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현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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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조개더미 · 무덤군 관련 복합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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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조개더미 · 무덤군 관련 복합유적.
내용

마산에서 진동을 거쳐 고성, 함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유적의 북쪽 배후에는 대산(大山, 727m)이 솟아 있고 남동향으로 급경사를 이루다 저평한 구릉으로 연결된다.

유적의 전체 범위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구릉 경사면의 약 400×400㎡로 추정된다. 유적의 맞은 편에는 정상부에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당마산(228m)이 있다. 그 사이에는 진해만으로 이어지는 좁고 긴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현동 유적은 마산-충무간 국도 4차선 확장공사가 계획되고 1988년 말경 4차선이 유적의 중앙부를 가로지르며 개설되는 과정에서 가야시대의 토기, 패각 등이 확인됨에 따라 1989년 5월 24일부터 130여 일간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삼한·가야시대의 주거지와 패총, 가야시대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현동 유적은 주거지, 패총, 고분군이 혼재된 복합 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전체 유적 내 개별 유적의 공간활용 유형이 주목된다. 먼저 사람이 거주한 취락은 현동 유적의 가운데에 구릉을 점유하며 분포한다. 이 주거지를 기준으로 남서쪽 인접한 계곡부에는 생활페기장인 패총이 있고, 반대편의 넓은 구릉에는 대규모 고분이 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수혈식 원형(타원형 포함)주거지이고 아래쪽 경사면은 파손되었다. 주거지 내부에는 주혈이 돌려지고 저장 구덩이시설, 벽도랑 시설이 있다. 출토유물은 돌도끼, 돌검조각, 민무늬토기조각 등이 있다. 주거지의 규모는 대형인 제2호의 경우 대략 길이 1,390㎝, 너비 315㎝, 잔존 깊이 40㎝이고, 소형인 제3호는 길이 360∼290㎝ 전후, 잔존 깊이 30㎝ 정도이다.

가야시대의 주거지는 5세기대 이후의 토광묘·석곽묘 등 가야고분이 중복 조영되면서 유구의 파손이 심한 편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타원형계 수혈주거지이다. 이 중 제3호는 길이 760㎝, 너비 430㎝ 정도, 잔존 깊이 50㎝ 정도로 비교적 대형이고, 내부에서는 주혈 등이 확인되었다.

삼한·가야 전기의 패총은 유적의 남서쪽 계곡부에 위치한다. 현동 유적 패총은 다른 패총과는 달리, 잘려진 단애면 토층조사 결과, 8차례 이상 폐기장 구덩이를 굴착하고 폐기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출토유물은 원저소호를 비롯해 연질·경질의 항아리조각 등의 토기류와 도자병, 장식구, 찌르개 등의 골각기류가 있다.

가야시대의 고분은 모두 67기가 조사되었다. 고분은 가야 전기에 해당하는 4∼6세기대까지 축조되었다. 묘제의 변천과정은 고분의 상호 중첩현상을 조사 분석한 결과, 토광목곽묘→수혈식석곽묘→석실분의 순이었다.

4세기대를 중심으로 하는 토광목곽묘는 모두 62기가 조사되었고, 전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토광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 주류이고 방형이 일부 확인되었다. 묘광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은 평균 2.55:1 정도이다.

묘광의 규모는 400㎝ 이상의 대형, 220∼400㎝의 중형, 220㎝ 이하의 소형이 고루 분포한다. 비교적 대형급 유구가 선행 묘제의 특색을 갖고 있다. 토광묘 내부의 중앙에는 목곽을 짜서 시신을 안치시켰고, 토기는 일반적으로 머리쪽과 발치쪽에 부장되었다.

출토유물은 소박한 양상을 보인다. 토기류는 고배, 항아리, 잔, 기대, 각배, 장군형토기, 바리 등이 있고, 철기류는 긴칼, 창, 낫, 도끼, 화살촉, 철정, 낚시바늘, 집개, 재갈 등이 있다. 장신구로는 구슬류 일부가 부장되어 있다.

5세기대 중반 이후의 묘제는 수혈식석곽묘와 석실분이 있다. 제64호 석곽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부가 교란된 상태이다. 제64호분의 규모는 길이 530㎝, 너비 235㎝, 깊이 235㎝ 정도의 중형급이다.

네 벽은 자연할석으로 짜 올려 개석을 덮었고, 석곽 바닥에는 잔돌을 깔아 놓았다. 유물은 석곽 내부의 전면에 부장되었다. 토기는 북동향으로 안치된 시신을 중심으로 석곽의 양쪽에, 철기류는 석곽 가장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마산 현동 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유적이다. 주거지·패총의 생활 유적과 고분의 매장 유적 등이 밀집 분포하는 복합유적으로 그 중요성이 있다.

유적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청동기시대에는 주거공간으로 이용되었고, 삼한·가야시대에는 소집단이 장기간에 걸쳐 마을을 형성하면서 주거지·패총·고분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현동 유적의 묘제와 출토유물을 분석해보면, 인근의 대평리 유적, 아라가야의 고지(故地)로 알려진 함안 일대의 고분문화 양상과 유사하다. 특히, 제8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적색고배, 제43호 토광묘의 적색고배·항아리 등은 일본지역과의 문화적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흥미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마산현동유적』(창원대학교박물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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