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윤헌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문학, 장령, 안악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헌보(獻甫)
이칭
기충헌(奇忠獻), 기내헌(奇乃獻)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5년(선조 8)
사망 연도
1624년(인조 2)
본관
행주(幸州)
주요 관직
군수
관련 사건
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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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세자시강원문학, 장령, 안악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기충헌(奇忠獻) 또는 기내헌(奇乃獻), 자는 헌보(獻甫). 응교 기준(奇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 기대항(奇大恒)이고, 아버지는 기응세(奇應世)이며, 어머니는 우찬성(右贊成) 임백령(林百齡)의 딸이다. 형이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현감으로 있다가 1605년(선조 38)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에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가 되고, 광해군 때는 공조좌랑·군기시정(軍器寺正)·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장령(掌令)·안악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형인 영의정 기자헌이 광해군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여 유배될 때 형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 뒤 진사 이건원(李乾元)이 서궁폐출(西宮廢黜)에 반대한 이각(李覺)과 함께 처형하자고 주장하여 수차에 걸쳐 국문을 받았으나 뚜렷한 실증이 없어 방면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오히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제거할 때 동조하였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하였다는 혐의로 온 집안이 추국을 받아 끝까지 불복하다가 형이 먼저 죽고, 그 뒤 생원 임강(林茳)과 더불어 장(杖)을 맞다 죽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행주기씨대동보(幸州奇氏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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