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남봉(南鳳). 광주(光州) 출생. 광주지역의 대농인 용연(容淵)의 둘째아들이다.
1930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2년동경(東京) 센슈대학(專修大學) 전문부를 수료하고, 1942년 일본 호지신문사(報知新聞社) 기자가 되었다. 1943년 고향으로 돌아와 『전남신보』 사회부장으로 일하였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주간이 되었다.
1951년『전남일보』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주필·사장에 취임하여 1987년까지 36년 동안 호남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언론창달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1957년 전라남도 체육회장에 피선되어 전라남도 체육중흥에 앞장섰고, 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 산업분과위원장을 맡아 낙후된 국내산업 육성기반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1962년 한국신문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1980년까지 18년 동안 상임부회장으로 한국신문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69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위원이 되었으며, 1970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남지부장에 추대되어 1980년까지 10년 동안 열악한 전라남도 및 광주지역 예술문화단체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71년 전일방송사(全日放送社)를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하였고, 1978년 호남전기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부실기업을 재건, 1987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1980년 전남일보사·전일방송사 회장직을 떠나면서 지역사회를 위하여 광주어린이대공원 부지 20만㎡를 매입하여 희사하였다.
1958년부터 『전남일보』에 쓴 칼럼 「대도무문(大道無門)」은 1980년까지 2,189편에 달한다. 『사요나라의 나라』·『삼등열차』·『월평선』·『바람을 보는 사람들』·『여정천리』·『대도무문전집』·『바람과 구름과 함께 가는 여로』·『인생연극』 등의 저서가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 1987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