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1987. 호는 원정(園丁). 함경남도 함흥출생. 6세 때 캐나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축구를 시작하여 함흥 영생중학교 3학년 때 선수가 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활약하였다.
축구계의 기인으로 불린 그는 남다른 집념과 열정으로 195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심판이 되어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심판 공로상을 받았다.
1965년 축구연구차 서독에 머물면서 푸쓰발 유겐트(Fussball Jugend) 소속의 어린 선수들을 보고 서독이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는 이유를 뚜렷하게 느껴 우리나라 축구의 백년대계는 어린이축구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뒤 1969년에 사재를 털어 서울효제초등학교를 빌려 어린이 일요축구학교를 창설하고 ‘승부보다 경기내용을, 그리고 고전음악같이 우아하게 해야 한다.’는 축구철학을 심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선 대가인 심판비와 외국인학교 축구코치비를 비롯하여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역경을 헤쳐나갔다.
1969년도에 시작해서 미동초등학교 교정에서 쓰러지던 날까지 16년 동안에 7만 여명의 어린이에게 축구를 가르쳤으며, 계획하였던 10만명을 채우지 못하게 될 것을 병상에서도 늘 염려하였다.
이때에 어린이들의 병문안 행렬이 끊이지 않아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편안하고 넉넉할 수 있었던 선택인 분데스리가(Bundesliga)의 심판 제의를 끝내 거절하고 오직 어린이축구만을 위한 외곬인생을 살았다. 1981년 소파상(小波賞)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