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병택(金秉澤)이고 일명은 김병조(金秉祚)·김창석(金昌錫)·김윤관(金允官). 함경남도 이원 출신이다.
1921년 무렵 한인사회당에 입당한 후 1928년까지 연해주·동만(東滿)·국내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929년을 전후해서는 주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서울-상해파 공산주의자그룹의 조선공산당 재건회의에 참가했으며, 6월에는 만주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서 결성된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8월에는 돈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주건(朱健)을 책임비서로 결성된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6월 국내로 들어와 강문수(姜文秀), 조덕진(趙德進) 등과 함께 국내에서의 당재건 활동을 추진하였다. 8월 함남 함주군(咸州郡) 신흥(新興)에서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 조직은 주로 철도와 대생산기관의 소재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을 경의·경부·호남·중부·함경의 다섯 지구로 나누고 각각에 선(線)위원회와 구역간부회를 두었으며, 각선 구역내의 공업도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0월경에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의 활동을 코민테른에 보고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한 일체의 상황을 중국공산당에 일임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1931년 3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의 해체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후 조선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조직 준비회를 건립해 책임비서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5월에는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피신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1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 동만특별위원회의 조선국내공작위원회 파견원으로 국내공작을 준비하던 중 연길현(延吉縣) 조양천(朝陽川)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33년 1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1938년 10월 함흥형무소에서 만기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1943년 공산주의단체 자유와 독립 그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44년 11월 서울에서 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일본·소련 개전(開戰)에 호응하는 무장 봉기계획을 협의하기 위해 소련으로 입국하려다가 소련 국경경비대에 밀정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일제 패망 이후 출옥하였다. 1946년 2월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서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으며, 이후 월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