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내무부주사, 사고전서관부총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가정(可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794년(정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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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서 내무부주사, 사고전서관부총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호란(胡亂) 때 중국에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의 후손. 자는 가정(可亭). 아버지는 청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김삼보(金三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청사(淸史)』·『청사고열전(淸史稿列傳)』에는 김간을 만주정황기인(滿洲正黃旗人)이라 했고, 『국사대신전(國史大臣傳)』에는 한군정황기인(漢軍正黃旗人)이라 하여 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한군정황기인이라고 한 것은 김간의 선조가 명말(明末) 의주(義州)에서 중국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한군기적(漢軍旗籍)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또 만주정황기인으로 기록된 것은 화외인(化外人: 중국에 귀화한 외국 사람)으로서 만주기적(滿洲旗籍)에 오르게 된 것에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조실록(英祖實錄)』·『정조실록(正祖實錄)』 등에 따르면, 김간의 선조는 병자·정묘호란의 전란 속에서 의주가 함락되자 포로가 되어 중국으로 가게 된 것으로 짐작되며, 의주에 선묘(先墓)가 있다. 할아버지를 기점으로 해서, 매대(每代)마다 청나라 조정의 관리로 영달하였다. 이 점에서 청나라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의 대표적인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김상명(金尙明)은 각로(閣老)·대신(大臣), 아버지 김삼보(金三保)는 무비원경(無備院卿), 누이동생은 건륭제(乾隆帝)의 귀비(貴妃), 동생 김휘(金輝)는 병부시랑, 아들 김온포(金縕布)는 호부상서 등을 지냈다. 이 중 김상명과 김간은 『영조실록(英祖實錄)』·『정조실록(正祖實錄)』에도 이름이 기록될 만큼 조선의 대청교섭(對淸交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① 막대한 방물(方物)을 견감(蠲減)시킨 것, ② 영묘(英廟)의 저책(儲冊)과 저군사위(儲君嗣位: 왕세자가 임금에 즉위함)에 대한 문책을 해결시킨 것, ③ 연행사절이 중국에 갔을 때 조정중신(朝廷重臣)·석학(碩學)과의 면담을 주선시킨 것 등으로, 당시 조청교섭(朝淸交涉)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김간에 관한 자료는 『국사대신열전(國史大臣列傳)』에 연보가 있다. 1750년(영조 26, 청 건륭 15) 내무부주사(內務府主事)를 출발로 하여 1773년 사고관무(四庫館務)의 독촉검사(督促檢事)를 하는 사고전서관의 부총재를 담당하였다. 청나라의 건륭제가 '근신소심(謹愼小心)'이라고 평했듯이 중앙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오로지 학술적인 저술에 전념하였다. 또한 국가적인 사고전서의 편찬 사업에도 참여하여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또한 무영전(武英殿)의 교각사(校刻事)를 실제적으로 담당하면서 목활자 인쇄기술을 개량시켰다. 이에 관한 저술이 『무영전취진판정식(武英殿聚珍版程式)』이고, 그 실천적 결과가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版叢書)』 134종의 간행이다. 그리고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의 편찬에 참여했고 『요금원삼사어해(遼金元三史語解)』를 저술하였다.

무영전취진판은 독자적으로 이룩한 목활자 인쇄기술의 획기적인 개량(改良)이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의 목활자 기술에 대한 지식이 수용되었다고 본다. 때문에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왕정(王禎)이 이룩한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의 단순한 모방이라 할 수는 없다.

그 방법을 분석해보면 종전의 왕정과는 전혀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 특징은 ① 문선(文選: 문신·종친 등의 인사 문제)을 위한 분업적 작업에서 자궤(字櫃: 활자를 담은 함)가 설치되었고, ② 종전과 같이 융촉(融燭: 밀랍을 녹여 붙이는 활자술)을 사용하지 않고 조립식 조판(組立式組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김간을 평가할 때 사고전서부총재(四庫全書副總裁)가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당연직(當然職)이기 때문에 맡아진 것으로 말하기 쉬우나, 실제 김간이 목활자 인쇄의 연구 개발을 위해 얼마만큼 심혈을 쏟았는지는 인쇄 공정의 치밀한 개량에서 알 수 있다.

사고전서의 편찬에 있어서 허명(虛名: 일의 참여에 이름만이 올려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독촉검사의 실무에서부터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목활자의 간행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고전서에 대한 공적으로 1785년 청정부(淸政府)의 경찰(京察)에서 2급(二級)이 가서(加敍)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사고전서와 한국인 부총재 김간에 대하여」(변인석, 『동양사학연구』 10, 동양사학회, 1976)
「무영전취진판정식의 서지적 고찰」(변인석, 『동양사학연구』 24, 1986)
「증보신판사고전서 조선사료의 연구」(변인석, 『민족문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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