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시 ()

대동여지도 / 강화, 김포, 인천, 통진, 부평, 교하, 김포
대동여지도 / 강화, 김포, 인천, 통진, 부평, 교하, 김포
인문지리
지명
경기도 북서 해안가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북서 해안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한강을 경계로 파주시·고양시, 서쪽과 남쪽은 인천광역시, 동남쪽은 서울특별시, 북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개풍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36′∼126°48′, 북위 37°34′∼37°46′에 위치한다. 면적은 276.64㎢이고, 인구는 34만 999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읍, 3개 면, 6개 행정동(9개 법정동), 233개 행정리(444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에 있다.

자연환경

김포반도는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낮아진 준평원과 한강 중상류 및 한강 지류에서 운반된 토사가 매립되어 발달한 충적지가 곳곳에 나타난 평야지로 동고서저의 지세를 이룬다.

동쪽에는 봉성산(奉城山, 129m), 서쪽에는 문수산(文殊山, 376m)·승마산(乘馬山, 108m), 남쪽에는 계양산(桂陽山, 395m)이 이웃 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대산(大山, 132m)·수안산(遂安山, 146m)·오봉산(五奉山, 104m)·학운산(鶴雲山, 112m)·가현산(歌鉉山, 215m)·장덕산(章德山, 152m) 등이 있다.

전 토지의 10%가 하천일 정도로 크고 작은 하천이 많다. 이들 산지 사이를 굴포천(掘浦川)·걸포하천(傑浦河川)이 남쪽에서 북류해 한강에 합류하고, 대곶천·대포천 등이 황해에 합류한다. 이들 하천은 김포평야의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지층은 고생대 이전 지층과 중생대 쥐라기지층이 발달해 암석은 변성퇴적암인 결정편암이 고양시까지 나타나고, 화강편마암류가 남동부에 분포한다. 또한 반도 서안에는 중생대 대동계층이 남북으로 발달해 있다. 그리고 월곶면 문수산 일대에는 남북 10㎞, 동서 4㎞ 정도의 무연탄층이 분포하고 있으나 경제성이 낮아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1.2℃로 서울과 비슷한 기온 분포를 보이나, 같은 위도의 동해안이 강릉보다 1℃ 정도 낮다.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 26℃이며, 연강수량은 1,100㎜ 내외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다 그러나 한강유역 일대와 서해의 도서지방에 신석기유적이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강하류유역인 이곳에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한시대에는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이 통진 땅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초기의 도읍인 한성에서 가까운 이곳이 중시되었을 것이나 특별한 문헌기록은 없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지배했을 때에는 이 지역에 검포현(黔浦縣)·수이홀(首尒忽: 지금의 김포 구읍 남쪽)·동자홀현(童子忽縣: 지금의 통진 고읍)·평회압현(平淮押縣: 지금의 월곶면)·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지금의 양촌읍)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에 이를 각각 김포현·수성현(戍城縣)·동성현(童城縣)·분진현(分津縣)·공암현(孔巖縣)으로 개칭하고, 공암현은 율진군(栗津郡: 지금의 시흥)의 영현(領縣)으로, 그 나머지는 장제군(長堤郡: 지금의 부평)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에 분진을 통진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이들 5개 현을 모두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의 영현으로 삼았다. 에는 김포현을 분리해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198년(신종 1)에는 현령을 두었다. 1310년(충선왕 2)에는 공암현을 양천(陽川)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수주에서 분리해 감무를 두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에는 통진현에 감무를 설치하였다.

1413년(태종 13) 통진현에 현감을 두고, 동성현과 수안현(守安縣: 戍城縣을 고려 초에 수안으로 개칭)을 편입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행주산성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강 건너인 이곳 섶골[薪洞]에서는 남자들이 산마루에서 섶나무를 준비하는 동안 여자들은 돌을 마련하였다. 그 뒤 행주산성을 공격해 오는 왜선을 향해 불을 붙인 섶나무와 돌을 던져서 왜선을 불태워 침몰시켰다. 여기에서 섶골이라는 명칭이 비롯되었다.

이곳 출신인 조헌(趙憲)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인을 규합하고, 승장 영규(靈圭) 등과 함께 왜병이 점령한 청주성을 공격해 수복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은 흩어지고 남은 의병 700인은 싸우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1627년(인조 5)에는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능침 장릉(章陵)을 양주에서 김포로 옮겼다. 이로 인해 김포현이 1632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군이 침입하자, 윤방(尹昉)·김상용(金尙容) 등이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봉림대군·인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청군이 이곳 월곶면의 문수산에 올라 강화성의 허실을 살핀 뒤, 민가를 헐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단번에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강화도의 천험(天險)만 믿고 수비를 소홀히 하였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세우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일은 숙종 대까지 계속되어 내성·외성·진보·돈대 등을 축조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이의 일환으로 문수산에 문수산성을 축조하는 동시에, 통진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것은 문수산이 강화도 수비에 그만큼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함대가 강화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서울로 진격하는 길을 확보하려고 육전대를 투입해 문수산성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한성근이 이끄는 수비군에게 격퇴를 당하였다.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 미국함대가 염하를 거슬러 올라와 광성진전투(廣城津戰鬪)가 벌어졌다. 그런데 강화 쪽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과 함께 이곳 덕포진(德浦鎭: 지금의 대곶면)에서 일제히 포격을 가해 그들을 격퇴시켰다.

그 뒤 미국함대는 인천방면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다시 북상해 해병대가 초지진(草芝鎭) 등을 함락시켰다. 이 두 양요를 겪은 뒤 1874년에는 덕포진에 안항동포대(鴈行洞砲臺)를 축조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통진부와 양천현이 김포군에 편입되었다.

1952년에 신곡리 양수장이 준공되어 김포평야에 물을 공급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양동·양서 두 면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부천군이 폐지됨에 따라 오정·계양 두 면이 편입되었으나, 1975년에 오정면은 다시 부천시로 편입되었다.

1983년에는 양촌면 일부와 월곶면 일부, 대곶면 일부를 통합해 통진면을 신설하였다. 또한 1989년 계양면이 당시 인천직할시로 편입, 1995년에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98년 4월 1일 시로 승격되었다. 2004년 1월 1일에는 통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2009년 고촌면이 고촌읍으로 승격되었고 2011년 11월 양촌면이 양촌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통진읍의 고정리지석묘(경기도 기념물 제91호)와 서울의 변방인 강화를 지켜 주는 월곶면 포내리의 문수산성(사적 제139호)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문수사·금정사(金井寺)·용화사(龍華寺)·광은사(廣恩寺)·약천사(藥泉寺)·계향사(桂香寺) 등의 사찰과 월곶면 성동리의 문수사풍담대사부도 및 비(文殊寺楓潭大師浮屠―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1호)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월곶면 군하리에 통진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0호), 북변동에 김포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9호), 감정동에 우저서원(牛渚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호) 등이 있다. 그리고 차정동에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0호), 통진읍 옹정리에 심연원신도비(沈連原神道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6호)·심강신도비(沈鋼神道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7호), 하성면 가곡리에 장만선생영정 및 공신녹권(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2호)가 있다.

또한, 고촌읍 신곡리에 영사정(永思亭), 하성면 가금리에 한재당(寒齋堂, 경기도 기념물 제47호)이 있다.

풍무동에 장릉(章陵, 사적 제202호)이 있다. 대곶면 신안리에 덕포진(德浦津, 사적 제292호) 등이 있다. 대곶면 대명리와 강화도의 광성진·초지진을 연결하던 대명나루는 김포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중요한 나루였다. 월곶면 성동리에 있는 갑곶나루선착장석축로(경기도 기념물 제108호)는 성동리와 강화 갑곶을 연결하던 나루터 유적이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1127년(인종 5) 월곶면 군하리에 통진향교, 북변동에 김포향교가 세워졌다. 서원으로는 1648년(인조 26) 조헌(趙憲)을 기리는 우저서원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1907년에 김포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뒤 월곶·양곡·하성·대곶·검단·계양·고촌·소양 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또한, 1936년에 6개월 수료의 김포농업실수학교가 세워져, 광복 후 김포중학교와 김포종합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1개교, 중학교 22개교, 고등학교 14개교와 김포대학과 중앙승가대학이 있다.

민속

이 지방의 민속놀이로 통진읍 옹정리의 농상패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논에 김을 매기 위해 농사반을 구성한다. 그리고 농기를 앞세운 농악대가 7채 길군악을 신나게 치는 놀이다.

논김을 맬 때는 선소리꾼의 긴가락·자진가락·휘몰이가락 등 주고받는 농요가 이어져서 흥을 돋운다. 이동을 할 때 여기에 따르는 인원은 기수를 비롯해 선소리꾼·살포·상쇠·북잡이·장구잡이 등 농악놀이꾼만도 20여 명이 되며,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인원이 증감된다.

도당산 산신제는 서변마을에서 매년 음력 10월 2일 밤 10시를 기해 지낸다. 도당산은 시의 주산인데, 서쪽으로 소나무가 무성하고 평평한 곳이 있어 그 곳을 제단으로 삼는다.

제물로는 반드시 돼지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 등 제도와 절차가 엄격하다. 또한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어 마을사람들은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산신제를 마치면 온 마을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축제 분위기가 된다.

북변동·감정동, 그리고 하성면 마곡리, 통진읍 동을산리도 매년 음력 10월에 각각 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그 밖에 음력 10월 20일에 손돌목 앞에서 손돌제(孫乭祭)를 지낸다.

설화·민요

이 지방의 설화에는 「여우고개이야기」와 「투금포전설(投金浦傳說)」이 대표적이다. 여우고개는 감정동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 선조 때 조헌이 어렸을 적 이 고개를 넘어 공부하러 다녔다. 그런데 매일 그 고개에서 여우가 미녀로 둔갑해 조헌을 유혹하려 하였다.

이에 조헌이 글방 선생에게 사실을 고하니, 선생은 그 미녀의 입 안에 있는 구슬을 빼앗아 삼키면 장성해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헌은 선생의 말대로 구슬을 빼앗아 삼켰다. 그러자 미녀는 여우로 변해 울며 도망갔고, 조헌은 그 뒤 과연 큰 인물이 되었다.

「투금포전설」은 고려 말 지금의 양천 공암나루 부근에 살던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형제는 나루에서 금덩어리를 두 개 얻어 한 개씩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다른 손들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런데 배가 강 중간에 이르렀을 때 아우가 그 금덩어리를 슬그머니 물속에 던져버렸다. 이를 본 형이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아우는 “형님, 오늘까지 남들이 우리 형제의 우애를 매우 부러워한 까닭은 우리가 비록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금덩어리가 생겼으니 자연 게을러질 뿐 아니라 더 큰 욕심으로 나쁜 마음이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형제의 의는 갈라지고 말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금덩어리가 싫어지고 무서워 물에 던졌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형이 이 말을 듣고 “네 말이 옳다.” 하면서 자기도 물속에 금덩어리를 던져버렸다. 나룻배에 탔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형제의 우의에 감탄하고, 그 뒤로는 이곳을 투금포(投金浦)라 부르게 되었다.

이 고장에 구전되는 민요는 타령류가 주종을 이루고, 노동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서울과 근접해 다른 지방보다 일찍 노동이 쇠퇴한 때문으로 보인다. 타령요 중에는 「달거리창부타령」·「각설이타령」·「어랑타령」·「창부타령」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 외에 「가세타령」·「군밤타령」·「흥타령」·「열두달 소리」 등도 많이 불린다.

「달거리창부타령」은 임을 그리워하는 연정을 매월 명절 때마다 읊은 것으로, 그 일부를 소개하면 “……동짓달이라 잡아를 드니 계절은 벌써 내년이라/동지팥죽을 먹고나보니/원수의 나이는 더 먹었네/원수의 나이는 더 먹었는데/님은 더 하나 안생기나/얼씨구나 지화자 좋구료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와 같다.

「창부타령」은 경기도지방의 대표적인 노래로 이곳에서도 많이 불렸다. 이 타령은 달거리형식月令體形式으로 불리는 것이 특징이다. 「각설이타령(푸념)」은 옛날 걸인들이 구걸할 때 부르던 것이 일반화된 것인데, 숫자를 해학적으로 풀이한 유희적 내용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억자나 한자 들고 봐 억조창생 만민들 한푼두푼 좋을씨구나/지지고 품바 들어간다 얼씨구나 들어간다/자― 들었다놨다 콩장이나 꼬부라졌다 새우젓이나/울긋불긋 고추장이나/둥글넙적한 빈대떡이 날까요, 골패짝이 날까요/그릇 우그러진 바가지에다 발뒤꿈치로 꾹꾹 눌러도/더럽다고 아니 하겠으니 한술만 보태주십소사.” 등이다.

또한 이것은 다른 고장의 「각설이타령」 등과 같이 뛰어난 해학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사설의 문학적 가치가 높다. 이 고장 특유의 노래인 「열두달소리」는 일년 열두 달을 꽃에 비유해 읊은 음영민요로 은유적 표현이 뛰어나다.

일부를 소개하면, “대천바다 한가운데/뿌리 없는 ○이 나서/그 나무가지는 열둘이요/잎은 피어 삼백예순/그 ○에 열매가 열어/일월인가 명월인가/꽃이야 곱다마는 가지가 높아 못 꺾겠네.” 등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39.6%가 경지로 되어 있을 정도로 경지가 많은 지역이다. 산지는 전체의 28.6%, 하천 12.8%, 도로용지 3.6%, 대지 4.6%, 공장용지 3.4%이다. 경지 중 논이 6,995㏊, 밭이 2,643㏊를 차지한다. 이처럼 논이 많아 예로부터 통진미·김포미라 해 질 좋은 쌀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서울의 공장이 김포지역에 이전하고 있어 경지면적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 더구나 인구와 산업시설의 수도권 집중으로 한강수계가 오염되고 있어 농업에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굴포천 상류인 부천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김포평야의 오염은 심각한 상태이다. 농지의 90%가 수리안전답에 속하는데, 고촌읍 신곡리 굴포천 하구에 있는 양수장은 김포평야의 45%에 해당되는 지역에 관개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두류와 채소류로 무·배추·고추·오이·파·마늘, 과실류로 포도·딸기·사과·배, 특용작물로 참깨·들깨·인삼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김포는 서울 근교에 있고 교통이 편리해 화훼·과수 등의 근교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인삼은 1970년대 이래 계속 증가하고 있는 상태로 금산·풍기·강화에 이어 생산량이 많다. 주요 생산지역은 대곶면·하성면·통진읍 등이다. 생산량은 적으나 밤·버섯·도토리 등도 생산된다. 그리고 낮은 구릉지와 한강변의 넓은 초지에 많은 목장이 발달해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9.4%로 2만 637명이고, 제조업 인구는 13.7%인 3만 246명이다. 주요 광산물은 고령토·규석 등이며, 제조업은 비금속공업·조립금속공업·화학섬유공업·종이인쇄공업·식료품공업 등이 있다.

시장은 북변동 김포장이 2·7일에, 양촌읍 양곡장이 1·6일에, 통진읍 통진장이 3·8일에, 하성면 마곡장이 4·9일에 각각 열리는데, 주요 거래품목은 포도·마늘·배추 등과 잡화이다.

도로는 국도 48호선이 시의 중앙을 서북∼남동방향으로 지나고 국도 39호선이 인천계양동에서 고촌읍을 거쳐 고양시로 통하고 있다. 국도 48호선은 김포∼서울을 잇는 4차선 도로이다.

지방도로로 352호선이 김포에서 서남진해 대곶면을 거쳐 강화로 들어가며, 지방도로 305호선이 통진에서 동남진해검단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지방도로 346호선이 시를 남북으로 지나며, 지방도로 307호선은 김포에서 인천의 계양을 거쳐 부천시로 들어간다.

과거에는 하천교통도 발달했으나 현재는 쇠퇴하였다. 과거의 나루터로 월곶면 조강리(조강나루터)와 고양리(원머루) 및 어모포, 하성면 신리(마근포)와 검암포(감바위), 고촌읍의 신곡(석골), 대곶면 대명리(전막)가 있다.

관광

이 시는 동북쪽은 한강과 접하고, 서쪽은 경기만과 염하로 둘러싸인 반도이다. 그리고 서쪽은 문수산과 가현봉·장릉산·승마산·수안산 등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곳곳에 산재해 있고 동쪽에는 넓은 김포평야가 펼쳐져 우리나라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해안에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 간석지가 넓게 발달해 있고, 해안에는 유도·율도·육도 등의 섬이 분포해 있어서 관광명소가 많은 편이다. 특히 김포는 노천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문화유적이 도처에 분포되어 있다.

김포평야는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곡창지대로 예로부터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또한 기후와 풍토가 개성과 비슷해서 인삼재배가 성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삼은 관광토산품으로 김포쌀과 더불어 상품성이 높다.

이 고장의 관광지로는 애기봉·문수산성·용홧·장릉과 서곶을 들 수 있다. 특히, 1983년 김포문화원이 발족해서 향토문화유적발굴을 통한 문예진흥에 앞장서고 있으므로 관광지 개발에 기대가 큰 지역이다.

그 중 애기봉은 하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산봉으로, 북한땅이 가장 가깝게 보이는 곳이다. 또한, 이북땅에서도 마주 건너다 보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대형 트리를 세워 성탄을 축하하고, 4월 초파일에는 법회를 여는 등 각종 종교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애기봉은 지형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문수산성은 월곶면 성동리에 있는 산성이다. 숙종 때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은 성으로서 구한말 영·미함대가 습격했을 때 크게 효력을 발휘한 곳으로 유명하다. 산성에는 동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병인양요 때 모두 불타버렸다. 이곳에는 신라 진성여왕이 지은 문수사가 있다.

장릉은 조선 인조의 생부인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으로 풍무동에 있다.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마치 원시림 속을 거니는 느낌을 준다. 또한 입구에는 넓은 숲속의 빈터와 저수지, 그리고 금정사가 있어 경관이 아주 좋은 곳이다.

읍·면
  1. 고촌읍(高村邑)

시의 동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29.03㎢, 인구 2만 614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곡리이다.

1632년(인조 10) 인조의 생부 원종의 묘인 흥경원(興慶園)이 장릉(章陵)으로 승격되면서, 김포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관할하던 8개 면 중 고란태면(高蘭台面)과 임촌면(林村面)의 2개 면 지역으로 나뉘었다.

조선 후기까지 임촌면의 임(林)자가 임(臨)자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란태면 8개 리와 임촌면 4개 리를 통합해 5개 리로 개편하고 고촌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고란태면의 ‘고’자와 임촌면의 ‘촌’자를 따서 붙였다. 당시에는 면사무소가 풍곡리에 있었다가 후에 신곡리로 옮겨왔다. 면의 동부를 굴포천(掘浦川)이 관류하며, 비옥한 토지와 함께 수리시설이 발달해 있는 평야답작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해 오이 등 각종 야채류와 대추·은행의 생산량이 많은 편이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도 다수 분포한다. 교통은 48번 국도가 시가지 중심부를 관통하고, 39번 국도가 면 남동부를 경유하며, 352번 지방도가 한강을 접한 채 면 북단을 지난다.

문화유적으로 신곡리에 영사정이 있다.

신곡(新谷)·향산(香山)·풍곡(楓谷)·태(台)·전호(錢湖) 등 5개 리가 있다.

  1. 대곶면(大串面)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2.78㎢, 인구 9,96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율생리이다.

본래 김포·통진(通津)·양천(陽川)으로 분할되어 있던 지역으로, 조선 말 당시는 대부분이 통진군의 대파면(大坡面)·고리곶면(古里串面)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통진군의 대파면 전체, 고리곶면의 7개 리, 반이촌면(半伊村面)의 3개 리, 양릉면(陽陵面) 오라리(吾羅里) 일부를 통합해 14개 리로 편제하고, 김포군 대곶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대파면의 ‘대(大)’자와 고리곶면의 ‘곶(串)’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983년가현리(佳峴里)가 통진면(현 통진읍)으로 이관되었다. 면의 북쪽에 오봉산(吾峰山, 105m), 남동쪽에 수안산(遂安山, 147m)이 있다. 그들 여맥이 면내로 뻗어 각처에 낮은 구릉지가 있으나, 대부분은 평탄한 지형에 가깝다.

북부지역에 석정천과 거물대천, 중앙을 관류하는 가마지천(可麻之川) 주변에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해 보리·콩 등의 잡곡과 두류가 많이 생산되며, 특히 도토리의 생산량이 많다.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도 적지 않아 동력어선의 절대 다수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석탄·고령토·규석을 생산하는 2개소의 광산이 있다. 교통편은 352번 지방도가 중앙을 관통하고, 6·7번 시도가 남부를 13·16번, 시도가 북부를 연결하는 등 촘촘한 도로망이 분포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신안리에 덕포진(德浦鎭), 율생리에 김포수안산성(金浦守安山城)이 있으며, 약암리에 광은사(廣恩寺)·약암온천이 있다. 그리고 대명리에 대명포구가 있다.

율생(栗生)·대릉(大陵)·대벽(大碧)·상마(上馬)·약암(藥巖)·초원지(草元芝)·거물대(巨勿垈)·오니산(吾尼山)·송마(松麻)·석정(石井)·쇄암(碎巖)·신안(新雁)·대명(大明) 등 13개 리가 있다.

  1. 양촌읍(陽村邑)

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읍. 면적 33.65㎢, 인구 2만 582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양곡리이다.

본래 김포·통진(通津)·양천(陽川)으로 분할되어 있던 지역으로, 조선 말 당시는 대부분이 통진군에 해당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통진군 양릉면(陽陵面) 12개 리, 반이촌면(半伊村面) 10개 리, 상곶면(桑串面) 10개 리, 대파면(大坡面) 율생리(栗生里) 일부, 그리고 김포군 검단면(黔丹面) 금곡리(金谷里) 일부를 통합해 12개 리로 편성하고 김포군 양촌면이라 하였다.

면의 명칭은 양릉면의 ‘양’자와 반이촌면의 ‘촌’자를 합쳐 명명한 것이다. 1983년 마송리(馬松里)·도사리(道沙里)·수참리(水站里)가 신설된 통진면(현 통진읍)으로 이관되었다. 2011년 11월 양촌면이 양촌읍으로 승격되었다.

남동쪽 면계에 필봉산(筆峰山, 132m), 중앙에 학운산(鶴雲山, 112m)이 있으나, 면 전체는 대체로 평지에 가깝다.

서암천(西巖川)의 지류인 석모천(席毛川)이 누산 개간지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든다. 제일 넓은 경지면적을 자랑하는 김포평야의 중심지역이며, 특히 누산리 일대는 기름진 토지와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해, 영지버섯·화훼·포도 등의 특산물과 밤·도토리 등 임산물의 생산량도 많다. 정기시장이 1개 있다. 교통은 48번 국도가 북부를 관통하며, 특히 양곡리 일대는 305번과 352번 국도가 교차하면서, 5·10번 시도가 지나는 등 교통의 요지이다.

양곡(陽谷)·누산(樓山)·석모(席毛)·구래(九來)·대포(大浦)·학운(鶴雲)·유현(柳峴)·흥신(興新)·마산(麻山) 등 9개 리가 있다.

  1. 월곶면(月串面)

시의 북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51.95㎢, 인구 567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군하리이다.

본래 김포·통진(通津)·양천(陽川)으로 나뉘어 있던 곳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통진군의 월여곶면(月餘串面) 9개 리, 보구곶면(甫口串面) 5개 리, 군내면(郡內面) 9개 리, 질전면(迭田面) 4개 리의 일부를 통합해 15개 리로 개편하고 김포군 월곶면이라 개칭하였다.

면의 명칭은 월여곶의 ‘월’과 보구곶의 ‘곶’을 합해 만든 이름이다. 1983년 고정(高亭)·서암(西巖)·귀전(歸田)·동을산(冬乙山)·옹정(瓮井) 등 5개 리가 신설된 통진면(현 통진읍)으로 이관되었다.

면의 북서단에 있는 문수산(文殊山, 376m)을 제외하면 높은 산을 찾기 힘들다. 포내천이 면의 중앙을 관류하면서 형성한 평야지대에서 양질의 미곡을 산출한다. 그러나 시 전체에서 농경지 면적이 제일 적은 준산간 답작지대이다.

민통선과 접해 있어 개발제한이 많고, 시 전체에서 도시화 정도가 매우 더딘 곳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해 두류와 각종 채소, 특산물로 인삼의 생산량이 많고, 과일류로 배가 산출된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도 일부 있다. 고령토를 생산하는 2개의 광산이 있다.

교통편은 48번 국도가 남동쪽에서 면의 중앙을 횡단하면서 포내리의 강화대교를 통해 강화로 연결된다. 그리고 면소재지인 군하리를 중심으로 12·14번 시도가 사방을 연결하며, 면 북부에도 15·16번 시도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성동리·포내리 일대의 문수산성(文殊山城), 성동리의 문수사와 문수사풍담대사부도(文殊寺楓潭大師浮屠) 및 비(碑), 군하리의 통진향교(通津鄕校)가 있다. 관광자원으로 2개의 청소년 수련장과 문수산 산림욕장 등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다.

군하(郡下)·고막(古幕)·갈산(葛山)·고양(高陽)·포내(浦內)·성동(城東)·보구곶(甫口串)·용강(龍康)·조강(祖江)·개곡(開谷) 등 10개 리가 있다.

  1. 통진읍(通津邑)

시의 북쪽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29.50㎢, 인구 2만 757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마송리이다.

고려시대 이래 오랜 연원을 가진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도 통진부·통진군 등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통진·김포·양천 등 3개 군이 김포군으로 통합되면서 통진이란 명칭은 사라졌다. 그러다 6·25 이후인 1953년 7월부터 현 통진읍의 중심지역인 마송리·서암리 일대에서 5일장의 개설로 점차 인구가 증가하자, 주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면 설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72년 통진연락사무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83년 옛 명칭을 살려 통진면이 신설되었다. 이때 양촌면의 마송·도사·수참 등 3개 리, 월곶면의 옹정·고정·서암·귀전·동을산 등 5개 리, 그리고 대곶면의 가현리를 병합해 9개 리가 되었다. 2004년 1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100m 이상의 산이 없어, 대표적인 평야혼작지대이다.

주요 농산물로 쌀·잡곡을 비롯해 인삼 등이 산출된다. 특히, 귀전리 일대를 중심으로 재배되는 자광미(紫光米)는 전국에서 유명하다. 이 쌀은 ‘밀다리쌀’이라고도 불리며, 이천의 ‘자채쌀’과 함께 진상미로 알려질 정도로 그 품질이 우수하다.

이 밖에 비닐하우스 채소, 특용작물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시 전체에서 제일 큰 규모의 정기시장 1개가 위치해 있다. 교통은 48번 국도가 면의 중앙부를 관통해 강화로 연결되며, 마송리에서 305번 지방도와 만나고, 9·11·12번 시도가 면의 남북을 이어준다.

문화유적은 옹정리에 심연원신도비(沈連源神道碑), 그 아들인 심강신도비(沈鋼神道碑)가 있고, 고정리에 지석묘가 있다.

마송(馬松)·서암(西巖)·도사(道沙)·수참(水站)·가현(佳峴)·동을산(冬乙山)·귀전(歸田)·고정(高亭)·옹정(甕井) 등 9개 리가 있다.

  1. 하성면(霞城面)

시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4.85㎢, 인구 8,65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마곡리이다.

본래 김포·통진(通津)·양천(陽川)으로 나뉘어 있었고, 조선 말까지도 통진군의 4개 면으로 각기 나뉘어 있던 상태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통진군 하은면(霞隱面) 3개 리, 봉성면(奉城面) 5개 리, 소이포면(所伊浦面) 15개 리, 질전면(迭田面)의 일부를 통합해 12개 리로 개편하고 김포군 하성면이라 개칭하였다. 면 명칭은 하은면의 ‘하’자와 봉성면의 ‘성’자를 합친 것이다.

한강 하류인 애기봉(愛妓峰)을 중심으로 북한과 최단거리에 있으며, 양택천(楊澤川)이 동쪽으로 흘러 양택저수지를 이루고, 후평리·석탄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든다. 그 주변의 드넓은 농경지에서 양질의 미곡을 생산하고 있다.

석탄리 일대는 통진읍 귀전리와 함께 김포쌀을 대표하는 ‘자광미’가 산출되는 옥토로서 유명하다. 그 밖의 농산물로는 채소·인삼·버섯과 시설원예·화훼 등인데, 특히 인삼의 생산량이 많다. 1개의 정기시장이 열리고 있다.

교통은 마곡리를 중심으로 9·12·14·15·17번 시도가 면 전체를 사통팔달로 연결하며, 기타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가금리에 장만선생영정(張晩先生影幀) 및 공신녹권(功臣錄券), 이목(李穆)의 위패를 봉안한 한재당(寒齋堂)이 있다.

마곡(麻谷)·석탄(石灘)·후평(後坪)·시암(枾巖)·마조(麻造)·신(新)·가금(佳金)·양택(楊澤)·원산(元山)·하사(霞沙)·봉성(奉城)·전류(顚流) 등 12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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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경기연감』(경인일보사, 1997)
『경기도 역사와 문화』(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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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찰현황』(문화체육부, 1997)
『김포군 지명유래집』(김포군, 1995)
『금포군지』(금포군, 1993)
『지명유래집』(경기도, 1987)
『한국행정제도사』(정시채, 법문사, 1986)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6·1957)
김포시(www.gimpo.go.kr)
김포교육청(www.gpo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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