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무산(茂山) 출신.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사실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본강점기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만주에서 보냈고 1941년에는 만주 신경(新京)에 위치한 4년제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 해병 소위로 임관, 육군 참모대학을 수료한 후 1949년 해병대창설 요원으로 참여,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도솔산 전투, 대우산 전투 등 주요전투에 참가 하였고 경기도 양구 북방의 해안분지인 펀치볼에서 벌인 소위 펀치볼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으로 자리를 옮긴 뒤 1949년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하고, 1957년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해병참모대학을 수료하면서 장성으로 승진하였다. 1958년 2월에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해병 제1상륙 사단장을 맡아 초기 한국 해병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1960년 5·16군사쿠데타의 주체세력으로 제3공화국의 핵심인사로 떠올라 1961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으로 발탁되었다. 민정 이양과 함께 1963년 12월 해병중장으로 예편한 뒤, 1961년 7월부터 1962년 1월까지 제19대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면서 체육계에 몸을 담았다.
1962년 1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의장 박정희, 육군대장)이 한국마사회 법을 제정 공포할 떄 재정경제 위원장이었다.
1971년에는 한국마사회 회장에 취임, 마사회의 재정자립과 경마를 건전한 여가선용장으로 열어나가는 데 기여하였다. 체육발전과 마사회의 발전에 공헌이 인정되어 1985년에는 대한체육회 고문과 한국마사회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1986년에는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로 활약하였다.
1995년 12월 3일 오전 1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