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무술명 오작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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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무술명 오작비
대구 무술명 오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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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북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영동리촌에 저수지 축조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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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영동리촌에 저수지 축조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 보물.
내용

196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46년 대구광역시 대안동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대구사범대학에 보관되었다. 6·25 전쟁 때 미군이 교정을 수리하면서 7~8년 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수영장 부근에서 다시 발견되어 현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비는 적갈색의 자연석으로 상부는 원형으로 처리되고 하부는 대체로 직선으로 잘려 있다. 높이 103㎝, 상부 너비 65.8㎝, 하부 너비 53.8㎝, 두께 12㎝이다. 비면(碑面)은 모두 연마를 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이다. 비의 개석(蓋石)은 본래 없었던 것으로 상부를 원형 처리한 것이다.

비는 하부의 모습으로 보아, 본래 대석 위에 세웠거나 암반 위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신 전면에 비문을 음각했는데, 전문 9행으로 각 행마다 자수(字數)가 일정하지 않고 마멸된 곳이 많다. 또한 비신 오른쪽 하부가 일부 파손되어 3행까지는 한 자씩 파실(破失)된 듯하다. 각 행의 자수는 제1행 22자(추정), 제2행 17자(추정), 제3행 20자, 제4행 21자, 제5행 28자, 제6행 24자, 제7행 21자, 제8행 18자, 제9행 8자로 되어 있다. 비문의 문자는 대소(大小)와 간격이 일치하지 않고, 줄도 비뚤어져 있다.

필치는 소박하고 고졸한 풍을 보이고 있다. 서체는 북위(北魏)의 계보라 하겠으나, 경주와 그 부근에서 발견된 고신라(古新羅)의 비들과 더불어 신라의 토속적인 고아한 격조를 보이고 있다.

비는 초두의 “무술년 사월삭 십사일(戊戌年四月朔十四日)”에서 무술년에 세워진 것인데, 두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발견자의 보고에 따르면 비체(碑體)의 형식, 비문의 서체, 비문의 관명과 인명 등으로 보아 고신라의 비로서 578년(진지왕 3) 때로 추정된다.

그런데 뒤에 영천(永川) 청제못[菁堤] 가에서 청제비(菁堤碑)가 발견되어 그 병진 축제명(丙辰築堤銘)에 "병진년 이월 팔일 ○○○대오(丙辰年二月八日○○○大塢)"라는 비문을 판독할 수 있다. 자연석을 사용한 비의 형태 및 비문의 형식·내용이 오작비와 유사하다. 청제의 축조가 536년(법흥왕 23) 병진(丙辰)이라 하면, 오작비도 이와 가까운 518년(법흥왕 5) 무술에 오(塢)를 시축하고,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비를 세운 연대는 518년 또는 578년으로 추정되는데, 전자가 더욱 타당할 것이다.

영천의 오인 청제와 대구의 오인 제언(堤堰)이 축조된 것을 보면, 6세기경에 신라에서는 관개지를 축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영동리촌 고○오작기지(另冬里村高○塢作記之)"에서 영동리촌은 오가 있었던 촌락의 명칭이고, ‘고○오’는 오의 명칭이다. 그런데 ‘고(高)’자도 확실하지 않고, 한 자가 마멸되어 오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다. 오에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보루(堡壘)로서 군사상의 제방과 농사를 위한 관개지의 제방이 있었다. 비문에는 군사상의 오라는 내용도 보이지 않고, 또 관개지로서의 못의 면적이나 관개의 혜택을 받는 농지(農地)의 면적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중국의 오(塢)에 따라 군사상의 보루로 해석하기가 쉽고 그렇게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관개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비문의 말미에 "차오대광 ○보 고오보사척 장오십보(此塢大廣○步高五步四尺長五十步”라 하였다. 제방의 길이가 50보인데, 군사상의 보루로서는 50보의 길이는 너무나 짧다. 영천 청제비 정원명(貞元銘)에 보이는 오의 규모와 비교하면, 대체로 같은 규모이다. 따라서 대구의 오는 영천의 오인 청제의 크기와 비슷한 관개지라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청제의 병진명은 오작비의 비문 형식과 같으며, 청제의 병진명에 '○○○대오(○○○大塢)'라 명기되고 있음으로 해서 고대시대에는 관개지를 ‘오’라 표현한 것 같다. 그리하여 대구의 오도 청제의 병진명의 형식과 같이 ‘영동리촌 고○오(另冬里村高○塢)’라고 기명되어 있어 관개지였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순수한 한문체가 아니고 이두식(吏讀式)의 문체로 되어 있다. 직명·지명·인명 등 고유명사가 대부분으로, 이 고유명사 중간 마다 몇 구절의 문장이 끼워져 비문이 형성되었다. 흔히 고신라의 비에서 볼 수 있는 토속적인 문체이다.

영동리촌은 오가 소재한 촌락이다. 이 밖에도 부작촌(夫作村)·진득소리촌(珍得所里村)이 보이는데, 역시 오와 관계가 있는 촌락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오가 대구에 있었다면 당시 대구 부근에 있었던 촌락일 것이다. 그리고 고○오는 오의 명칭이다.

"차성재○(此成在○)"에서 ‘차(此)’는 글자의 뜻 그대로 ‘이것’이요, ‘성재○(成在○)’는 이두체(吏讀體) 기사법(記寫法)으로 ‘이루겨’로 성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유나(都唯那)’는 승직(僧職)을 뜻한다. 『삼국사기』 잡지(雜志)에, 도유나·대도유나(大都唯那)가 보이는데, 신라의 승직(僧職) 명칭이다. 보장(寶藏)·혜장(慧藏)은 승려의 이름이다. 보장·혜장의 법명 아래는 아척간(阿尺干) 3자로 추정된다. 아척간은 『삼국사기』 잡지에, “육왈아찬 혹운아척간 혹운아찬(六曰阿飡或云阿尺干或云阿粲)”이라 하여, 6등인 아찬(阿飡)의 별칭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보이는 직명(職名)·촌락명·인명·관위(官位)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직명은 도유나라고 하는 승직명이다. 촌락명은 부작촌(夫作村)……촌(……村)·영동리촌(另冬里村)·진득소리촌(珍得所里村) 등이 있고, 인명은 보장·혜장·일리혜(壹利兮)·○령(○令)·나○(奈○)·무정(戊丁)·사목을(沙木乙)·야득부리(也得夫利)·영소(另所)·이리(尔利) 등이 있으며, 관위로는 아척간(阿尺干)·○척(○尺)·○벌(○伐) 등이 있다.

“차오대(此塢大)” 곧 이 오의 크기는 너비 곧 폭은 20보이고, 높이는 5보 4척이며 길이는 50보라 한다. “차작(此作)”은 ‘이것을 만드는 데’로, 기(起) 밑에 수(數)자로 보고 “기수자(起數者)”는 '일으킨 수'라는 뜻이고, 공부(功夫)는 '인부(人夫)'의 뜻으로 공부(工夫)일 것이다. 즉, ‘이 오를 만드는 데 그 수 312인의 인부를 일으켜 13일에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요작사지(了作事之)”는 ‘만드는 일을 끝마쳤다.’ 또는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오를 만드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라 하겠다.

“문작인(文作人)”은 ‘글 지은 사람’이라는 것으로 비문의 찬자(撰者)라는 뜻이다. 그리고 일리혜는 비문을 지은 사람의 인명이다. 또 일척(一尺)은 일리혜의 환위(宦位)일 것이다. 혹 일리혜라는 사람이 일척이라는 환위에 있으면서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신라금석문의 인명표기」Ⅱ(김창호,『역사교육논집』4, 1983)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황수영,『증보한국금석유문』, 일지사, 1978)
「무술오작비소고」(임창순,『사학연구』1, 1958)
「新羅の金石文 -戊戌塢作碑-」(田中俊明,『韓國文化』, 1983)
「韓國の池 -大邱の塢と塢作碑-」(李殷昌,『日本古代文化の探究』, 社會思想社,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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