측우기로 관측된 서울지방의 강수기록(1770∼1907년)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하며, 당시의 지방 기록이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수록된 것이 발굴·복원되고 있다.

이를 통해 전국적인 강우 측정망이 확인되고 있으며, 당시 농업기상이 가장 주요한 관심사였음이 재확인되고 있다. 비가 오면 관상감과 각 지방에서는 주척이라는 자료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서 보고하였다. 측우기의 발명과 전국적 관측망의 시행은 정량적 자료의 수집과 국가적 제도화라는 측명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최근에 경기도·강원도·황해도·함경도의 지방 측우기 기록이 복원되었다.

현재 유일하게 전하는 진품 측우기는 1837년에 제작한 금영측우기 1대 뿐이다. 또한 측우대는 5종이 남아 있다. 관상감 측우대(보물, 1985년 지정), 대구선화당 측우대(보물, 1985년 지정), 창덕궁 측우대(보물, 1985년 지정), 통영 측우대(보물, 2010년 지정), 연경당 측우대가 있다. 이중 연경당 측우대는 창덕궁 연경당 앞뜰에 있는 팔각형 기둥모양의 화강석 측우대이다. 특히 측우대 중에서 명문이 길게 새겨져 있어 그 가치가 더욱 큰 창덕궁 측우대는 유일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측우대로 386개의 글자가 정지검(鄭志儉, 1737~1784)의 필체로 쓰여져 있는데, 측우기의 제작 경위 및 국가적 의의와 함께 측우 기술에 관심을 갖은 배경을 알려준다.

현존하는 수표는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옥외 전시중인데, 기둥 두면에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으며, 그 중 한 면의 3척, 6척, 9척에는 구멍을 파서 가뭄, 보통, 홍수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바람의 방향을 재는 기구로서 풍기(風旗)는 대궐 가운데에 풍기가 있다. 예로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에서 창덕궁 통제문 안과 경희궁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을 꽂아 놓았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에 있다.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풍기는 실물이 남아있지 않으나,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받침대인 풍기대는 현재 경복궁과 창경궁에 남아있다.

1818년에 발간된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영조·정조·순조 때의 부흥시에 관측·기록·보고 등 여러 규정이 모두 과학적이었는데, 이 책의 번규(番規) 안에 있는 관측규정에 의하면, 이상현상에 관계되는 항목이 8개(기상 2, 천문 6), 보통현상(通常現像)에 관계되는 항목이 25개(기상 21, 천문 4)로서 모두 33개 항목 중 23개 항목이 기상 현상들이었다.

근대의 기상

1884년(고종 21)에 청나라의 이홍장이 추천한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1848~1901:한국명 穆麟德)가 외교고문 뿐만 아니라, 통상 무역 업무를 총괄하면서, 오늘날의 관세청에 해당하는 조선해관을 창설하고 인천해관과 원산해관, 부산해관을 개설하여 3개의 개항장에서 관세 주권을 행사하면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근대 기상관측의 시발점이다.

해관은 선박의 출입과 관련해 정확한 기상정보가 필요한 곳인데, 최근 1883년 8월 12일부터 12월 31일까지 부산해관의 기상원부가 발견되어 해관의 연안 기상관측업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을 저지하기 위하여 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던 19세기 말, 한반도의 기상자료는 군사작전상 대단히 중요한 자료였다. 1904년(광무 8)에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군작전상 조선과 청국의 기상자료가 필요하였으므로 부산·목포·인천·용암포·원산의 다섯 곳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하였다.

조선정부는 1907년(융희 1)에 서울·평양·대구에 통감부관측소를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일본인이 관리하던 관측소를 흡수하여 농상공부대신의 관리하에 기상관측소를 두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기상업무는 1910년 8월 일본의 국권침탈로 같은 해 10월 1일(일본국 칙령 제360호) 조선총독부관측소에 속하게 되어 그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의 기상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관측소로 개칭됨에 따라 우리나라 기상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에 조선총독부관측소 초대 소장인 와다유지(和田雄治)가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의 기상·천문·지구물리 등의 관측자료를 조사, 수록한 『고대조선관측기록보고(古代朝鮮觀測記錄報告)』를 발간하고 외국에 소개하였다.

조선총독부관측소에서는 항공·고층·지자기·지진관측 등으로 확대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기상대 1개 소, 지방측후소 24개 소, 항공기상출장소 19개 소, 간이 및 우량관측소 590개소가 있었다. 이 때의 기상업무는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한국인의 고용을 극히 제한하여 한국인의 수가 매우 적었으며, 전쟁 말기에 인력부족으로 약간의 인원을 증대하여 고용했을 뿐이었다.

현대의 기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5년 미군정청은 문교부 산하에 관상국(觀象局)을 두었고, 그 책임자로 미군장교 국장 외에 한국인 국장으로 당시 연희대학교 교수인 이원철(李源喆)이 취임하면서 관상국을 중앙관상대로 개칭하여 초대 대장을 겸직하였다. 1945년 말부터 국립중앙관상대에 의한 일기도의 분석과 일기예보가 가능했으나, 북한과 중국의 기상자료를 얻을 수 없어서 일기분석에 어려움이 많았다.

1955년에는 김포 항공기상관측을 시작하였으며, 1963년에는 고층기상관측을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기상레이더관측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에 기상 위성 수신업무를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한국문화재 반환운동의 일환으로 일본기상청에 있던 금영측우기(1837년 제작품)를 일본 기상청장이 반환하였다. 백엽상을 중심으로 지상관측이 자동종합기상장치로 바뀌면서 전국에 수백개소의 무인관측이 가능해졌으며, 슈퍼컴퓨터의 도입으로 수치예보에 의한 일기예보가 가능해졌다.

원격장비인 기상위성과 기상레이더 등 첨단장비의 도입으로 기상은 입체 감시가 가능해졌으며, 기상관측선의 도입으로 해상에서의 기상공백을 보완하는 등 실시간의 입체적 종합 감시가 가능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지구온난화가 전세계적으로 대두되면서 기후변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기상의 장기간 누적 특징인 기후 관점의 시대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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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gugi, Supyo, and Punggi:Meteorological instruments of the 15th century in Korea(Chun Y. and S. W. Jeon, History of Meteorology, vol 2, 2005, 25-36)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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