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

공주 고마나루
공주 고마나루
교통
개념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교통용어.
내용 요약

나루는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교통용어이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진(津)이라고 하고 좀 큰 것을 포(浦), 대규모의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고 했다. 그 중 주요 강이나 바닷목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킨 것을 진(鎭)이라고 했다. 육상의 역참과 도진의 나루는 중앙의 명령을 지방으로 전달하고 지방 각지의 조세곡을 중앙으로 집결시키는 교통로 역할을 했다. 물산과 사람들이 나루를 중심으로 모여들면서 나루는 문화의 발생과 교류지 역할도 했다.

정의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교통용어.
개설

어원

어원은 밝히기 어려우나,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이었던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나루에 관한 용례이다. 나루는 나라와 어원이 비슷하여 고대의 원시적 형태의 국가가 강가 등지에 위치하여 인근 부족의 교역을 중개하고, 한편으로 무력으로 상업적 질서를 유지한 데서 기인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배로써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에서 ‘나루’라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 · 진(津)이라고 하고 좀 큰 것을 포(浦), 대규모의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중요한 강이나 바닷목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군대가 주둔하면서 지키는 것을 진(鎭)이라고 나타내기도 하였다. 특히 큰 강 하구나 바다 항구에는 포를 많이 썼다.

그 예로는 서울의 마포(麻浦), 평안도의 진남포(鎭南浦), 황해도의 몽금포(夢金浦), 경기도의 제물포(濟物浦), 충청도의 남포(藍浦), 전라도의 줄포(茁浦) · 목포(木浦), 경상도의 삼천포(三千浦), 부산 일대의 삼포(三浦 : 釜山浦 · 鹽浦 · 薺浦), 강원도의 경포(鏡浦), 함경도의 광포(廣浦) 등을 들 수 있다.

진이 들어간 지명으로는 경상도의 삼랑진(三浪津), 함경도의 어대진(漁大津) · 청진(淸津), 강원도 북부 동해안의 안인진(安仁津) · 화진(花津, 花津浦) · 주문진 등이다. 한문으로 굳이 진 · 포 · 도라고 하지 않고 강인 경우에는 ‘나루’라고 통용하였는데 서울 한강의 광나루 · 동작나루 · 송파나루 · 양화나루 · 노량나루 등이 그러한 예이다.

원래 나루는 수운, 곧 물을 이용하는 교통의 요지이므로 시대에 따라서 물을 이용하는 교통 수단의 변화나 연결되는 육로의 개설, 교량의 건설 등의 요인에 의해 그 중요성이 변화하고 혹은 영영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또 강에 모래가 쌓여서 이전보다 얕아지고 좁아진 결과 배가 그 곳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영산포(榮山浦)와 같이 이름만 남은 경우도 있다.

나루에는 나룻배가 있어서 강을 낀 마을 사람들이 이 나롯배로 강 건너로 장 보러가기, 관청일 보기, 학교 다니기, 농사 짓기, 물건 싣기 등을 한다. 사공이 없을 때는 양쪽 강안에 튼튼한 쇠 밧줄을 걸어서 그 줄을 잡아당기며 나룻배를 움직이기도 한다.

역사적 정비과정

고대국가가 형성되고 중앙집권의 체제가 점차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우선 사람들의 내왕과 더불어 물자의 수송과 특히 중앙집결이 선결 문제가 되었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은 농업 사회에서는 조세곡이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를 수송하는 수단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육로에는 역참제도(驛站制度)가, 수로에는 조운제도(漕運制度)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수로를 이용하는 강가의 강창(江倉)과 해안 포구의 해창(海倉)까지 조세곡 등의 물자 수송을 담당한 곳은 육로의 각 역과 더불어 전국 각처에 산재하고 있는 강안의 나루였다.

중국에 연원을 둔 역참제도가 우리 나라에 실시된 것이 언제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같은 시기에 인근 지역의 역에서 나루도 관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과 각 나루를 포함한 육상교통로를 경유하여 모아진 조세곡 등을 중앙까지 수송하는 조창제도가 국가적 기구로 제도화된 것은 문헌상으로 볼 때, 고려 시대인 992년(성종 11)이다.

이어서 조선 시대에 이르면 ≪경국대전≫에 나루의 관리 등에 관하여 자세한 법률이 성문화된다. 각 나루의 발생은 국가에서 제도화하기 전에 이미 하천 연변의 지리적 사정으로 자연히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고 이를 국가의 권력 집중을 위하여 통제 관할하게 된 것이다.

나루의 기능과 구조

교통의 결절지

나루는 교통로와 연결되어 발달한다. 교통에 이용되는 노선은 육로 · 수로 · 공로의 단계를 밟게 되는데, 육로는 보행에 이용되는 것이므로 교통 장비를 갖추지 않은 단계에서 이용되는 초보적인 교통 노선으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육지가 연속되고 보행이 가능한 곳에서는 일찍부터 육로가 발달되어왔다.

그러나 큰 강이 흐르고 해협이 가로놓여 육로를 차단하는 상황에서는 육로를 연결하는 결절점(結節點)이 필요한데 이것이 나루이다. 나루는 교량 건설이 불가능하였던 전근대적인 상황에서 보편화되었으니 과학과 토목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사회와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하천과 해협에 의하여 육로가 차단됨으로써 더 이상의 보행이 불가능한 장소인 나루에는 육로를 연결해 주는 도하의 장비가 필요한데 이것이 배이다.

배는 수상교통의 표본적인 장비이며 나루의 상징적인 시설물이다. 그러므로 나루에는 구조와 규모가 다르며 소유관계(官有 또는 私有)가 다르다 할지라도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배를 도선, 도하선이라고 하며 배에 의하여 연결되는 양안의 나루를 도선장(渡船場, 또는 船着場)이라고 한다. 교통의 의미는 거리와 시간을 단축하는 데 있다.

만약 육로가 차단되고 있는 강가에 이를 연결해주는 나루 또는 선착장이 없다면 보행이 가능한 곳을 따라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거리는 확대되고 시간 소요는 상대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나루에 관한 교통의 가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나루는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지점에도 발달한다. 사람의 등짐보다는 우마차가, 우마차보다는 배가 대량 운반이 가능하다. 그래서 거리가 멀거나 지형 제약이 많은 곳에서는 배의 이용도가 높았다.

수상교통에 의존도가 높았던 조선 시대의 상황에서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전라도 지방의 조운은 해로를 이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는 기록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도진취락의 발달

도하(渡河)를 하거나 소강(溯江 :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할 경우 내륙 수로와 관련된 나루에는 도진취락이 형성되었다. 나루는 교통의 요지가 되는 관계로 통과객과 물품의 이동량이 많았다.

여객과 물품 이동의 장비는 배이며 배는 사람에 의하여 운행되므로, 나루에는 일찍부터 도하에 생업 기반을 둔 사람이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도진취락이다.

이곳에는 사공과 그 가족이 거주하는 가옥, 여객과 화물을 이동시키는 장비로서의 도하선, 여객의 숙박과 물건을 보관하는 객주집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취락의 경관과 구조가 일반 농촌과 다르다. 도진취락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 기능 구조에 있다.

일반 농가가 토지 경제에 의존도가 높은 것과 대조적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비토지적인 것에 생업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교통기능과 관련된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표적인 도진취락은 벽란도(碧瀾渡)에서 찾을 수 있다. 예성강의 동안에 위치하고 있는 벽란도는 행정 구역상으로 경기도 개풍군 서면 연산리에 속한다. 예성강은 국지적으로 경기도와 황해도의 접경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크게 한반도의 중부와 서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더욱이 고려 시대 이래 도성이 중부에 입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교류는 반드시 이 통로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예성강의 동안으로 백년산 줄기가 뻗어 있고 서안으로는 미라산이 솟아 강폭이 좁으면서 깊은 수심과 빠른 세를 유지하여 도하하기에 알맞다. 그래서 도강지로서 일찍부터 선택되었고 그 기능의 수행과 관련하여 고려 시대 이래 도진취락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도 대륙과의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교섭 통로의 요지에 해당하는 벽란도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다.

여기에다 개성은 상업의 중심지로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있었던 관계로 이 통로를 이용한 화물과 사람의 이동이 활발하였다. 심지어 서해에서 예성강구를 따라 강을 거슬러 화물 이동이 이루어졌으니, 벽란도는 해륙과 내수 교통의 결절지였으며 해외 교통의 요충지로 이름이 높았다.

교역장과 요새 기능

나루는 여객과 화물이 집결하는 장소가 되는 까닭에 단순히 통과지의 성격을 안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역장의 구실도 하게 된다. 금강 유역의 강경(江景)은 교역장으로 번영을 누렸던 나루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성기의 강경은 정기시를 맞으면 200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이 강구를 거슬러 올라와 충주 지방을 제외한 오늘의 충청 지방에까지 상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철도가 부설되면서 내륙수로가 속도와 수송량에서 뒤지고 철도와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그 기능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퇴화하는 기능마저 철도역 주변으로 이동되었으니 나루 주변은 구시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구시장에는 사양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선착장의 하역 작업에 동원되는 100여 호의 노동 가구와 음식점을 경영하는 70여 호의 상업 가구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당시의 번영상을 추정해볼 수 있다. 더욱이 나루가 항행하기 힘든 협곡이나 해협에 위치한 경우 요새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협곡과 해협은 선박을 이용해야만 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군사적인 면에서는 병력이동을 차단하기에 알맞은 장소가 된다.

하천의 폭이 좁고 여울과 암초가 많은 곳에 군사적인 차단 기능이 발휘된다고 전제할 때, 남해해협의 노량진, 진도해협의 벽파진에서와 같은 곳에서 그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두 지역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전공을 올린 격전장으로 유명하다. 특히 벽파진에 관해서는 나루 기능이 발휘되었던 당시 이곳을 통과하던 사람들에 의하여 지리적 사정이 관찰되었다.

관찰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동서가 수로로 분리되어 있는 섬으로 되어 있고 해안에는 석벽이 솟아 있다. 또한 바다의 너비는 수십 보밖에 안 되나 유속이 빨라 소용돌이가 일고 상경하는 배들은 이를 피하여 옆으로 세웠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이 철쇄를 가로질러 설치하여 전승을 올렸다고 한다.

나루의 역사

역사적 제도의 정비과정

중앙집권적 관료정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히 신속한 중앙의 명령 계통으로 교통 수단이 된 것이 육상에서는 역참이 있었고 강안의 도진에는 나루가 있었다. 역참이 우리 나라에서 실시되기는 신라 때부터이며 그 기원은 중국에 있다.

따라서 역참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나루가 우리 나라에서 제도상 발생한 기록이 전승되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역의 교통 수단이 비각(飛脚, 人足)과 마필이었다면, 나루는 도선을 주요 수단으로 한다. 이와 같은 나루에서 일하는 뱃사공을 고려 시대에는 진척(津尺)이라고 하였고 이들은 역정(驛丁) 등과 마찬가지로 천민층에 속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 역시 역참의 역졸과 더불어 각 나루와 육로를 통하여 조세곡이 집결되는 강변과 해안에 설치된 조창(漕倉)에는 조졸(漕卒) · 수부(水夫)가 있었는데 몸은 양인이나 역은 천역에 종사하여 천류의 대우를 받았다. 또한 전국에 산재한 각 나루에는 진부(津夫)라는 칭호로 불리는 뱃사공이 있었다.

이와 같이 국가의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육상 교통로와 연결되는 하천 연변에 나루가 설치되고 이를 경유하여 조세곡 등 물자를 서울로 수송하는 조창이 전국적으로 정비되어 기구화되고 국가 재정의 근원을 이루게 된 것은 10세기 말경이다. 이 조창은 당시 국가 재정에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조운의 경영에 각별한 국가의 시책이 집중되었다.

당시 이와 같은 조창은 개경 이남에 12개소, 그 이북에 1개소가 설치되었으며 각 조창은 한강 상류 지역과 서해안의 포(浦)에 위치하여 내륙의 역과 나루의 교통로를 통하여 집결한 세곡을 개경의 경창까지 수송하도록 하였다.

도선권과 나루 관리

조선 시대의 역참 및 조운과 같이 조세나 각종 물자 수송 등의 국익에 관계되는 각 나루의 도선 문제와 관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나룻배는 5년이 되면 수리하고 10년이 되면 개조하도록 하였다. 강선(江船)의 경우에 길이 50척 너비 10척 3촌 이상인 경우에는 대선으로 하고, 길이 46척 너비 9척 이상인 경우를 중선으로 하며, 길이 41척 너비 8척 이상되는 배는 소선으로 하였다(해선이나 어선도 모두 동일하였다).

② 각 나루의 관선(官船)은 선적(船籍)에 기록하고 척수를 정하여 제군문(諸軍門)에 분속시켰으며 별장을 파견하여 검사, 감독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광진에는 4척, 송파에는 9척, 삼전도에는 3척, 신천에는 2척, 한강도에는 15척, 노량진에는 15척, 양화도에는 9척, 공암에는 5척, 철곶에는 1척을 두었다.

③ 송파의 별장은 광진 · 삼전도 · 신천의 관선을 동시에 관리하며 이는 수어청(守禦廳)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한강의 별장은 훈련도감에, 노량진의 별장은 금위영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양화도 별장은 공암과 철곶의 관선을 겸하여 관리하였는데 어영청 소속으로 병조에서 임명, 파견하였다. 양근(楊根)의 용진(龍津)은 훈련도감에, 파주의 임진(臨津)은 총융청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각 군문은 별장을 자유로이 임용하였고, 지방관은 진부를 정하여 복호(復戶)를 지급하였으며 사선을 임대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④ 각각 소속이 다른 선박을 타고 타 지역으로 함부로 건너가는 자는 그 신분을 막론하고 율에 정해진 대로 논죄하도록 정하였다. 이 경우 선주가 발견 즉시 관에 고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동일한 죄로 이를 벌하도록 하였다.

⑤ 각 나루의 도선 및 내왕선이 파손되었을 경우 다른 선박을 가진 사람이 이를 즉시 구출하지 않을 때는 선주와 진부가 모두 장 100의 벌을 받으며 별장은 곤장의 벌에 처하도록 하였다.

⑥ 경강의 민유 선박은 매년 이를 조사하여 모두 원전에 규정된 대 · 중 · 소의 크기에 따르며 문자로 부호를 새겨 낙인을 하고, 선주의 성명을 선적에 갖추어 기록해 두고 1년에 한번씩 세금을 받아들인다. 모든 선박은 1년에 3냥을 납세한다. 그러나 선박에 낙인이 없거나 허가증이 없고 선적에 등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배액을 징수하였다.

만일 공용 땔감이나 사료를 적재하고 내왕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반감하여 이것으로써 나룻배의 개조에 보충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 나루의 나룻배는 소재지의 고을 수령이 선적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며 이를 군수에 보충하고 연초 때마다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한다.

⑦ 제궁가나 각 관청의 선박도 역시 그 척수를 정하고 선적을 만들어 감세하되 소정된 척수 이외의 선박에는 감세하지 않았다.

⑧ 어렴(漁簾)의 상선으로서 내사 및 각사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이를 모두 폐지하되 강안 나루터 사람으로서 도고(都庫)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였다.

⑨ 대로의 나루터에는 진부를 평상 10인으로 배정하였고, 한강나루 · 노도나루 · 삼전도나루에는 10인을 추가하였다. 또한 중로의 나루터에는 6인, 소로의 나루터에는 4인을 배정하였다.

주막

시골 길가나 나루터에는 으레 술과 밥을 팔고 나그네를 유숙시키는 여관 겸 주점이 있었다. 특히 나루터에는 역로와 같이 관인, 장사꾼의 내왕이 많았으며 관용 화물 및 상품의 적재 등을 위해서 관민이 많이 집결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주막이 있었다.

이곳에는 주로 여자가 주인인 경우가 많았고 막걸리 · 청주 · 소주 등을 팔았다. 큰 나루터 주막에는 거간꾼과 관인들의 내왕이 빈번하였으며 창녀를 둔 곳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나루

나루의 분포

나루의 분포 유형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육로의 연결점에서 하천을 횡단하여 도하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하구에서 수로를 따라 가항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이다. 셋째는 해수로를 따라 항해함으로써 해상 통로의 통과 지로서의 성격을 발휘하거나 도해하여 도로망과 연결되는 경우이다.

도로망은 이미 고려 시대에 대로 · 중로 · 소로의 3등급으로 나누어져 체계가 확립되었으므로 이때에 이미 나루는 육로의 결절점에 발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나루의 확증은 조선 시대에 와서 비로소 드러난다. 당시에도 교량 건설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나루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특히 서울의 남쪽을 흐르는 한강변에는 상류 쪽에 광진 · 삼전도 · 두모포 · 한강도 · 노량진 · 마포 · 서강 · 양화진 등의 나루가 있어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를 연결시켜 주었다.

이들은 오늘날 교량 건설로 인하여 그 기능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화 과정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나 지명을 통하여 과거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상기할 때, 한강 이외의 지역에도 도 · 진 · 포의 지명이 계승되고 있는 강변취락은 나루에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항 종점은 자연 · 사회경제 조건과 관련하여 지역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연 조건의 경우, 내륙수로를 항해 활동의 무대로 보는 이상 수심이 깊고 계절 변동이 없으며 유속이 느려야 한다.

그러나 수운은 화물과 여객을 시발점과 종착지 사이에 이동시키는 목적이 있으므로 배후지의 사회경제 조건에 영향을 받게 된다.

결국 한강이 우리 나라에서 최장의 하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륙수로의 가치가 크고, 강변을 따라 도하지로서 나루가 집중분포한 것은 조선 시대 이래 강북을 끼고 도성이 자리하여 정치 · 문화의 중추 기능을 가진 데 연유한 것이다.

중추 기능을 가진 통치 거점은 종속 지역의 원만한 통치를 위해서 관리의 출장과 공문서의 전달을 정기적으로 수행해야 되는 까닭에, 기능 수행과 관련된 도로망이 국토 전역을 향하여 방사선상으로 발달되는 것이다.

해로변의 나루는 다도해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다도해는 남해안과 서해안의 남부에 전형적으로 형성된 점과 관련하여 이곳으로 나루의 분포지를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나루의 공통된 입지는 한반도에서 섬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길목은 항(項)으로 표현되므로 항이라는 지명 또한 나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진도해협의 울돌목을 벽파항(碧波項, 혹은 벽파진), 금강 하구의 하항취락을 장항(長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나루에서 연유한 것이다.

장항과 군산 사이에는 교량이 부설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도하선의 운행으로 연결되었고, 도하선의 운행 근거지가 되는 도선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밖에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의 길목에는 탐진(耽津)과 이진(梨津)이, 남해도와 연결되는 해로의 길목에는 노량진이 있었다.

대 하천의 대표적 나루

왕도가 위치한 통치 거점에 근접하고, 지방의 주군현을 연결하는 대로를 가로지르는 서해 사면의 하천일수록 나루가 발달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강변은 나루의 밀집 지대가 될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관북과 관서 지방을 제외한 관동과 삼남 지방이 한강을 경유하여 연결되기 때문이다.

서울∼강릉은 광진으로, 서울∼부산은 삼전도로, 서울∼통영(호남과 충청 지방은 이 대로에서 갈라진다.)은 동작진으로, 서울∼강화는 양화진으로 각각 연결되는데, 이들 나루는 오늘의 서울 중심을 관류하는 한강 본류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삼전도(송파)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와 관련하여 도진취락으로 한때 번영을 누렸다.

또한 이곳에는 인간과 물자의 집적으로 객사를 주축으로 하는 숙박업이 활기를 띠어 한말에는 273호의 대취락이 형성되었다. 서울의 북쪽에서 관북과 관서 지방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임진강을 통과하게 된다.

임진강에는 남안에 임진나루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관북의 서수라로(西水羅路)와 관서의 의주로(義州路)가 분기된다. 서수라로는 고랑진(高浪津)을 경유하고 의주로는 개성을 지나 예성강의 벽란도를 경유한다.

금강은 호남과 기호 지방의 육로를 차단하고 있는 점에서 한강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통치의 말단 지역에 지나지 않는 배후지의 사정으로 인하여 나루는 크게 발달되지 못하였다.

강 입구로부터 용당진(龍堂津) · 남당진(南塘津) · 청포진(菁浦津) · 고암진(鼓巖津) · 강진(江津) · 웅진 등이 있으나 한강 유역의 경우처럼 대규모의 도진취락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소항종점(溯航終點)인 강경은 번성하였으며 이곳은 상선 집결지로 알려졌다. 하항의 내륙 진출은 수로로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자연환경 이외에, 왜구로 말미암아 조창의 입지를 강구에서 내륙으로 이동시켜야 하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큰 강임에 틀림없으나 육로의 방향과 병행하고 있는 본류보다 내륙을 가로지르는 지류(특히 남강)에 나루가 많다.

용진 · 수산진(守山津) · 손가진(孫哥津) · 주물진(主勿津) · 도흥진(道興津) · 정암진(鼎巖津) · 삼랑진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 중 본류와 지류의 합류점에 있는 삼랑진은 철도 부설로 말미암아 나루의 명맥을 유지하던 송지동에 철도의 새로운 기능 부여와 관련하여 삼랑진읍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영산강은 유로가 육로의 방향에 교착되고 있으나 하천의 규모가 작은데다 통치의 말단 지역에 해당하여 나루의 발달이 극히 미약하였다. 다만 강구로부터 소항하는 내륙 하항이 영산포를 중심으로 발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수로가 험하여 조선(漕船)의 전복 사고가 많았으므로 법성포로 조창을 이전하게 되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오히려 중앙부를 관류하는 섬진강을 따라 호남과 영남 지방을 잇는 나루가 교통상의 가치가 높았다. 그래서 하동 쪽의 두치진(豆恥津)과 광양 쪽의 섬진은 남부지방의 평야지대를 통하여 동서를 잇는 교통의 결절점이며 관문 구실을 하고 있다.

나루와 문화

문화의 발생과 교류지로서의 나루

나루는 육지와 물이 접하는 곳이며 사람이 배를 타고 내리는 동적(動的)인 장소이다. 육지의 문화가 물로 떠나는 곳이기도 하고 물의 문화가 육지로 올라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뭍과 물의 문화가 교류, 접합이 이루어진다.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주몽(朱蒙)은 부여에서 탈출하여 남하하다가 압록강 상류인 엄체수(淹滯水)를 만나게 되었다.

뒤에는 추격병이 있고 앞에는 물이 가로막은 위기 상황에서 그는 겸허한 자세로 하늘과 땅과 물에게 살려달라고 간구하였는데, 신이 이 소원을 들어주어서 주몽은 물고기와 자라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라 건국신화에서 석탈해(昔脫解)는 처음에 수로왕이 다스리는 김해 지방에 침범, 상륙하려다가 실패하고 신라의 동해안에 상륙하여 드디어 신라의 왕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일족과 후손이 신라의 중심 세력권을 형성함으로써, 외래인으로 배척과 실패, 환영과 성공의 양면성을 가지는 나루의 사용자가 된다. 그런가 하면 동시대의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 일행은 환영을 받고 별포(別浦)에 상륙하여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다. 허 왕후보다 후대에 속하지만 제주도의 고(高) · 양(梁) · 부(夫) 삼씨의 배우자도 배를 타고 제주도에 상륙한 외래인이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 있어서 물과 그 물이 육지와 접하는 나루는 대단히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물과 뭍이 접하는 나루에는 외래문화를 가진 세력이 재래문화 및 세력과 만나는, 달리 말하면 충돌과 갈등이라는 부정적인 국면과 융합과 조화라는 긍정적인 국면이 발생한다.

단군신화의 경우는 영웅이 하늘에서 땅에 수직적으로 하강할 때의 첫 도착지가 산정인데, 석탈해신화의 경우는 나루가 산정에 해당한다. 한편, 나루에 도착하는 측면 이외에 나루에서 출발하는 측면도 있다.

김해 지방은 낙동강 하구로써, 인도와 중국과 한반도 북방에서 유입되어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용비어천가>에서의 익조는 바다가 갈라져서 적도라는 섬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영웅은 이러한 기적으로 물을 건너지만 보통 사람은 기적 대신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넌다. 나루는 건너편 강안의 도착지로서의 나루와 마주보고 있다.

물을 건너온 것은 새로운 것이 되며 물로 향하는 것은 이곳의 사람과 물산 및 문화를 저 건너로 내보내는 것, 곧 전달과 수용의 교환 장소로서의 나루가 된다. 그러므로 나루는 사람이 법석대며 다양한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문학과 나루

신화의 예를 제외하더라도 문학에서 나루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나루에는 뱃사공이 있고 이 사공은 바로 출입자의 협조자가 되며, 나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의 목격자가 되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고대 시가 가운데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는 그 무대가 나루이며 그 노래의 전달자는 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였다. 술병을 든 백발의 미친 노인인 남편이 나루에서 물에 빠져 죽자 뒤따라오던 아내가

임은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으셨네

임은 장차 어이하리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

라는 노래를 공후로 연주하고 이내 뒤따라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 <공무도하가>는 노래와 사연을 목격한 사공이 후세에 전한 것이다. 이것은 나루라는 공간에 사공이 결부된 작품으로 나루가 문학적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에는 도미(都彌)의 이야기가 있다. 평민인 도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답고 절개 있기로 소문이 나 백제 개루왕이 궁중에 데려다가 범하려 하였으나, 정절을 지키고 탈출하여 눈이 먼 남편 도미를 만나서 다시 살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도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도미의 처가 왜 그렇게 소문이 났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사건이 조금 굴절되어 실려 있다.

도미에 해당하는 남편은 석하순(石河楯)이라고 하여 석하라는 강의 뱃사공으로 되어 있고 아내는 지진원(池津媛)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나루터의 여인이다.

개루왕이 일본 사신을 통해서 백제 미인인 ‘나루터 여인’을 왜에 바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일정한 굴절이 있다고 하겠다. 결국 개루왕과 도미의 처인 나루터 여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에서 배에 실려 떠 내려간 남편 도미를 쫓아서 배를 타고 탈출하여 드디어 남편을 만난 도미 처의 행적을 보면 분명 사공의 아내로서 물길에 익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뭇 사람이 들락거리는 나루에서 집안에만 있을 수 없는 사공의 아내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서 세상에 소문이 난 것이 이 <도미 전설>의 발단이므로, 나루터는 소문의 발생지가 되는 곳이며 밀접한 관계가 격리되는 이별의 장소이고 떠나가 버린 임을 부르는 안타까운 장소이다.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으로 왕의 아우를 구하러 나루(栗浦)를 떠날 때, 뒤따라온 아내가 통곡하다가 치술령 산 위에 올라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죽어서 망부석 · 산신 ·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가운데 새는 살아서 육신으로 건널 수 없는 나루의 한계를 죽어서 혼백으로 자유롭게 날아가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뜻한다.

죽음으로 새가 되지 못한 살아 있는 사람의 나루터의 이별은 바로 단장곡(斷腸曲)이 되는 것이다. 공주 <곰나루전설>은 어떤 사람이 산에 들어갔다가 암콤에게 잡혀 그의 남편이 되어 자식까지 낳고 살았으나 인간이 그리워서 탈출하여 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니 뒤따라오던 암콤이 돌아오라고 울부짖다가 자식까지 죽이고 저도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의 곰이 짐승인지, 혹은 곰으로 상징되는 부족의 이름인지 아니면 어떤 사건을 비유한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지명으로써 천년 이상이나 곰나루로 전해온 것을 보면 지명전설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하겠다. 이 전설에서 나루는 사람에게 협조적이며 곰에게는 비협조적이라는 선별 · 구별 · 격리의 의미가 들어 있다.

≪고려사≫ 악지(樂志)의 <예성강곡 禮成江曲>을 보면, 당나라의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예성강가의 나루 근처에서 한 미인을 보고 탐하여 그 남편과 내기바둑을 두었는데 거기서 이겨 미인을 배에 싣고 떠날 때 남편이 회한의 노래를 불렀다.(예성강곡 전편)

그런데 미인의 정절에 감동한 배가 움직이지 아니하자 놀란 하두강이 미인을 다시 남편에게 돌려보내 남편이 기뻐하였다는 내용(예성강곡 후편)이 실려있다.

또 고려가요 <서경별곡 西京別曲>은 평양에 살던 어느 여인이 대동강 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나가는 임을 보내며 안타까워 하는데 애꿎게 사공이 그 원망을 듣는다는 내용이다. 고려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시 <대동강>에서

비갠 긴 강둑엔 풀잎이 이들이들

남포에 임 보내니 슬픈 노래 북받치네

어느 제 마르오리 대동강 푸른 물

해마다 저 강물에 이별눈물 더 보태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라고 하였는데 이 시에서도 나루에서의 이별 장면을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의 어떤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한덩이를 줍자 우애가 금갈 것을 걱정한 나머지 한강[孔巖津 : 김포 근처]에 던져 버렸다는 <형제투금전설>이 있다.

황금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우애 이상은 아니기 때문에 버렸다고 하는 이 전설에서 나루는 여러 사람을 교육하고 감동을 주는 장소가 되고 있다.

또 걱정 근심이 없는 무수옹(無愁翁)을 왕이 불러서 근심을 주려고 한강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왕의 선물을 물에 빠뜨리게 한다는 민담에서도 나루는 교육과 충격의 장소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자 뱃사공의 배를 탄 짓궂은 손님이 “내가 당신 배를 탔으니 남편이구려.”라고 농담을 하자, 여자 사공이 “네가 내 뱃속에서 나갔으니 내 아들이구나.”라고 응수하였다는 해학담에서도 충격과 낭만을 찾아 볼 수 있다.

또, 멀리 외국으로 떠나간 사람이나 고기 잡으러 나간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초조함과 기다림과 기쁨의 무대가 된다.

갯마을의 만선에서, 민요 <몽금포타령>의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라고 한 것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바다[苦海]를 벗어난 사람이 저 건너편 강 언덕[彼岸]의 나루에 도착한다고 하는 비유를 쓰는 점에서 생사 및 고통과 해탈의 분기점이 나루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허생전 許生傳>에는 나루가 무역을 해서 벌어들인 부의 상징이며 도적을 외딴 섬으로 싣고 가서 그곳을 개간하여 별세계를 만든다는 가능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육지 사람 쪽에서는 도적이 떠나가 안정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도적은 떳떳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허생전>의 나루는 부와 안정의 뜻을 담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의 <변산전설>에 따르면 허생이 변산의 도적에게 잡혀와 어쩔 수 없이 두목이 되었는데 격포를 떠나 대마도에 이르러 도적들을 살게 하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서도잡가인 <배따라기>는 배가 나루를 떠나가는 배떠나기에서 와전된 말인데 중국 사신이 축복을 받으며 떠나가는 밝은 노래이다.

하지만,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배따라기>에서는 오해를 받고 떠나버린 동생을 찾으러 다니는 형의 한맺힌 노래이다. 배가 떠나가듯이 동생이 떠나갔다. 배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듯이 동생을 언제 만날지 모른다. 이와 같이 나루의 이별이 현대소설의 제목에서 절실하게 축약되어 나타나게 된 경우도 있다.

또 강나루를 건너가면 요즈음 역을 떠나듯이 나그네가 된다. 자유롭고 고독하고 정처없는 방랑이 그에게 있기에 나루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준다. 바로 박목월(朴木月)의 <나그네>가 그러한 정서를 잘 나타내준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강나루, 곧 나루를 건너서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문학에서의 나루는 떠남 · 찾아옴 · 헤어짐 · 만남 · 싸움 · 슬픔 · 쓸쓸함 · 넉넉함 · 편안함 · 새로움 · 살아남 · 소문이 퍼짐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으며, 평범하고 정적인 장소가 아니라 변화와 이질적인 것의 만남을 상징한다. 나루가 없는 고장과 나루가 있는 고장을 비교해 보면 이런 문학적인 양상은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미술과 나루

자연을 미술의 소재로 할 때, 천지 · 산천 · 초목 · 강촌 등이 표출된다. 이 가운데 나루는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그림의 소재로 적합하다. 그 중 하나는 뭍이며 또 하나는 물이며 나머지는 그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배와 나루터 근처의 마을과 주변의 풍광을 담고 있다. 문학과 나루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상황이 그림에 담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루는 배가 떠나고 들어오는 것,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어떤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강변에 배가 슬그머니 매어 있는 그림에서는 비록 물소리가 날망정 온 누리가 정적에 파묻힌 듯한 정감을 준다. 그것은 원래 나루의 이미지가 시끌벅적한 만남의 장소인 것과 강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뱃사공이 물 위에서 노젓는 광경을 보면 유유히 강과 어울리는 한가함을 느낄 수 있다. 또 강에서 잡은 고기를 뭍에 올리는 광경에서는 고생 끝의 즐거움과 한때의 풍요로움이 드러난다. 나루에서 길이 끊긴다고 볼 수도 있고 또는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루의 길은 그 자체가 진행 방향을 제시한다.

조선 시대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는 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과 낚시질하는 광경이 다 들어 있다. 특히 나루터에서 낚시질하는 낚시꾼의 조용한 모습이나 한가로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저 멀리에 어촌이 배경으로 있는 그림에서 여유와 한가로움과 멋을 찾아볼 수 있다.

나루의 그림은 화가가 나루를 어떻게 수용하여 표출하였는가, 그 표현인 그림이 보는 사람에게 어떤 감동을 주는가가 핵심인데, 우리의 그림은 정과 동, 근면과 여유를 뭍과 물과 사람을 조화시켜서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나루의 어제와 오늘

대형 토목 기술의 발달에 의한 교량 건설 및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 근대적 교통 수단의 등장은 나루의 기능을 빼앗아갔다. 기능 상실은 주민들로 하여금 생업 기반을 전환시키고 취락의 구조를 급변시켜, 지금은 나루의 원상태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루가 가장 많이 있는 한강변의 경우, 광진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구간이 서울의 도심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통과 수단으로 나룻배 대신 자동차와 전철이 질주하게 되었으며, 나루 주변의 인가와 객사 대신 아파트와 같은 고층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경관과 지역 구조는 변하였으나 나루가 있었던 곳에 진 · 도 · 포와 같은 지명이 남아 있어서 과거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다리의 명칭은 나루의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광진교 · 동작대교 · 마포대교 · 양화대교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양화진 일대는 경치가 좋았던 관계로 단순한 도하 기능만이 아니라 중국 사신을 위한 유선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서거정(徐居正)이 “양화도 어귀에 뱃놀이하니 별천지가 바로 예로구나.” 하고 찬사를 보낸 사실로 미루어보아 경승의 단면을 입증할 수 있다.

당시의 경관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고 하여도 지금도 한강 수로를 따라 관광유람선이 등장하게 된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며, 나루와 관련된 옛것이 현대적으로 재적응한 것이라 하겠다.

하류에 위치한 마포 · 토정 등의 나루는 서해의 이점을 이용하여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경외(京外)의 배를 관장하는 전함사(典艦司)와 수로참(水路站)이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나, 교통 조건의 변천과 더불어 그러한 기능은 사라지고 도시 지역으로 변모되고 말았으며, 그 흔적은 거의 소멸 상태에 있다.

근대적 교통 수단의 등장은 내륙 수로의 전성 시대를 마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도하 및 강운과 관련된 한강 유역의 강촌을 퇴화의 길로 몰고 갔다. 그래서 강원도와 충청도 내륙 지방의 세금을 거두어 서울로 수송하던 소양(昭陽)과 충주가 먼저 퇴화하기 시작하였다.

충주는 가흥창(可興倉)을 중심으로 전세의 수합과 보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물자수송과 통과객에 대한 편의를 위하여 선박과 객사가 강변에 즐비한 하항취락(河港聚落)의 성격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하항 기능의 상실과 더불어 이들 시설물과 여기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창동(倉洞)이라는 지명과 건물의 초석만이 당시의 번영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금강 유역에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금강 북안과 공주를 연결하던 곰나루에는 교량이 부설되어 나루가 없어지게 되었으며, 하항이며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리던 강경도 강구의 군산이 개항장이 되고 철도가 부설되면서 나루로서의 기능은 퇴화하였다.

낙동강 유역에는 부산에서 김해를 연결하는 구포가 나루의 모습과 기능을 최근까지 유지하였으나 부산의 도시화와 교량건설로 면모가 일신되었다.

다만, 구포대교라는 명칭에서 나루와 관련되는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삼랑진은 비록 철도가 부설되었으나 철도 분기점이라는 이점을 안게 되어 번영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영산포는 조창이 이동되었으나 가항 종점으로서의 기능이 남아 있어 취락이 크게 발달하였다.

최근에는 강북의 나주와 강남의 영산포가 통합되어 나주시가 되었는데, 이는 하천을 사이에 두었던 양 지역이 교량의 건설과 더불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동시에 나루가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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