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북일사립학교와 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에 경기공립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느날 운동부의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일본인 학생을 구타하였는데, 이 일로 퇴학을 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여 1941년 12월에 졸업하였다.
원산공립상업학교 졸업 후, 1942년에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 광복 후 우리나라 화약산업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화약관리사업체를 운영하면서 1952년 10월 28일에는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53년 8월에 서울 회현동으로 사무실을 옮겨 화약의 자체 생산을 위해 노력했으며, 1956년 4월에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 생산하였다.
1964년에는 한국베어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66년에는 골든벨상사주식회사와 한국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67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에 피선되는 한편, 주한 그리스 총영사에 취임하였다. 1968년에는 재단법인 백암문화재단(白巖文化財團)을 설립했고, 1969년에는 경인에너지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70년에는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고, 대한사격연맹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제일화재해상보험 대표이사가 되었고, 1972년에는 그리스 금성십자대훈장(金星十字大勳章)을 받는 한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에 피선되었다.
1973년에는 대일유업주식회사·태평양건설주식회사·태평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4년에는 김포요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철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975년에는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天安北一學院)을 창립하여 이듬해 3월 6일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76년에는 서울플라자호텔과 제일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7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죽은 뒤 1981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