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신영(方信榮)은 189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5∼26년 동경영양요리학원을 수료[diploma]하였고, 1938년 일본에서 연수하였다. 1949년 미국 캔사스주립대 가정대학에서 영양학을 연수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929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및 이화여자대학교 가정대 교수로 활동하다 1952년 정년퇴임하였다. 1977년 1월 6일 87세로 사망하였다.
방신영은 1926~1929년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경성여자상업학교, 배화여학교 등에도 강의를 나갔다. 1929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가정학과 교수로 근무하였다.
방신영은 1913년 최초의 근대식 한국요리책인 『요리제법(料理製法)』을 집필하였다. 이는 가정주부의 필수품이자 학교 교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이후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1917년 신문관 발행, 1942년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1952년 청구문화사 발행, 1958년 장충도서출판사 발행) 등으로 증보, 개정되었다. 장충출판사의 책은 1960년 33판까지 발간되는 등 『요리제법』은 50여 년 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2011년 열화당에서 『조선요리제법』(제8판, 1937, 한성도서주식회사)의 복각본이 출간되었다.
『요리제법』은 한국요리를 정리 및 체계화하고 영양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개량하고 보급하는데 기여하였다. 이화여전 가사과 교수로 내한했던 미국인 여선교사 모리스(Harriett Morris)는 방신영의 요리법 강의를 청강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귀국 후 한국요리책(Korean Recipes, Wichta, Kansas, 1945)을 저술 출간하여 서양사회에 한국요리법을 소개하였다.
1933년 4월 방신영 외 1인은 강의영(『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1930)에게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을 무단으로 표절하고 저작권을 침해한데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이 소송은 경성지방법원을 거쳐 경성복심법원까지 올라가 복심법원 민사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는데, 치열한 다툼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1930년대 초 한 여성지식인이 자신이 저술한 요리책의 독창적,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부당한 표절과 저작권 침해에 대항해 법적인 차원에서 지적 권리를 주장하며 금전적 배상과 책 판매 금지를 이끌어내었던 선구적인 사례였다.
방신영은 학자 및 교육자로서 한국요리, 가사, 육아에 근대성을 부여하여 영양학과 가정학을 근대과학으로, 대학교육과정으로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가정』, 『동아일보』 등에 요리 및 의식주 생활 개선에 관한 글도 여러 편 기고하여 지식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여성 문맹률이 높던 1920년에 방신영은 차미리사(車美理士) 등과 여성 계몽 교육단체인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하고, 총무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안성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안성여자야학회를 개설하였다. 또한 1927~1928년까지는 근우회 본부의 재무부 위원을 역임하는 등 여권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가정부인에게 경제적 독립의 길과 가정 의복 개량의 방도를 개척”할 목적으로 이매자·김숙경과 함께 ‘부인수예사(婦人手藝社)’를 창설하였다. 부인수예사에서는 15~30세 여성들에게 편물·미국 자수·불란서 자수·아동 양복 등을 무료로 가르쳤다. 3개월 수료 뒤에는 삼월오복점수공부(三越吳服店手工部)로부터 일감을 얻어 납품하도록 주선해 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1939년 이화 창립 53주년 기념식에서 10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1967년 재단법인 과학기술후원회의 ‘한국 과학기술 진흥에 일생을 바쳐온 과학기술자’에 영양학 전공의 과학기술자로 선정되어 생활비와 연구지원금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