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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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또는 지역의 문화나 산업의 실태를 소개하기 위하여 관련된 각종 사물이나 상품을 진열해 놓은 곳을 지칭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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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가 또는 지역의 문화나 산업의 실태를 소개하기 위하여 관련된 각종 사물이나 상품을 진열해 놓은 곳을 지칭하는 용어.
내용

대개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일정한 장소에 산업·경제·학술·종교·교육·예술·보건위생 등의 국력 현황과 외국의 발전상 또는 그와의 비교 등을 나타낸 전시품을 나열하여 관람시킨다. 특히, 산업박람회는 이들 전시품을 매개로 해서 구매자와 판매자가 동시에 모여 상거래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시장의 특수한 유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주로 국가나 통치권자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행사로서 축제적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 일반적인 의미의 박람회는 상업적인 성격의 국제박람회를 지칭한다. 따라서 박람회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경제정책적 사명으로, 산업과 무역을 부흥, 발전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박람회는 크게 종합박람회와 출품물 또는 관람자가 한정된 특수박람회로 나눌 수 있으며, 출품물의 지역에 따라 지방박람회·국내박람회·국제박람회 등으로 구분된다. 편의상 UN 산하기관인 ESCAP(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의 분류에 따라 상업적 박람회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종합상품박람회:모든 품목의 전시가 가능하여 일반인을 주대상으로 한다.

② 특정품목 전문박람회:특정 산업 부문 또는 특정 시장과 관련된 품목이 전시되며, 주로 거래상을 대상으로 한다.

③ 상담위주 전문박람회:특정 품목을 주로 전시하여 소규모적이다. 여기에서는 일반인의 참관이 엄격히 제한되며, 도매업자 등 중간거래상을 주대상으로 한다.

④ 소비자박람회:일반적으로 상품의 최종 소비자를 주거래대상으로 하며 저렴한 소비재가 전시된다.

⑤ 단독전시회:단일기업 또는 단일국가에서 독자적으로 개최하는 박람회이다. 이 밖에도 박람회는 국가적 또는 국제적인 기념일에 축하행사로서 열리기도 하는데, 평화박람회·건국기념박람회 같은 것이 그것이다.

박람회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었다고 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록상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박람회는 『구약성서』의 「에스터(Ester)」 1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에 의하면 아하수에로왕이 재위 3년에 왕국의 번영과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재화들을 전시하고 180일 동안 축제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박람회(EXPO)의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그 개최 기간까지도 오늘날과 유사하다.

그 뒤 중세 때는 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열린 ‘대시(大市)’가 박람회의 역할을 하였는데, 점차 무역적인 성질을 잃고 오락기관으로 변천하였다. 이러한 원시적 형태의 박람회는 산업혁명 이후 본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대시가 견본시(見本市)로 변모함으로써 본격적인 상업박람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견본시는 견본을 전시하여 구매자로부터 주문을 접수하고 상당 기간 후에 상품을 인도하는 것으로, 오늘날 상업적 국제박람회의 원형이다.

한편, 이 시기에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각국이 부국강병책을 추구한 결과, 각종 박람회는 국가의 권위와 부를 과시하는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적 행사로서의 성격은 오늘날 세계박람회로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박람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61년영국 런던왕립미술 공업상업진흥회가 개최한 공업품전시가 시초라 할 수 있다. 그 뒤 1851년에 개최된 런던대박람회를 시작으로 유럽 여러 도시에서는 규모가 더욱 큰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런던대박람회는 출품수가 1만3939점, 입장자수가 600만 명이라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프랑스의 파리·오스트리아의 빈 ·오스트레일이라의의 시드니 등지에서 10회 정도 개최되었다. 그 중에서도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에펠탑의 건설로 유명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각 국의 박람회 개최를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1928년 ‘국제박람회조약’이 제정되어 파리에 그 사무국을 두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개최된 박람회는 1958년 벨기에의 브뤼셀 박람회, 1962년〉 미국의 시애틀 21세기박람회, 1964∼1965년 뉴욕 세계박람회, 1967년 캐나다의 몬트리올 만국박람회(Expo 67), 1970년 일본의 오사카 만국박람회(Expo 70), 1974년 스포캔 만국박람회(Expo 74), 1975년 특별박람회인 일본의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 1976년 필라델피아 독립 200주년 박람회, 1982년 미국 녹스빌’82 세계박람회 등이다. 국제박람회의 주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33∼1934년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부터이다.

한편,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교통 및 통신의 비약적인 발달, 대량생산체제의 확립, 개인기업의 발달과 함께, 자본주의경제체제하의 자유무역주의 추세에 따라 상업적 성격의 국제박람회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오늘날 가장 지배적인 형태로 정착하였다. 그래서 박람회는 전문적인 성격으로 분화되어 축제적인 의미는 퇴화하고 일반인의 관람은 제한되는 순수한 상업적 성격의 박람회로 변모하였다.

오늘날 3차산업 및 첨단산업 등 서비스 부문과 신기술개발 부문의 발달로 새로운 품목 및 서비스산업을 다루는 박람회들이 계속 출현하고 있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전세계적으로 약 100가지 유형을 지닌 6,000여 개의 박람회가 개최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도 이전에는 종합박람회가 많았으나 요사이에는 전시 품목별로 세분화되고, 동일품목 내에서도 기능별로 전문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박람회의 원형은 ‘5일장’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박람회가 그 본질적 기능상 시장의 특수한 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5일장’이 일정한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상품(전시품)을 매개로 한 판매자와 구매자의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박람회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실제로 상품의 매매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거래 정보의 입수 및 주문생산 등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특히 상업적 박람회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5일장’의 경우 국제적 성격은 결여되어 있었다.

한국이 최초로 국제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고종1889년파리 만국박람회였다. 그때 한국이 출품한 것은 갓·모시·돗자리·가마 등이었다. 4년 후인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콜럼비언 박람회에도 참가하였는데, 이 박람회의 한국관에는 직물류·원피 및 모피·녹각·사냥도구·가정용품·보석류·도자기·골동품·가마 등이 전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국가 홍보를 위한 것이었을 뿐 상업적 의미에서의 박람회 참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현대적 국제박람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에 대한무역진흥공사가 설립된 후의 일이며, 1964년∼1965년 뉴욕 세계박람회를 비롯해서 여러 국제박람회에 참가하였다. 대한무역진흥공사는 1963년부터 1989년 6월까지 총 969회의 국제박람회 참가 및 해외 전시회 개최를 주관해 왔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 의미의 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1907년의 경성박람회가 그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 나라 침략을 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마련되었던 것인데, 당시 일본 통감부의 일방적인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출품 수는 7만9000여 점이었고, 관람자수는 20만8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간 중 가장 흥미있는 것은 부인의 날을 세 차례 두어 부녀자만 입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내외를 엄격히 가리는 우리 나라 풍속에 일종의 계발을 획책한 데 그 의의가 있다.

이어 1915년 9월 11일∼10월 13일까지 33일에 걸쳐 경복궁에서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가 열렸다. 이는 일본의 정치 업적과 권위를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인원을 동원하여 그 관람자 수가 116만4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1929년에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이와 같은 행사들은 모두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한 그들의 부와 권세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므로, 오늘날과 같은 상업적 박람회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8·15광복 이후에 들어서야 비로소 일제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발전하지 못한 산업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서의 산업박람회가 개최되었다. 1962년 4월부터 6월까지 한국산업진흥회 주최로 산업박람회가 경복궁에서 대규모적으로 개최된 것을 시작으로 우리 나라에서의 상업적 박람회는 1960년대 이후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상업적 의미에서의 해외 박람회 참가는 수출진흥정책이 태동하여, 1963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에 의한 시카고국제박람회와 1964년 동경한국전시회 개최가 그 효시라고 하겠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 열린 상업적 국제박람회는 1968년 서울특별시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한국무역박람회가 처음 개최된 이래 1970년 후반에 한국종합전시장(KOEX)이 발족하면서 크게 증가하였다. 1988년 한국 내 국제박람회의 종류는 30여 개에 이르렀었다.

그밖에도 우리 나라를 대표할 만한 규모의 종합박람회로는 대한무역진흥공사가 주관하는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를 들 수 있는데, 1975∼1981년 사이 총 11회 개최된 서울교역전을 전신으로 하여 1982년 국내 최대의 종합박람회로서 첫 등장한 이래 격년제로 개최되고 있다.

이어 1990년 6월 14일 개최된 국제박람회협회(BIE) 총회에서는 한국이 신청한 대전 Expo 93의 개최를 공인하였다. 따라서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제박람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에서 열린 박람회의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이었다.

오늘날 상거래에 있어 박람회의 역할은 크게 증대되고 있다. 박람회의 기능은 단순한 홍보활동만은 아니다. 박람회는 일반 광고매체와는 달리 대면판매(對面販賣) 또는 쌍무적 커뮤니케이션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신문이나 TV광고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상대방과의 직접적인 대화로 동태적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 둘째, 전시품목에 관심이 있는 특정인만을 전달대상으로 한다. 셋째, 박람회 참가업체·거래선 등의 목록을 통하여 박람회 종료 후에도 전시효과가 지속된다. 넷째, 직접 주문과 정보 문의가 가능하다.

이와 같은 특징을 통해 볼 때, 박람회의 기능은 신상품 소개 및 유통의 최상 수단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상품을 공급자가 국내외의 잠재수요자에게 일일이 소개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세계 각국의 공급자와 수요자들이 동시에 모이는 박람회를 통하여 신상품이 특정 관심층을 대상으로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한편, 박람회의 참가효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직접 효과로서 수출계약 체결, 신규 거래선 확보, 기존 거래선과의 유대 강화 및 시장정보 입수 등을 들 수 있으며, 간접 효과에는 기업 홍보·수요자 반응점검·상품 소개·국위 선양 등이 있다.

특히, 박람회는 민간기업 차원에서는 수출진흥의 중요 수단으로서 마케팅·홍보·정보수집·마케팅전략 검증 등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는 통상정책의 중요수단으로서 수입선 다변화 유도, 정책시장 무역역조 개선, 중소기업의 국제화 지원, 통상외교정책 지원 등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87전시사업종합보고서』(KOTRA, 1988)
『국제박람회업무편람』(KOTRA, 1987)
『’82서울국제무역박람회』(KOTRA, 1982)
『한국의 수출』(KOTRA, 1982)
International Trade Show Directory 1988(Publishers for Fairs, Exhibitions and Conventions, West Germany,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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