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포천시, 서쪽과 북쪽은 연천군, 서쪽과 남쪽은 양주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7°00′∼127°09′, 북위 37°50′∼37°58′에 위치한다. 면적은 95.66㎢이고, 인구는 9만 797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8개 행정동(12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 있다.
이 지역은 산이 많아 토지의 2/3가 산지로 되어 있다. 시의 중심부에는 추가령지구대가 남북으로 지나고, 지형은 동남쪽과 서북쪽에는 500m 이상의 고지가, 서남쪽은 낮은 평야가 나타난다.
추가령지구대의 동쪽에는 소요산(逍遙山, 536m) · 국사봉(國師峰, 754m) · 왕방산(旺方山, 737m)이 포천시와, 서쪽에는 마차산(馬車山, 588m)이 양주시와, 남쪽에는 칠봉산(七峰山, 506m) · 해룡산(海龍山, 661m)이 양주시 · 포천시와 경계를 각각 이루고 있다.
추가령통곡을 따라 강화천(江華川)이 북진하여 한탄강에 흘러 들어가고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동두천(東頭川)을 비롯한 많은 지류천은 산간계곡을 흘러 강화천에 흐르고 이들 하천 주변에는 소규모의 계곡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0.5℃로 1월 평균기온 -6.0℃, 8월 평균기온 25℃, 연교차가 30℃를 넘고 지형적 이유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갖고 있다. 1월 강수량은 5㎜ 내외, 8월 강수량은 250㎜이며, 연강수량은 1,300㎜이다.
이 지역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지만 가까운 지역인 연천군 전곡리 · 운탄리 · 중리 · 장파리 · 남계리 등의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손도끼 · 가르개 · 외날찍개 · 쌍날찍개 · 망치 · 긁개 · 찌르개 · 새김돌 · 석핵(石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동두천지역에도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유적 역시 발견된 바는 없지만 양주지역의 양상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지행동과 송내동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바 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초기 철기시대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인데 이 지역은 마한에 속했으며, 마한 54개 국 중 고리국(古離國)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백제의 영토에 속했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한강의 북방은 물론 천안 · 아산 · 청주 · 죽령 · 조령을 연결하는 일대가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었던 475년(장수왕 63)경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매성군(買省郡) · 창화군(昌化郡)으로 불렸다.
또, 551년(성왕 29)에 나제동맹군(羅濟同盟軍)이 한강유역을 점령했을 때는 일시 백제의 영토로 복귀되었다가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어 757년(경덕왕 16)에 내소군(來蘇郡)으로 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 내소군은 견주(見州)로 바뀌었고 995년(성종 14) 전국의 12주에 절도사가 설치될 때 동두천지역은 해주(海州)의 우신책군(右神策軍)과 아울러 좌신책군(左神策軍)의 임지(任地)가 되었다.
1036년(정종 2)에 왕이 삼각산에 행차한 뒤 문종은 서울을 남경이라 하여 새로운 궁궐을 축조한 뒤 견주감무(見州監務)를 별도로 두기도 하였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4년(태조 3) 한양부로 도읍이 옮겨짐에 따라 주치가 아차산 남쪽 대동리(大洞里)로 옮겨지고 지양주사(知楊州事)가 두어졌으나 곧 부(府)로 승격되었다. 1397년에 부치(府治)가 다시 지금의 양주군 주내면으로 이전되어 양주로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466년(세조 12)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사천현(沙川縣)이 폐합되었다.
사천현은 지금의 은현 · 동두천일원으로 고구려 때 내을매현(內乙買縣)이던 곳이며, 신라 때 사천으로 개칭된 이래 고려 때도 사천으로 불리어오다가 양주에 병합된 곳이다. 한편, 1504년(연산군 10)에 왕의 유행처(遊幸處)로 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목으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편 때 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에도 고양주면(古楊州面)이 양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19년의 3·1운동 때 홍덕문(洪德文) 등이 1,000여 군중을 인솔하여 동두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동두천은 조선 후기까지 양주군의 이담면(伊淡面)으로 지금의 시 관할구역과 거의 비슷한 안흥리 · 하봉암리 · 동막리 · 내동 · 연동 · 창동 · 걸산리 · 황매리 · 가정자리 · 행당리 · 지동 · 동두천리 · 상봉암리 · 축산리 · 광암리 등 18개 이로 되어 있었으며, 한때는 일담면(一淡面)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6·25전쟁으로 미보병 7사단이 주둔한 이래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근대도시로 발전하면서 1963년 이담면이 양주군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7월 1일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되었다. 1983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가 이 시에 편입되었다. 1998년 동 통폐합으로 10개 동에서 7개 동으로 되었다. 2007년 송내동이 신설되었다.
불교유적으로 645년(선덕여왕 14)에 원효(元曉)가 창건한 자재암(自在庵)이 상봉암동의 소요산에 있는데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보물, 1994년 지정)가 있고, 탑동에는 고려 말기에 조성된 탑동석불이 있다.
상패동에는 조선 단종 때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민신(閔伸) · 김문기(金文起) · 조관(趙貫) 등 세 충신의 호패비로 세운 삼충단(三忠壇)이 있고,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인 신용개(申用漑) · 신발(申撥) · 신량(申湸) · 신익상(申翼相)의 신도비가 한 군데 모여 있다.
조선 성종 · 세조 때의 무신으로 야인정벌과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어유소(魚有沼)의 묘와 신도비가 광암동에 있고 사당은 탑동에 있다. 안흥동에는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한 정사호(鄭賜湖)의 묘와 신도비가 있고, 지행동에 조선 인조 · 효종 때의 문신인 목행선(睦行善)의 묘가 있다.
3·1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홍덕문선생추모비와 1959년 경기도전적비건립위원회에서 세운 충현탑이 상봉암동에 있으며, 1978년에 세운 현충탑이 생연동에 있다. 한편, 6·25사변 때의 유엔군 참전을 기념하는 벨기에 · 룩셈부르크 참전기념탑과 노르웨이 참전기념비가 하봉암동에 있다.
최초의 교육기관은 1923년에 설립된 동두천초등학교이며, 이후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1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다.
케네디기념문화회관이 있어 지역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경에는 소요문화제와 소요단풍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 지역의 민속놀이로는 윷놀이 · 널뛰기 · 연날리기 · 줄다리기 · 다리밟기 · 돈치기 · 각시놀음 · 버들피리 · 그네뛰기 · 씨름 · 꽈리불기 · 도둑놈잡기 · 땅따먹기 · 기마전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있는데, 민속예술경연대회 출품작인 ‘행단제’가 유명하다.
행단제는 동신인 수신 1천여 년 된 은행나무에게 그 해의 풍년에 감사하고 이듬해의 풍년과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제의식으로 시작되는 대동제의 형태로서 줄다리기 · 씨름 · 힘겨루기의 뒷풀이로 구성된 놀이이다.
행단제의 시원은 조선 초기부터 전해져 온 놀이로 구전되는데, 세조의 성종 연간에 무인이었던 어유소 장군이 소년시절 이 놀이의 힘겨루기에서 장원했다고 하며 이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에 큰 기둥이 되었다고 한다.
걸산동의 산신제와 상패동의 산신제 등이 있다. 걸산동의 산신제는 매년 9월 9일에 생기와 복덕을 가리어 화주 1인, 화덕 1인, 헌관 1인, 축관 1인 등 총 4인을 선택하여 돼지를 잡고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알 수 없으며 제문도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이 정착한 이후 산신제가 시행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상패동의 산신제의 제물을 보면 북어 4마리, 소머리 1, 대추 5홉, 떡살 3말, 사족, 밤 5홉, 팥 7되, 전육 4근, 사과 4개, 소지 2권 등이다.
그리고 탑동의 산신제 · 아차산 산신제 · 행단 치성제 등이 있다. 아차동의 솟대는 아차마을 쪽의 농로를 약 600m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형태는 전신용 전주에 황토칠을 했고, Y자형의 몸통 위로는 ㄱ자 형태로 새머리를 상징한 것을 꽂아 놓았으며, 이 새를 상징한 전체부분을 전주와 볼트로 연결시켜 놓았다.
이 솟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세워져 있으며, ‘수살막이’라 칭한다. 매년 정월 열 나흗날 해질 무렵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제를 올리고 있는데 제물은 떡 한 시루 · 포 · 막걸리 등을 제물로 사용한다. 제의 기원은 농사의 풍년을 비롯하여 마을의 안녕과 질병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 줄 것을 소원하는 의식을 행한다.
이 마을에서의 제례는 공동제사, 즉 제의 준비를 통해 상부상조와 마을의 지역적 소속감을 심어 주며 정신적 유대 강화의 의미를 가진다. 제가 끝난 뒤에는 음복 · 동회 · 오락을 통해 도덕의 전승, 마을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공동체 의식을 살려 발전적인 삶의 영위를 추구하는 활력소가 된다.
따라서 아차동의 솟대는 일반 솟대의 성격을 지니며, 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며 액막이 기능을 하는 신앙의 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탑동에는 오래 전부터 장승거리라 불리는 터가 있지만, 현재 장승은 세워져 있지 않다. 때문에 이 곳의 장승 실체는 알 수 없으나, 장승과 관련된 여러 조사 연구에 의하면 장승은 결코 미신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간신앙의 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점마을에는 석적(石積, 영탑)이 있는데, 마을 입구 양쪽에 쌓아 놓은 돌탑은 지금부터 300여 년 전부터 풍수지리설에 의해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허(虛)한 형국의 수구(마을 입구)를 비보하는 대책의 방안으로 돌을 쌓아 수살막이 또는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 놓았다.
석적의 기능을 살펴보면 돌에 대한 주술적 신앙, 석적의 영적 기능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행단의 들돌은 있어서 돌은 항구불변성의 초자연적인 힘과 영험이 깃들어 있는 대상으로 믿고 있는데 고대부터 이를 신성시하여 주술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장의 지명설화는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동안동의 원터 지명유래에서는 원은 고려와 조선 때 관리들이 출장 중에 유숙하는 숙소를 뜻하며, 공무로 출장하는 공무원들의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공용으로 설치했던 곳을 말한다.
원은 한때 크게 번성했으나 국한된 이용자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점차 쇠퇴해 갔다. 이곳에 설치된 이담원은 자좌오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규모를 살펴보면 초석과 기와 조각이 산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여 칸은 족히 된 듯하다. 그러나 150여 년 전에 원은 폐지되었고, 원터란 지명만 남아있다.
보산동의 빈양말(濱陽) 유래는 다음과 같다. 마을 앞에는 동두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 동천 하안은 깎아지른 듯한 낭빈양이 있고 주변에는 노송이 많아 풍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대부들간에 널리 유행하던 매사냥이 늘 이곳에서 행해졌으며, 양주목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은 동천의 맑은 물과 서남향의 양지바른 것을 뜻해서 빈양이라 하였다고 한다.
내행동의 무수동마을은 물이 귀하여 그렇게 불리웠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이 곳에 세거하여 온 평해 황씨 일문에서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농사철만 돌아오면 물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물을 해결하기 위해 방축을 쌓고 다시 물 걱정을 안하는 마을로 만든다고 ‘수(水)’자를 ‘수(愁)’자로 고쳐 ‘무수동(無愁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상패동의 가마소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 말엽 이 마을 입구에 가마솥 모양의 큰 소가 있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는 적이 없어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소를 귀중히 여겼으며 마을 이름을 소의 모양을 따라 가마소라 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홍수로 마을 지형이 크게 달라져서 가마 모양의 소도 없어졌지만 마을 이름은 여전히 가마소라고 불려 전해지고 있다.
생연동 못골의 유래는 고려 공양왕 때 공조판서를 지낸 홍언수에게서 비롯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이태조의 출사 권유도 뿌리치고 개성에서 못골로 낙향하여 저택을 새로 짓고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멋을 살리기 위해 집안 정원에 연못을 만들어 운치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부터 연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600여 년째 못골로 불려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어수물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 태조가 아들 태종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을 가슴 가득히 품고 왕좌에서 물러나 함흥 이궁으로 향하던 도중 잠시 어가를 멈추고 갈증을 풀기 위해 길가 우물에서 냉수를 떠오게 하였다.
시종이 떠다 진상한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난 태조의 울적한 기분은 얼마간 후련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임금님에게 냉수를 진상하게 된 벽촌 백성에게는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물을 어수정(御水井)이라 하였고 그것이 곧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한다.
이밖에도 유명한 효자 · 효부이야기도 전하는데, 광암리(지금의 광암동)에 김씨라는 사람이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는데 그 어머니가 망녕이 들었다고 한다. 그 해 그 김씨는 아들을 낳았다.
김씨 부부가 일을 하다가 끼니때가 되어서 밥을 먹으러 며느리가 집에 가 보니 어머니가 “야, 닭 한 마리 삶아 놓았으니깐 그걸 건져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며느리가 솥을 열어 보니까 아이가 들어 있었다.
정신이 없고 기가 막혀서 자기 남편한테 뛰어 올라가서 이런 일이 있으니 어떡하면 좋겠느냐 하고 물으니 남편이 하는 말이 “어머니가 얼마나 고기가 잡수고 싶으면 사람이 고기로 보이겠느냐.”하며 내려와서 송아지를 잡아 드리고 아이는 묻어 주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양반들 귀에 들어가 그 당시에 효자 · 효부비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신분이 천한 사람이니 그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뒤에 포청의 어떤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상소문을 올려 효자문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노동요에는 「이앙요」 · 「모내는 소리」 · 「논매는 소리」 · 「지경 소리」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 「이앙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나 하날기로구나/연안 백천만은 모로 심어라/어화 농부들아/열 심을지라도/하나 지침이 없게 심어주세/하나 하날기로구나/어서 바삐 심어주게”
의식요에는 「고삿반 소리」 · 「상여 소리」 · 「달고질 소리」 등이 있다. 상여 소리의 후렴구는 “어하어하 어훠리 딸랑”으로 되어 있다. 달고질 소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해가 서산에 걸렸으니/역사행로 빨리 합시다/예∼헤/에헤리 훠어리 달궁/에헤리 달궁/먼데 사람 듣기도 좋게/에헤리 달궁”
유희요에는 고무줄놀이 · 줄넘기놀이 · 숨바꼭질놀이 · 연날리기 · 팽이 돌리기 · 우리집에 왜 왔니 ·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등이 있다.
고무줄 놀이의 가사는 이러하다. “단추 단추 새 단추/어머니가 사다주신 새 단추/순이야 순이야 단추 달아라/싫어요 싫어요 나는 싫어요”
비기능요에는 소요산을 그리며 · 제갈공명의 추모시 · 강릉 경포대시 · 통타령 · 이별곡 · 시집살이요 · 베틀가 · 풍년가 · 상사요 · 산타령 · 방아타령 · 금강산 타령 · 노랫가락 등이 있다.
그 중 통타령의 가사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통 저통/신통 방통/노방통 금부통/장구통 여우 홀림통/깽깽이통 원산 고불통/옷집 오줌통 아랫집 똥통/우리집 절구통 아랫집 똥통/우리집 절구통 술집 뜨물통/장님 북통 돼지 오줌통/수비대 나발통 얽은 놈의 상통/목수 목통 못생긴 밥통/큰애기 젖통 주정꾼 술통/못된놈 심통 설은 사랑애통”
전 토지의 66.9%가 임야이고 경지는 10%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지 3.3%, 하천용지 2.0%, 도로용지가 1.1%이다. 경지 중 논이 161㏊, 밭이 417㏊로 밭이 전 경지의 3/4에 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채소류로 배추 · 무 · 시금치 · 오이 · 호박, 과실류로 복숭아 · 배 등이 생산된다. 농업 외에 젖소 · 돼지 · 닭 등의 축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임산물로는 밤 · 대추 · 잣 · 은행 등이 생산된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2.2%인 1,928명인데 농가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4.8%인 4,087명이다. 주요 제조업은 식품 · 금속공업 등이 있으나 대부분 영세하다. 군사기지로 시작한 시는 상업 발달이 탁월하다. 특히 기지촌을 중심으로 식품 및 위락시설업이 발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군의 철수로 기지촌보다는 일반 소비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상설 시장은 공설시장, 일반시장 2개 등 3개가 있는데 공설 시장은 도매와 소매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두 시장은 소매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은행은 8개가 있어 주민의 금융혜택을 돕고 있다.
도로 발달이 빈약한 이 지역은 국도 3호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동두천∼의정부간은 1970년대 4차선으로 확장된 뒤 평화로로 명명되어 의정부와의 교류를 촉진시키고 있다. 최근 제2평화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밖에 포천 및 문산으로 가는 시 · 군도가 있다.
철도는 경원선이 국도 3호선과 평행하게 지나고 있다. 주말과 휴일에는 소요산 등을 찾는 관광객들로 철도여객이 매우 많다. 2006년 말 의정부 · 동두천간 복선전철화 사업이 완공되어 서울로의 접근이 쉬워졌다.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하여 역사 문화권 관광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군사도시 기능으로 관광지 발달은 미약한 편이다. 특히, 동두천시는 미군부대의 주둔으로 기지촌 문화가 발달하였다.
동두천 종합개발계획에 따르면 경기의 작은 소금강이라 불리는 소요산과 광암동의 탑동계곡을 관광지로 개발하면 관광지로써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소요산은 예로부터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려질 만큼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관광명산이다.
비록 높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지만 모식적인 암봉과 암석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설악산의 일부를 보는 것과 같은 기암괴성과 폭포가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여름 피서관광지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곳이다. 특히, 서울에서 교통편이 좋은 관계로 관광객이 찾아들곤 하지만 계곡이 협소하여 과밀현상을 초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