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 ()

한문학
인물
일제강점기 때,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모색하였으며, 저항시인으로 평가되는 학자 · 시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내회(乃晦), 경회(景晦), 죽산(竹山), 천태(天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5년(고종 2)
사망 연도
1934년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전라남도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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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모색하였으며, 저항시인으로 평가되는 학자 · 시인 · 독립운동가.
개설

자는 내회(乃晦), 호는 경회(景晦)이며, 죽산(竹山), 천태(天台) 등의 별호도 썼다. 본관은 김해이다.

생애

김영근(金永根)은 1865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이 곳에 세거하였으며, 부친 김도순(金道淳)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行龍驤衛)와 금갑도(金甲島) 만호(萬戶)를 지낸 명망가였다. 김영근은 어려서는 출세를 위해 과거공부에 전념하였으나, 14세 때인 1878년(고종 15)에 기정진의 문인인 김한섭(金漢燮)의 문하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도학을 공부하였다. 1882년에는 이항로의 고제 김평묵(金平默)이 무안의 지도(智島)로 유배되어 내려오자 그 문하에 들어갔고, 이후 화서학파의 성원으로 평생토록 처신하였다.

활동사항
  1. 국외 망명

김영근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발발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였다. 전란의 와중에 중형 김영필(金永弼) 외 형제 일족 세 명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승 김한섭도 전쟁 중 사망하였다. 그 뒤 37세 되던 1901년에는 부인 영월 엄씨와 두 딸이 연이어 사망하는 참혹한 불행을 당하였다. 그러는 중에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국운은 기울어갔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마침내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을 늑결하기에 이르렀다. 그 충격을 계기로 김영근은 의리를 지키며[守義]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북간도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동문 친구인 위봉식(魏棒植)·조동겸(趙東謙)과 함께 1906년 7월에 북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김영근은 한인사회가 형성되던 초기 단계의 북간도 망명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곧 환국한 사실로 미루어 그러한 정황이 짐작된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김영근은 두 번째 북간도 망명을 시도하였다. 1차 망명 때 동행했던 조동겸과 위봉식은 국치 직후 바로 망명한 데 비해, 김영근은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처지로 인해 다소 늦어졌다. 1913년 모친 별세 직후 망명하였으나 망명 이듬해인 1914년에 곧 환국한 것으로 보아 두 번째 망명 때에도 북간도 현지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귀환 여정(旅程)을 두고 “만 리 길에 만 번 넘게 죽을 고비 넘기고 돌아왔다[萬里輿歸萬死餘]”고 표현한 대목에서도 그간에 겪었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다.

  1. 국내 활동

김영근은 일제강점기 내내 시종 불우한 삶을 살았다. 북간도에서 돌아와서 강진의 계치(桂峙)에 정착하였고, 1916년부터는 강진 신흥(新興)에 신흥서관(新興書館)을 열고 문생들을 모아 강학하며 지냈다.

1919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새로운 활동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상규를 비롯하여 김병수(金秉洙)·오석룡(吳錫龍) 등 조선고사연구회(朝鮮古史硏究會)·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 관련 인사들과 1923년까지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3·1운동 후 1920년대 초에 결성된 이 두 결사는 이상린(李相麟), 이상천(李相天) 형제 등 홍주의병 계열의 인물들과 조재학(曺在學) 등 최익현 계열의 의병세력, 그리고 정안립(鄭安立) 등 만주에서 활동하다 남하한 세력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일종의 유림결사로 민족운동을 지향하던 단체였다. 1921년 음력 10월 전국 유림에게 통고하기 위해 작성한 「통고전국유림문(通告全國儒林文)」도 인도공의소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김영근은 더 이상 현실 참여활동을 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다. 1934년 70세를 일기로 강진군 칠량면 현평리(峴坪里)에서 서거하였다.

김영근은 이러한 민족운동가로서의 활동상 외에 한편 저항시인으로도 주목된다. 일생 동안에 1500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강점으로 야기된 민족 수난이 그 배경이 되고 소재가 된 이들 시의 대부분이 ‘독한 저항과 울분과 비탄으로 넘쳐’ 있었다는 점에서 민족 저항시인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남겨둔 방대한 자료는 대부분 1950년 6·25전쟁 와중에 망실되었다. 대신에 여러 문인들이 남긴 『경회당본고(景晦堂本稿)』, 『경회선생유집(景晦先生遺集)』 등 20여 종의 필사본을 모아 1987년 『경회집(景晦集)』으로 영인 간행하였고, 이를 저본으로 삼아 2010년에는 전남 강진군에서 『국역 경회집』을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경회집(景晦集)』(아세아문화사, 1987; 2013년 재판)
『국역 경회집』(이백순·최한선 역, 강진군, 2010)
「호남유생 경회 김영근의 생애와 북간도 항일 망명」(박민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2014)
「호남유생 경회 김영근의 화서학파 학통과 항일 시국관」(박민영, 『의암학연구』 12, 의암학회, 2014)
「오남 김한섭의 생애, 저술 및 사상」(안진오, 『호남문화연구』 12,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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