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화되어왔고, 또한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첫 식품이 우유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낙농은 사람과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산업 중의 한 가지라 하겠다. 따라서 우유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귀중한 식품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우유가 언제부터 인류의 식품으로 이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대의 벽화나 종교문헌 속에는 우유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고, 또한 어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약 4천년 전부터 우유를 중요한 식품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하나의 산업으로서 낙농업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의의라고 하면, 우유는 자연의 가장 완전한 식품이라는 점과 그 귀중한 식품을 인간에게 공급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낙농을 하면 땅이 기름지고 더욱이 일반 밭작물과 달리 소득을 연중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 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우유가 지닌 식품으로서의 귀중한 가치는 인류의 가장 훌륭한 건강식품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날 서구문명 속에서 우유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필수적인 식품으로 인정되어왔다.
우리 나라 낙농 역사에 관한 고증자료가 거의 없어서, 젖소를 처음으로 기르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측 사료에 의하면, 이미 고구려시대에 젖소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 낙농의 시조로 고구려 사람 복상(福常:고구려 평원왕 때의 사람)을 꼽고 있다. 물론 그 당시 젖소를 길러서 짠 우유는 주로 한약제로 사용되었으나, 평상시에 계속 마셔도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의 귀족사회에서는 이미 우유를 상식(常食)하였으며, 우유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유제품도 만들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세종 때의 기록에 젖소를 기르는 사람들의 조직에 대한 것이 있으며, 철종 때의 기록에도 젖소의 사육방법에 관한 것이 있다.
특히, 1856년(철종 7)에는 젖소를 기르는 농민들이 당하고 있는 민폐를 없애기 위하여 왕실에서조차 우유를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일찍이 서구문명을 흡수한 일본은 근대적 의미의 낙농이 발달하였으며, 우리 나라는 거꾸로 일본으로부터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의 우리 나라 낙농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한말 농상공부의 기사(技師)로 근무한 프랑스 사람 쇼트(Short)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신촌역 부근에 우사(牛舍)를 짓고, 일본으로부터 20여 두의 홀스타인종(Holstein種)을 도입하여 길렀으며 또한 우유도 생산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사람들이 많이 이주하여 왔고, 따라서 젖소의 사육두수도 많이 증가하였으리라 생각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경술국치 뒤의 자료에 의하면, 젖소의 사육두수가 678두, 목장수가 64개였다고 한다.
수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 나라 낙농의 발전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산업발전이나 농민들의 소득증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 나라 젖소 두수는 총 2,296두로 증가되었으나, 이러한 증식도 농업발전이나 농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었다. 젖소를 소유하고 있는 경영주가 전부 일본사람들이었고, 또한 우유를 마시는 소비계층들도 전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광복 당시 남한의 젖소 두수는 겨우 1,661두에 불과하였으며, 이들 젖소도 주로 서울 근교와 경인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무렵 성환목장(成歡牧場:지금의 국립종축원)과 국립도종축장(國立道種畜場)에서 일반 농민들에게 젖소를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중에는 237두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가 1960년에 866두로 다소 증가하였다.
실제로 우리 나라 낙농발전의 현대사적 시발점은 1962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정부의 강력한 낙농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주로 미국·캐나다·뉴질랜드 등지에서 젖소를 수입하게 되었고, 그 뒤부터 우리 나라 젖소수는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1962년부터 1985년 말까지 도입한 젖소는 총 11만 3059두로서, 우리 나라 낙농의 양적 발전에 지대한 구실을 하였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주로 종모우들만이 매년 13두∼20두씩 수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젖소의 질적 개량을 위한 혈통보존 및 검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1969년 한국종축개량협회가 발족하였고, 같은 해 1월 <초지법>이 제정되어 전국토의 66.7%를 차지하고 있는 임야에 대한 효율적 이용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젖소의 도입 초기인 1960년대에는 혈통이 등록된 소들만 수입되었으나, 1970년대에는 혈통이 등록되지 않은 소들도 도입되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일어나, 1980년에는 다시 등록된 소들만 수입되도록 하였다.
젖소개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젖소등록이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으나, 아직도 등록이 된 젖소가 적다는 문제점이 있다. 축산업협동조합에서 1979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젖소 능력검정(能力檢定)은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초지조성(草地造成)의 중요성과 함께 이에 대한 개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왔으나, 1986년까지 전국적으로 조성된 초지면적은 총 8만 4700㏊에 불과하다.
농촌진흥청의 정밀조사에 따르면, 우리 나라 초지조성 가능면적은 1986년 말 현재 212 만5000㏊이며, 이 가운데 밭이나 과수원 등으로 이용될 수 있는 면적을 제외하여도 150만㏊나 된다고 한다. 따라서 조사료(粗飼料)를 기반으로 한 낙농발전에 커다란 희망적 요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97년 초지재배 면적은 6만 4000㏊에 불과하여 1986년에 비교하여, 2만7 00㏊나 감소하여 우리 나라 낙농발전에 구조적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유의 총생산량을 살펴보면, 1962년에는 2,647M/T이었으며, 이 때 국민 1인당 연간우유소비량도 0.1㎏에 불과하였으나, 1986년 말에는 115만 4460M/T의 우유가 생산되었으며, 국민 1인당 소비량도 28㎏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1996년 국민 1인당 우유소비량은 50.4㎏으로 급증하였으나, 1990년부터 1996년 사이의 연 평균 소비증가율은 2.95%에 불과하여 소비둔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급증하는 우유를 처리하기 위하여 유가공공장(乳加工工場)의 설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첫 시유공장(市乳工場)은 1937년에 설립된 경성우유협동조합으로, 1962년에 서울우유협동조합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우유협동조합 이외에도 197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62개의 유가공공장이 설립되어 가동 중에 있다.
우리 나라 낙농의 시발점을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196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젖소 사육두수는 2,406두에, 국민 1인당 연간우유소비량이 0.1㎏에 불과하였으나, 1996년 말 자료에 따르면, 총 사육두수 55만1493두에 1인당 우유소비량도 50.4㎏으로 급증하여 놀라울 정도의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와 같은 젖소 사육두수가 급증한 원인은, 주로 외국으로부터 생축(生畜)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도입된 젖소들은 주로 증식용 암소들이었으며, 품종은 거의 전부 홀스타인종이었다.
홀스타인종이 주류를 이룬 이유는 다른 젖소 품종인 저지(Jersey)나 건지(Guernsey) 등에 비하여 산유량이 많아서 유대수입(乳代收入)이 클 뿐만 아니라, 고깃소로 이용하는 경우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젖소 사육두수의 증가와 더불어 사육농가도 크게 늘어, 1963년 813호에 불과하던 사육농가가 1986년 말에는 4만 2728호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가는 주로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나타났을 뿐, 1985년을 고비로 증가속도는 둔화되고, 실제로 1996년에는 2만 1200호로 1986년에 비교하여 사육농가 호수는 절반이하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1984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우유의 과잉생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우리 나라의 낙농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산조절이라는 고육책(苦肉策)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1987년 8월 낙농가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급기야 이 정책을 백지화하고 우유의 소비촉진이라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 낙농은 우유과잉 생산과 소비둔화라는 이중고(二重苦)에 따라 낙농의 최대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때, 일관성 있는 낙농정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아직도 우리 나라 낙농가들의 경영규모가 영세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낙농규모의 영세성뿐만 아니라, 젖소 사육농가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에 밀집되어 있다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전국토의 67%나 차지하고 있는 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낙농의 기본적인 장점이 퇴색된다는 점이다.
한편, 우유생산량과 소비동향을 살펴보면, 우유생산량은 해마다 급증하여 1980년도에는 총 우유생산량이 445만 2327t이었던 것이, 1996년에는 203만 3738t으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산량 증가속도를 살펴보면, 1962년부터 1967년까지는 그 증가율이 48.6%였으나,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연평균증가율이 16%로 점점 감소추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한편 1990년부터 1996년 사이의 연평균 증가율은 2.95%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선진국들이 1인당 연 평균 소비량이 현재 235㎏∼400㎏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나라의 1인당 우유소비량 50.4㎏은 앞으로 더욱 증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 나라 낙농의 급성장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하겠다. 더욱이 우유는 이미 우리들이 섭취하고 있는 식품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식품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그 인식은 더욱 굳어지리라는 전망이 보여, 우리 나라 낙농의 앞날은 매우 밝다고 하겠다.
또한, 우리의 귀중한 부존자원이라 할 수 있는 산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산업이라는 점에서, 낙농발전의 당위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낙농 현실을 직시할 때에 반드시 낙관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젖소 마리당 우유생산량이 선진낙농국에 비하여 뒤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라든지, 또는 이미 현실로 대두되고 있는 우유의 과잉생산문제, 더욱이 값싸고 질좋은 외국 유제품의 수입개방에 대한 압력의 가중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앞으로 우리의 낙농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대처방안이라고 한다면, 우유의 생산비를 될수록 싸게 하는, 즉 낙농경영합리화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합리적 낙농경영이란 젖소를 유전적으로 개량하여 마리당 우유생산성을 높이는 일이며, 동시에 초지조성면적을 확대하여 그 이용기술을 높이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우유의 질을 향상시키며 국민의 식생활 기호에 맞는 여러 가지 새로운 유제품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이와 함께 우리 나라 낙농발전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도 그 어느 것보다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