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라는 용어와 동일한 개념으로 쓰이며, 한마디로 전쟁을 수행하는 무력을 수반한 도구이다.본래 병기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뜻하지 않은 위험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는데 사용되었다. 그것이 국가 성립과 민족 형성 이후에는 국가의 안전과 민족의 평화를지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각 국가들은 우수한 병기를 만들고 개발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병기의 보유 문제는 전쟁에서 대규모의 병력, 장수의 뛰어난 지휘력, 잘 훈련된 군대 못지않게 승패를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를 세분화하면 살상력을 가진 도구, 즉 도검(刀劒)·총포(銃砲)·폭탄(爆彈)·어뢰(魚雷) 등을 무기라 하고, 병기는 통신장비·전자장비와 같이 직접적인 살상력을갖지 않은전쟁도구와 무기를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동일한 뜻으로 쓰인다. 무기체계(weapon system)라는 용어는 하나의 무기가 독자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시설·장비·물자·용역·인원 등을 총체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그 무기의 운반수단·보조장비·조작기술 등이 포함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방공전투기의 무기체계는 전투기의 기체·엔진·미사일·기관총·레이더·전자계산장치·항법통신장치·조종사 등 모든 요소를 방공목적에 적합하도록 하나의 시스템으로 종합한 것을 말한다.
무기를 분류하면, 전근대시대의 무기는 크게 공격용무기와 방어용무기로 나눌 수 있다. 공격용무기란 적의 전투력과 전투기재(戰鬪機材)를 파괴하는데 쓰이는 무기를 말한다. 무기의 종류는 거리에 따라 장병기와 단병기로 구분된다. 장병기는 멀리 있는 적을 대상으로 투척하는 무기인 궁시(弓矢)·쇠뇌(弩) 등이 있고, 단병기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적을 대상으로 베는 무기인검(劍)·도(刀), 찌르는 무기인 철창(鐵槍), 걸어 당기는 무기인 철구(鐵句)·유자이기(有刺利器)·쇠낫(鐵鎌), 내려치는 무기인 쇠도끼(鐵斧) 등이 있다. 또 적의 공격을 방호하는 무기는 갑옷(甲)과 투구(冑)·방패(方牌)등이 있다.
그러나 전쟁은 공격용무기와 방호용무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군대의 전투 행동을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는 통신기재, 수송기재, 군마, 군기, 군악기 등이 있다. 전투용구의 쓰임새에 따라 공격용무기나 방호용무기는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현대무기는 사용목적에 따라서 전략무기·전술무기·대공무기·대잠무기·대전차무기 등으로 나누어지고, 사용 장소에 따라서 육전·해전·항공전·수중전·해저·우주무기 등으로 분류된다. 이용하는 에너지나 형상에 따라서는 광학무기·전자무기·전기무기·음향무기·자기무기·음파무기·통신무기·핵무기·방사능무기·화학무기·생물무기 등으로 구분된다.
무기는 어느 시대에서나 국가의 흥망을 거는 전쟁에서 사용되는 것이므로, 그 시대의 첨단기술이 무기개발에 이용되었으며, 발달과정은 전쟁의 성격과 사용된 무기를 기준으로 할 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원시시대로부터 근대적인 화약이 발명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대의 전투는 전투원인 육체적 힘이 주체가 되고, 무기는 그것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석기·청동기·철기시대를 통해서 돌·구리·철 등으로 만든 칼·창 ·도끼 등이 근접전투의 공격무기로 쓰였고, 원거리용으로는 투창(投槍)·노궁(弩弓) 등이 사용되었다. 또 이 시대의 방어무기로는 투구·방패류가 있었다.
화약의 발명으로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시기이다. 1331년 B. 슈바르츠(Berthold Schwarz, 13101384)에 의해서 흑색화약(Black Powder, 일명 ‘검은 가루’)이 발명되면서 화약의 힘으로 탄알을 날리는 총포류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총포가 처음 무기로 쓰인 것은 1346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 때부터였으며, 이후 1496년 총신 안에 나선형의 홈을 파서 탄환을 회전시키는 선조식(旋條式) 총포가 발명되고, 18451846년 탄환을 총신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後裝式) 총포가 개발되었다. 185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기관총이 나타났다.
이 시대의 지상전투무기는 총포의 발명·개량을 계속하여 19세기 초에 근대식 총포가 완성되었다. 해상함정에서는 15세기경에 대양을 항해하는 항양범선(航洋帆船)이 나타났고 이것에 총포가 장비되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배수량 1,000t에 180문의 포를 장비한 그레이트해리(Great Harry)라는 군함을 진수시켰고, 1860년 처음으로 철재를 사용한 선체에, 시속 14노트의 속력을 내는 전함 워리어(Warrior)가 진수되어 근대식 군함의 시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는 성격이 국가 총력전으로 바뀌고, 전쟁의 무대가 세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무기의 발달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특징이 있다.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처음으로 비행기과 비행선이 전쟁무기로 사용되었고, 독가스와 같은 화학무기와 전차·잠수함 등이 등장하여 입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정밀기계·제강·화학·전기 등의 공업이 발달하면서 대함거포·자동차량·기관총·무선장비 등이 발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 수상 W.L.S.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이 ‘마술전쟁’이라고 할 정도의 진기하고 경이적인 무기가 개발·사용되었다. 전쟁 중에 실용화된 것으로는 레이더·소나 등의 전자무기와 독일에서 개발 사용한 V-2호(Vergeltungswaffen-2) 미사일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전쟁의 양상에서도 대규모의 전략폭격, 함재기의 진보에 따른 항모(航母) 기동부대, 잠수함의 성능향상·전자무기의 발달에 의한 대규모 잠수함전과 대잠수함전, 전차·장갑차량 발달에 의한 항공기와 협동으로 기동 뇌격작전(機動雷擊作戰) 등의 특징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원자폭탄의 출현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이다. 특징은 전략무기의 출현과 항공기의 급진적인 발달에 있다. 전쟁의 양상을 일변시키고 군비와 무기체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원자폭탄은 핵분열방식의 것으로부터 핵융합방식의 수소폭탄으로 발전하고, 메가톤급의 위력을 가지게 되었고, 형태도 소형화·경량화되었다.
미사일 부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개발한 V-2호가 대륙간 탄도 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ICBM)로 발전하였고, 전략 미사일의 탄두에도 다탄두 재돌입 탄도탄(Multiple Reentry Vehicle:MRV)·다탄두 독립목표 재돌입 탄도탄(Multiple Independently Targeted Reentry Vehicle:MIRV)이 개발되는 동시에 ICBM을 어느 정도까지는 격추할 수 있는 탄도요격 미사일(Anti-Ballistic Missile:ABM)도 미·소 양국 간에배치되었다.
항공기부문에서는 초음속시대를 이루어 미국의 B-1과 소련의 백파이어 같은 장거리 폭격기도 초음속으로 날게 되었고, 최신예 과학무기를 탑재하여 공격에 임함으로써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폭격기의 방어망 돌파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공중발사순항 미사일(Air-Launched Cruise Missile:ALCM)이 개발·실용화되었다.
해군 함정에서는 원자력추진의 여러 함정이 제작되었다. 특히 잠수모함은 폴라리스 잠수함으로 발전하였고, 수중에서 발사되는 장거리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SLBM) 체계도 출현하였다.
우주무기 분야에서는 정찰·조기경보·통신·기상 등의 비공격적인 군사위성이 실용화되었고, 이것들을 파괴하기 위한 킬러 위성(Killer Satellite)의 개발도 추진 중에 있다. 미국에서는 유인우주선(스페이스셔틀) 컬럼비아호(號)를 통하여 우주전쟁에 대비한 실험을 하였다. 또 탄도미사일 방어조직을 뚫고 들어오기 위한 방어돌파장치(PENAID)·다탄두의 사용 등으로 ABM의 효력이 의심스럽게 되면서 ABM에 대신하는 대(對)미사일·방공용의 고출력 레이저, 입자빔 무기가 개발되어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 실용화되었다.
우리나라의 무기는 전쟁을 전제로 발달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1831)의 말처럼, 인류는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무기와 무예는 발달하였다. 전쟁의 승패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우수한 무기의 제조와 개발은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 점은 한국 역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한민족은 역사 기록상 931회의 침입을 받아왔다”라는 주장도 우리 역사상 전쟁이 많았음을 강조한 것이라 이해된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전쟁만도 가까이는 1950년에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6·25전쟁으로부터 멀리는 기원전 300년 경 요하(遼河)를 경계로 하여 벌어진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많다.
한국 역사상 규모가 제법 컸던 전쟁 혹은 전투만 해도 삼국시대의 고구려-수·당전쟁·삼국간의 통일전쟁·신라-당 전쟁, 고려시대의 고려-요(거란) 전쟁·고려-여진 전쟁·대몽항쟁·왜구와 홍건적의 격퇴·대마도 정벌과 조선시대의 조선-일본 임진왜란전쟁(임진왜란)·조선-청 전쟁(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침략기의 의병전쟁·독립군전쟁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 전쟁은 분명 한국 역사의 중심에 있다. 이들 전쟁은 분명 한국 역사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무기도 이러한 전쟁을 치르면서 변화·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당대의 인간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역사는 전쟁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결국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전쟁의 원인은 대체적으로 정치세력이나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전쟁에 대한 모험주의자나 전쟁주의자의 출현으로 발생된 때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선 평소 전쟁에 대비하는 일이 중요했다. 전쟁에 잘 대비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우수한 무기를 제조·개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군사적 능력 내지는 국방력의 근간이 되었던 무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무예를 연마한 군사는 전쟁에서 요구되어지는 체력은 물론이며 전투 면에서도 우세하였다. 따라서 무예는 군사훈련과도 관련이 깊었다.
실제 우리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삼국시대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원을 전후하여 고구려·백제·신라가 주변 소국을 정복해 나가면서 고대국가를 형성해가는 과정 자체가 전쟁이었다. 고대국가를 형성한 후 4세기 이후에는 영토 확장을 위한 삼국간의 쟁패과정 또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7세기 수·당이 중원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주변국가의 정복에 나서면서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삼국시대의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었다. 삼국통일전쟁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강한 전력, 즉 잘 훈련된 군대와 우수한 무기가 없이는 국가를 수호할 수 없었던 까닭에 삼국은 제각기 무기 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고대의 전투에서 주력 무기는 창·도검·도끼·활이었다. 이 가운데 창은 병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활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우수한 활을 보유하였다. 이는 고대 문헌에서 한·중·일 삼국의 무기를 평가하면서 중국의 창, 일본의 칼, 조선의 활이라 기록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기마전과 수성전을 위주로 하는 전쟁방식이 널리 유행한 데에 있다. 또한 사계절이 뚜렷하여 탄력성 있는 활대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산재하였던 사실도 들 수 있다.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는 무기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 고려의 무기와 무예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였다. 고대 무기의 기본이었던 창·활·칼은 고려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실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도 이들 무기가 주력이었다. 그러면서 강한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고려-여진 전쟁 과정에서 기병 중심의 무기를 강화하였다.
고려시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일종의 기계식 활인 쇠뇌쇠뇌의 개발에 주력하였다는 점이다. 쇠는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여 화살을 쏘는 활의 일종이다. 한마디로 기계식 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쇠뇌는 전통적인 활에 비해 개선된 무기인 것이다. 쇠뇌는 나무로 된 활 틀과 발사장치인 뇌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뇌기는 시위걸개와 방아쇠 멈추개, 그리고 방아쇠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의 쇠뇌도 삼국의 그것을 계승하여 보다 강력한 무기로 발전시켰다. 명중률도 쇠뇌가 활에 비해 대단히 높다. 쇠뇌는 또 엄폐된 곳에서 운용할 수 있어 방어에도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엄폐된 곳의 구멍을 통해 언제라도 사격이 가능하여 공격에도 유리하다. 따라서 고려는 쇠뇌쇠뇌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부대를 설치하였다.
고려 말에 무기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변화는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약과 화약병기를 자체적으로 대량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어 많은 화약병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전(火箭)·질려포(蒺藜砲)·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 18종의 화약병기를 개발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자체 제작한 화약병기를 가지고 고려는 침탈해 온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조선은 부국강병을 최상의 과제로 삼아 다양한 무기의 개발과 무예가 시행되었다. 고려말에 개발된 화약병기를 개량되어 조선만의 독창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천자총통(天字銃筒)·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황자총통(黃字銃筒)·총통완구(銃筒碗口)·삼총통(三銃筒)·사전총통(四箭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세총통(細銃筒)·신기전(神機箭)등이 개발되었으며, 이로써 명실상부한 화약병기 시대가 열렸다. 특히 세종대(재위 1418~1450, 조선 제4대 왕)에는 화약병기의 발달에 있어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는데,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또한 1451년(문종 원년)에는 다량 살상무기라 할 수 있는 화차화차를 개발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군사 선발과 훈련으로서 무예가 강조되어 격구격구(擊毬)와 창술창술(槍術) 등의 무예가 시행하였다. 특히 조선시대는 활쏘기가 강조되었는데, 활쏘기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듯 우수한 무기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일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하였다고 할지라도, 무기제조를 누구에게나 열어 놓을 수는 없었다. 창끝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왕조의 존폐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왕조 정부가 무기의 제조와 개발을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적으로 무기를 제조할 수 없게 하였다. 특히 화약병기가 개발되면서 이러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15세기 후반 즉 단종대부터 화약병기는 쇠퇴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획기적인 변화는 조총조총(鳥銃)의 전래라 할 수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조총은 종래의 총통류와 달리 격발장치가 있어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龍頭)에 끼워져 있는 화승(火繩)이 화약에 불을 붙여 줌으로써 탄환이 발사되는 화승식소총(火繩式小銃)이었다. 성능과 운용면에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은 조총의 개발과 더불어 무기 제작 기술의 선진화를 이루었다. 인조 대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조총이 일본의 그것보다 성능이 훨씬 우수한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하면서 재래식 전통무기를 우리나라의 환경에 맞게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다양한 단병무기(短兵武器)가 도입되었고, 또한 표준무예의 보급도 서둘러 각종 무예서가 발간·활용되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은 살상력을 극대화하면서 전술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아울러 우리 지형에 맞는 무기를 개발·발전시켰으며, 전쟁 규모의 발전에 따라 무기의 종류와 형태를 변화시켰다. 또한 중국의 선진화된 병기체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 실정에 맞게 개발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던 시기에 있어서는 무기와 무예의 필요성이 크게 줄어들었고, 실제 군사훈련도 등한히 하여 조선-일본전쟁(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선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볼 때, 무기는 전쟁을 대비하였을 때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사회는 국권 수호를 위하여 다시 무기에 눈을 돌렸다. 1810년(순조 10)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밀려오는 구미열강의 침탈로 일어난 1866년(고종 3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병인양요)과 1871년(고종 8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신미양요)이 군사무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은 서구사회와 군사무기의 발달 수준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선교사를 처형한 사실을 빌미로 삼아 1866년 10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범하면서 발발한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은 당시 조선과 프랑스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체계를 동원하여 싸운 전쟁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구식 화승총인 조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1840년경부터 뇌홍(雷汞)이나 뇌관(雷管)을 쳐서 발포하는[擊針] 뇌관격발식(雷管激發式)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장군이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지만,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공은 무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러한 점은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공 때도 마찬가지였다.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공은 1871년 4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삼아 아시아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해협으로 진입시킨 데에서 비롯된 조선·미국 두 나라 사이의 무력충돌사건이었다. 이때 미국은 1871년 콜로라도(Colorado)호를 비롯한 5척의 군함에 병력 모두가 플리머스총, 스프링필드소총 또는 레밍턴소총으로 무장하였고, 포병대와 장교는 단도와 레밍턴연발권총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침략에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은 광성진에서 군사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했으나,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로 조선군이 완패하였다.
19세기의 무기에 대한 관심은 병서(兵書)의 간행으로 나타났다. 전통무기 운용방식의 계승을 역설한 박종경(朴宗慶, 1765~1817)의 『융원필비(戎垣必備)』를 제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홍경래(洪景來)의 난이었다. 그는 이때 훈련대장에 재직하면서 군대를 점검하고 관련 장부를 검토해보고, 국가의 외란과 내치에 대한 대비책이 소홀함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작한 무기의 형태와 제원과 제작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 외국의 병서를 수입·응용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청나라 위원(魏源, 1794~1857)이 저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이다. 『해국도지』는 저자가 아편전쟁의 패배를 직접 체험하고서 국가의 자강과 발전을 위해서 저술한 것이었다. 위원은 해상을 통해 침범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서양의 문물을 수입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서양의 우수한 국방력이 전함, 화기, 군대 양성과 훈련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조선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해국도지』에는 전선, 화륜선, 각종 대포, 대포 사용시의 측량 방법, 화기 소총, 수뢰포, 서양의 포대 등에 대해서는 설명문과 함께 자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과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은 『융원필비』와 『해국도지』를 대본으로 간행된 것이었다. 이들 병서의 편찬은 결국 기존의 무기를 보다 효율적이고 집약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수한 무기에 대한 생각은 병서의 재발견에 머무르지 않았다. 신식 무기와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 이후 서구문물제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갖게 된 생각이었다. 1880년(고종 17)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여 무비자강책(武備自强策)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유학생들은 화약·탄약의 제조법뿐만 아니라, 전기·화약·제도·제련·기초기계학에 대해서까지 학습할 수 있었다. 아울러 1881년 4월 신식군대인 교련병대를 설치하였다. 이는 조선정부가 당면한 ‘부국강병’을 이루어가는 것이었다.
부국강병의 추진은 교련병대교련병대(敎鍊兵隊)의 설치와 더불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0.12)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파견(1881.1), 영선사(領選使) 파견(1881. 윤7)이었다. 교련병대의 교육훈련은 군사 기본동작인 제식훈련과 군사이론 및 소총의 사용법 등이었다. 이러한 교련병대는 설치된 지 1년 2개월 만에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인하여 해체된 소규모의 신식 군사교육기관에 불과하였지만, 우리나라 군사근대화를 위하여 외국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실시한 최초의 신식 군사훈련이었다.
대한제국기에서 독립운동기에 이르는 기간은 자강과 독립을 위해서 우수한 무기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것은 근대무기를 수입해서라도 필요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군사장비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자체 제작하려는 노력보다는 완제품 장비를 직수입하여 이용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1899년에는 소총, 육혈포(권총), 군도, 권총탄, 맥심포(麥沁砲), 야전포(野戰砲), 산전포(山戰砲), 회선포(回旋砲) 등을 수입하였다. 이렇게 수입된 각종 군사장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무장에 적극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3,435톤 규모의 군함인 ‘양무호’를 도입함으로써 군사력 증강에 일대 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침탈에 대항해 일어난 의병항쟁의 전개는 신무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하였다.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제1차 의병전쟁(1896)은 1894년 청·일전쟁, 갑오개혁, 이듬해의 민비시해,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일어났다. 2차 의병전쟁은 1905년 9월 러·일 휴전 성립을 전후하여 1906년 여름까지 계속 확대되었다. 병오의병(丙午義兵)으로 불린 2차 의병전쟁은 1907년 8월 한국군의 항전을 계기로 마침내 전국 의병의 반일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들 의병의 무기는 보잘 것 없었다. 1차 의병전쟁 당시의 경우에도 동학농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의병의 무기는 매우 열악하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동학군의 무기는 죽창, 화승총, 천보총 등과 같은 전근대적인 무기였던 반면, 일본군의 무기는 스나이더 소총(Snider rifle)과 무라타 소총(Murata rifle)과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무기들이었다. 제2차 의병전쟁에 이르러서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의병부대는 칼, 창, 화승총 등 재래식 무기를 주로 소지하고 있었다. 이것으로는 군대를 아무리 잘 운용한다 하더라도 38식 소총, 기관총 등과 같은 세계 수준의 무기를 사용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하여 승리하기란 요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우 열악한 무기 체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의병은 화승총을 개조해서든지 서양총을 구입하든 간에 신식총을 가지고 승리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후, 독립군에게 무기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서북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에서는 3·1운동 발발 직후부터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항일전을 표방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투철한 정신과 고양된 사기 외에도 현실적인 조건으로 군비조달과 무기구입 및 군사훈련 등과 같은 전력증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총기와 탄약 등의 화력증강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만주독립군이 사용하던 무기는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중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군대로부터 구입해 온 것이었으며, 여기에 소요된 자금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국내 동포가 헌납한 군자금이었다.
독립군의 무기는 실로 다양하였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 밖에도 미국제나 독일제, 심지어는 일제 총까지 섞여 있었다. 권총류로는 루가(Luger)식을 비롯해 7연발식·남부(南部)식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무기로는 기관총과 속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폭탄이라 부르던 수류탄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6·25전쟁 당시한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를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군의 T-34전차 242대를 앞세운 보병·전차·포병 협동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6·25전쟁에서 운용되었던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공산군의 다양한 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작·개량되어 활약했던 무기들이며, 지상무기·함정·항공기 운용 관련 전쟁이론을 시험하거나 이를 구사한 것들이었다. 6·25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무기의 재등장은 물론 신무기의 출현으로 마치 무기 실험장과 같았다.
6·25전쟁은 국제적 성격을 띤 국지전이었으며, 무기체계의 운용 면에서도 제한전쟁(制限戰爭)의 성격이 나타나는데, 이를 지상무기·함정·항공기 운용 등 전략·전술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① 지상무기의 운용 면에서, 북한군은 T-34 앞세운 보병·전차·포병 협동공격으로 3일만에 수도 서울을 탈취하였는데, 대전차 무기로는 적의 전차를 제압하는데 한계점이 있어 한국 지형에 적합한 전차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② 화기의 전술적인 운용 면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기관총을 포함한 여러 가지 종류의 화기들을 개별적으로 사용하면서 작전을 하였으며, 북한군은 각 화기의 최대사거리 도달 이전부터 화기들을 개별적으로 사용하면서 작전을 전개하였다.
③ 해군의 제해권(制海權) 장악의 중요성과 항공모함의 가치가 입증되었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 10월 원산 상륙작전, 12월 흥남 철수작전 수행시 제해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항공모함 등이 크게 기여했다.
④ 항공기 운용 면에서, 북한군은 개전 초기 3일간 우세한 공중활동을 했으나 제공권을 상실하였다. 현대전에서 공군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⑤ 기동성이 있는 수송, 정찰, 철수, 구출작전 등을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서 헬리콥터의 잠재력이 크게 입증되었다. 처음으로 등장한 헬리콥터가 한반도에서 정찰, 후송 및 구조작업에 적합함을 보였다.
⑥ 1950년 7~8월에 미8군은 근접항공지원 요청을 중계 또는 통합할 수 있는 통신망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전술항공통제반이 전방항공통제관을 활용하여 전달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후 한국군은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한국군의 지상전력은 기동전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한국형 전차의 지속적인 배치와 한국형 전차 성능개량 및 기동지원 장비 확보 등으로 전투능력을 향상시켜 왔다. 대(對)기갑전력은 대전차화기와 유도무기의 통합 운용체제로 발전시켰다. 또한 탱크는 한국형 전차(K-1 전차, TYPE 88)를 비롯 M-47·48이 있으며, 장갑차는 K1FV와 M-113·200이 주력 무기체계이다. 견인포는 105㎜(M-101, KH-178), 155㎜(M-53, M-114, KH-179), 203㎜(M-115) 등이 있다.
또한 자체 개발한 구룡다연장포가 주목할 만하다. 미래의 전장을 주도할 다기능 전력으로서 지상군 항공전력은 통합전력 발휘차원에서 각 군에서 운용되는 헬기전력을 통합운용함으로써 전투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공격용 헬기로는 AH-F·J와 휴즈사(社)의 500MD가 있다. 방공무기체계로 지대공 미사일로는 자블린(Javelin: 견착식 휴대용 대공 유도탄), 레드아이(Redeye: 견착식 휴대용 대공 미사일), 스팅거(Stinger: 견착식 휴대용 열 추적 유도무기), 미스트럴(Mistral: 휴대용 대공 유도탄), 호크(HAWK: 대공 유도무기) 등을 수입·운용 중이다.
해상전력도 북한 함정의 수적 우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질적·양적 보강과 적의 잠수함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입체적인 대잠수함 전력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구축함·호위함·초계함·고속정 등 성능이 우수한 한국형 전투함을 개발하여 실전 배치함으로써 함정의 질적 보강에 힘쓰고 있다. 보유하고 있는 구축함은 하푼(Harpoon: 대함공격용 미사일)과 같은 미사일을 구비하고 있으며, 순양함·호위함 등은 하푼뿐만 아니라 엑소셋(Exocet: 함대함, 공대함, 지대함 순항미사일) 등을 구비하고 있다.
해상전력도 자체 무장된 헬기 공격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500MD(맥도널 더글라스) 경량헬기와 영국의 링스(Lynx: 대잠·대함공격용 헬기)가 주력기종이다. 항공무기체계는 유사시 조기에 제공권을 확보하고 지상·해상 작전에 지원을 하도록 질적 개선에 중점을 두어 왔다. 1960년대부터 F-4, F-5 전투기를 도입하면서 구형기인 F-86 전투기를 대체시켰고, 1980년대는 제공호(號)를 국내에서 생산·배치하였으며, 오늘날은 F-16 전투기를 확보하여 최일선 영공방위 임무를 담당시키고 있다. 이들 주력기종이 무장한 미사일은 공대지 미사일(Maverick)과 공대공 미사일(Sparrow·Sidewinder) 등이 있다.
2010년 이후 도입·개발된 우리나라의 최신 무기로는 육군에서는 K1A1전차, K2 흑표 전차, K-9 자주포, K21 장갑차가 있고, 공군에서는 15K, T-50 등의 신예전투기와 ‘신궁’으로 불리는 휴대용 대공미사일이 있다. 해군에서는 KD-3 세종대왕급 이지스구축함과 ‘청상어’로 불리는 어뢰, ‘해성’으로 불리는 함대함미사일, ‘천룡’으로 불리는 크루즈미사일 등이 있다. 이 무기들은 2013년 현재 실전 배치되어 있다.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전투무기는 활이다. 우리 활의 전통은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로 올라가며, 화약병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활은 원거리 무기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기였다. 동이족(東夷族)으로 불린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궁시를 가장 중히 여겼고, 가장 대중적인 무예 역시 활쏘기로 이를 가장 장기로 여겼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좋은 활을 만들었으며, 이를 사용한 명궁의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오늘날에도 비록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양궁에서 보여주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투무기이면서 사냥에 필요한 도구였던 선사시대 이후 활은 점차 자신을 보호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도구로서 그 활용도가 높아졌던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활 쏘는 기마 무사라든가 군사 행렬 속에 포진해 있는 궁수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활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고구려의 ‘맥궁(貊弓)’은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활의 전통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시험 과목에 활쏘기가 들어있고, 일상생활에서도 사대부들이 소양을 닦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활쏘기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더욱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활은 다양하여 재질과 용도 등에 따라 각궁(角弓), 정량궁(正兩弓), 예궁(禮弓), 목궁(木弓), 철궁(鐵弓), 철태궁(鐵胎弓) 등으로 구분되는데, 그 중에서 각궁이 가장 대표적이다. 무소뿔, 참나무, 소힘줄 등 여러 재료를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각궁은 그 탄력성이 외국의 활에 비해 탁월하여 보병은 물론이고, 기병전에서도 사용이 편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활은 천하제일의 장기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화살에는 전투용 화살인 편전(片箭)을 비롯하여 목전(木箭), 철전(鐵箭), 예전(禮箭), 대우전(大羽箭), 세전(細箭), 유엽전(柳葉箭), 화전(火箭), 주살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철전, 유엽전, 편전, 박두(樸頭) 등은 무과의 시험과목에 채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편전(片箭)은 가장 대표적인 전투용 화살이다. 편전은 조선의 장기로 자타가 공인하였는데, 크기가 보통 화살의 1/3에 불과하기 때문에 흔히 ‘애기살’로 불렀다. 이처럼 작은 화살을 보통의 활에 얹어 발사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통아(筒兒)라는 보조기구를 이용하여 가능하게 하였다.
편전의 발사는 편전을 통아에 넣어서 시위를 당겨서 발사하면 화살은 통아의 홈을 타고 빠져나가 멀리 날아가고 통아는 손앞으로 툭 늘어진다. 발사 후에 통아가 지면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끈을 손목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전은 일반 화살보다 크기가 작고, 화살대를 구워서 만들었기 때문에, 강하면서도 가벼운 효과로 화살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속도가 빨라 갑옷까지도 관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활 중에는 쇠뇌(弩)라는 특이한 형태의 활이 있는데, 일종의 기계식 활이다. 쇠뇌는 강한 완력이 필요없이 때문에, 간단한 기계장치로 활시위를 걸어서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화살을 발사하기에 노약자나 부녀자라도 사용할 수 있었던 활이다. 쇠뇌의 장점은 전통적인 활에 비해 정확성이 높은 점이다. 또한 활보다 더 강력한 화살을 발사할 수 있고, 여러 개의 쇠뇌를 연결시켜서 동시에 여러 발의 화살을 집중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쇠뇌는 전술적으로 매복이나 복병에서 그 활용도가 높았다.
적과 가장 가깝게 접근된 상태에서 싸우는 무기인 도검(刀劍)은 선사시대부터 등장한다. 이후 점차 발달하게 되는데, 가장 독특한 특성을 보이는 것의 하나가 세형동검(細型銅劍)이다. 세형동검은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하는데, 이전의 비파형동검이나 중국식 동검을 개량 발전시킨 우리만의 독특한 구조를 지닌 칼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부엌에서 사용하는 식칼을 포함하여 전통 도검류의 칼등에는 길게 패인 홈, 즉 피홈이 있는데 찌르거나 벨 때 피가 흐르는 고랑으로 무사가 칼을 사용하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 피홈이 바로 세형동검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의 칼에도 등장하고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칼에서도 등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느 민족보다도 앞서서 피홈을 발달시킨 우리 민족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흔적인 셈이다.
한편 도검은 기본적으로 전투용 무기이면서 동시에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고 벽사(辟邪)의 기능도 수반한 의기(儀器)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둥근고리칼인 환도대도(環頭大刀)에는 둥근 고리 안에 금과 은의 귀금속을 사용하여 다양한 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도검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궁시에 밀려 보조적인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조선은 초기에 군사의 기본 무기인 환도(環刀)를 규격화하기도 하였으나, 칼이 군사들의 필수적인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화기와 활에 비해 실전 무기로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개인마다 근력의 차이로 인해 정해진 규격의 환도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곤란한 점도 있었다. 따라서 창술이 무과시험에 포함되고 있어서 어느 정도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에 비해 검술은 무과시험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그 발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과의 대적을 통해서 검술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부터 무과시험에 검술이 채택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 칼의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다소 바뀌었으나, 활과 화기의 보조병기로서의 위치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검으로는 환도(環刀)·예도(銳刀)·인검(寅劍)·운검(雲劍) 등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도검은 환도로 조선 후기에도 각 군영에 비치된 단병무기가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환도는 근접전에 있어서 전투용 기능보다는 호신(護身) 내지는 의장용(儀裝用) 기능에 머물러 그 활용도는 낮았다. 따라서 환도는 모든 병사에게 지급된 개인 휴대무기이지만, 그 용도가 백병전에서 최후로 자신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호신용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도검은 중국, 일본 도검이 따라올 수 없는 실용성과 예술성·과학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조선 환도의 도신은 한 면은 편편하고 다른 한 면은 중단위에 각진 형태로 배가 나온 형태가 많다. 이는 조선 환도 특유의 독특한 도신 형태로 다채로운 대상에 유효한 절삭력에 강점을 지녀 도검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 환도의 칼집은 외형적으로는 옻을 이용한 주칠이나 흑칠로 마감한 정도이거나, 어피를 감싸 마감처리한 정도로만 이해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그 구조와 견고함, 내구성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 도검의 칼집이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 있다. 먼저 모든 내구제의 특성을 동시에 수용하고 복합적으로 조화시켜 칼집의 내구성을 높이고 환도의 무게를 감소시켜 환도의 장시간 패용을 쉽게 하였다. 또한 칼집의 폭과 두께가 매우 얇아 도검을 패용한 상태의 활동을 용이하게 한다. 특히 내구성이 뛰어난 소재의 이상적인 결합으로 무게는 감소하고, 규격은 줄었음에도 도신을 보호하는 성능은 월등히 높였고, 충격과 마모에도 견뎌낼 수 있는 구조를 통하여내구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외에도 패용장식과 잠금장치, 칼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한 부분인 슴베와 자루의 고정방식 등에도 독창적이고 조선 환도의 과학적인 원리가 숨겨져 있다. 도검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칼날 구조, 가볍고 견고하면서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칼집 등이 조선 도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창은 화약병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다. 사냥 도구가 아닌 전투용 창은 청동기시대부터 전장에서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각 시대의 전투방식에서 필요한 기능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의 창이 만들어졌고, 같은 창이라도 시대에 따라 용도 면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주로 투겁창(銅矛: 긴 장대 끝에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쌍날의 칼이 달린 창)을 사용하였으며, 이 밖에 기창(旗槍)이 의장용으로 사용되어 국가적 행사의 위엄을 과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기창은 단창(短槍)이라고도 하는데, 형태는 장창과 동일하나 길이는 장창의 절반 정도였다. 황색이나 홍색의 작은 깃발을 달아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창은 전투용과 의장용으로 구분되어 발달하였다. 의장용으로 사용된 창으로는 극(戟)과 기창(旗槍)이 있었고, 전투무기로서의 창에는 기병용의기창(騎槍)과 보병용의 기창(旗槍)이 있었다. 특히 창술은 무과 시험과목에 들어 있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창은 전투무기로서 손색이 없었으나, 장기간의 평화로 인해 점차 무기에 대한 관심을 떨어져 자루 길이도 짧아지게 되었고, 창술도 점차 퇴보하기에 이르렀다.
1587년 대마도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귤강광(橘康廣)이 조선군이 지닌 창을 보고 “너희들 가진 창이 자루가 몹시 짧구나.”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창술은 어느 정도 유지한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선교사의 「1592년 일본 연례보고서」에 “꼬라이 병사들은 미늘창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중국사람들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의 창술에 밀려 고전을 면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적과의 근접전에서 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실전에서 위력을 보였던 명나라의낭선(狼筅)·기창(旗槍)·장창(長槍)·당파(鐺鈀)·죽장창(竹長槍) 등을 도입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개량했고, 병사들의 창술 훈련도 체계화하여 무기체계에 변화를 꾀하였다. 이는 정조 때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발간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화약의 개발은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한반도는 왜구들의 노략질로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는데, 최무선은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화약과 화약병기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고, 또한 여러 화약병기를 제조해서 왜구 토벌전에 사용하였다. 화약병기의 등장은 무기체계상에 있어서 일대 변혁을 초래해 전쟁의 형태도 변했다.
조선시대에 화기 개발은 일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대외 방어전략 측면에서 적극 개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무선의 화약과 화기 제조술이 그의 아들인 최해산으로 전승되었고,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개발되었다.
특히 세종은 북방의 4군 6진 영토 개척을 위해 화약과 화기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추진하였다. 세종은 재임기간(1418~1450) 중에 대대적인 화기 개량을 단행하였는데, 주목적은 화기에 쓰이는 화약을 적게 쓰고,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실전에서 화기의 등장은 궁시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화기를 이용한 화살의 발사는 화살의 사거리를 증대시켰으며, 여러 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게 하였다. 나아가 화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굉음과 불이 수반될 때에 그 효과가 더욱 컸다.
특히 세종대에는 화기 사격법에 대한 개혁도 이루어져 사격을 하는 사수와 장전을 해주는 보조의 분업을 통해서 사수는 보다 전문화된 기술로 화기의 전술적 운용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조선의 화약과 화기 제작기술은 국제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화기제작 기술에 엄격한 관리와 지나친 통제책,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와 무사안일한 국정 운영으로 화약과 화기 기술에서 선진국이었던 조선은 점차 기술상의 후진국으로 전락되어 갔다.
1592년 임진왜란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기의 선진국이라 자처했던 조선의 실정을 뚜렷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전쟁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월등하기도 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연전연승을 구가하였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천·지·현·황자총통 등 우수한 대형화포를 거북선과 판옥선에 장착하여 운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형 화포는 대형 화살(箭)과 다수의 탄환을 발사하여 원거리에서 적선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지녔던 것이다. 당시 일본 수군이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뱃전을 붙이고 백병전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각종 화포를 장착하여 함포전술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무기의 중요성을 절감한 조선은 조총을 비롯한 호준포·삼안총·불랑기 등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였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조총의 우수성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청나라가 조선에게 조총과 우수한 조총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화약병기에 관한 종합적인 기술력의 산물이 바로 화차(火車)이다. 전쟁에서 화약병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화약병기의 중량이 무거워 운영상의 애로가 많았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레에 장착하여 기동력과 안전성을 구비한 병기가 등장하였다. 화차는 이러한 병기의 하나로 수레 위에 총통기(銃筒機) 내지는 신기전기(神機箭機)를 장착하여 수백 개의 화살과 신기전 등을 동시 또는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최첨단 무기이다.
당시는 4군 6진의 건설과 여진정벌 등으로 인해 신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시대였다. 이에 부응해서 공격력의 화약병기와 기동력의 수레와의 단순한 결합이라는 수준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수준의 화차가 1451년(문종 1)에 제작된 문종화차이다. 이 화차는 조선의 대표적 화차로 당시로서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발명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독창적인 구조로 설계된 이 화차는 오늘날의 다연장(多聯裝) 발사기와 같다. 신기전기화차와 총통기화차 두 종류가 있는데, 신기전기화차는 중신기전 100발을 장착하여 단발 내지는 연발로 발사할 수 있고, 총통기화차는 사전총통 50자루가 장착되어 있어 세전 200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다. 화차에 사용된 수레는 보통 수레와는 달리 차체가 바퀴 위로 올려진 독특한 형태인데, 이것은 화살의 최대 사정거리를 높이기 위해 발사각을 43도에 이르도록 한 과학적인 설계였다. 또한 바퀴축을 수레의 차체보다 좁게 하여 우리나라와 같이 도로의 폭이 좁은 지형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100년간 문종화차는 부분적으로 개량되면서 전술적 효능을 발휘하였다. 성종대(1469~1494) 여진 정벌과정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진격하여 적을 격퇴하는데 화차가 활용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화차가 적극 활용되었다. 특히 행주산성전투에서 권율은 변이중이 개발한 화차 40량을 운용하여 일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상황을 극복하고 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조선은 양란을 겪은 후에는 북방 평원전투를 염두에 두고 방호력을 증강시킨 화차를 개발하였다. 또한 화차 단독작전이 아닌 보병 및 기병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화차를 제작해서 활용하였다. 다연장로켓의 선구적 형태를 보여주는 화차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이고 첨단기술이 집약된 무기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조선 수군의 군선은 맹선(猛船)이었다. 맹선은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인원과 무기, 그리고 군량을 적제하고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해적질을 목적으로 조선 연해를 침입하는 왜구의 선박은 조선의 맹선에 비해 선체가 작고 날렵했다. 따라서 왜선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선체가 둔하여 나포할 수 없었다.
이에 왜구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전함이 개발되었다. 을묘왜변이 발발한 1555년(명종 10)에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신형 군함의 시범을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판옥선(板屋船)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판옥선은 주변국의 선형변화에 대처하고 국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명나라와 일본의 선형을 참조하여 개발한 군선이라 할 수 있다.
판옥선은 이전의 전함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전함이다. 맹선 등을 포함한 기존의 전함의 경우 갑판 위에 여러 층의 누각을 쌓아올린 경우는 종종 있어 왔다. 기본적으로는 갑판이 하나밖에 없는 평선(平船)으로서 그 갑판 위에 사부(射夫), 포수(砲手) 등의 전투원과 노꾼(櫓軍)과 선원 등의 비전투원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투와 주행 모두의 효율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노꾼들의 안전 역시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판옥선은 기존 전함의 갑판 주위에 판자로 된 두꺼운 방패를 빈틈없이 늘어세우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갑판을 설치하여 이름 그대로 갑판 위에 ‘판자로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격군들은 2층 갑판 아래의 보호된 공간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원들은 2층 갑판 위에서 격군들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전투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판옥선은 맹선에 비해 배의 높이가 보다 높아졌는데, 이로 인하여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기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의 명중률과 사거리 역시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장점을 지닌 판옥선은 을묘왜변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배치되어 맹선 체계를 대체하였다.
판옥선을 비롯한 조선 전함의 또 하나의 특징은 평저선(平底船)이라는 점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기에 썰물이 되어도 배가 좌초되어 전복될 위험이 없었고, 첨저선(尖底船)에 비하여 좌우 선회 능력이 뛰어났다.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과 암초가 많은 우리나라의 바다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특징이었다. 특히 평저선은 전투를 벌일 때에도 유리하였다. 평저선과 대비되는 첨저선은 기동력이 유리하지만, 일단 선체 하부의 구조가 좁기 때문에 상갑판에서 화포를 발사할 시의 하중이나 반동을 흡수하기가 불리한 반면에, 판옥선과 같은 평저선은 반동 흡수에 유리한 구조였다. 그리고 판옥선은 전통 한선의 방식으로 제작된 배였기에 구조적으로 튼튼하였다. 우선 목재로 사용하는 소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단단하였고, 배에 쓰이는 판자 역시 더욱 두꺼웠을 뿐만 아니라,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목재를 결합하였기에 배가 오래갈 수 있었다. 돛 역시 조선의 경우 역풍에 강하고 다루기도 쉬운 세로돛을 사용하였고, 4~6명이 젓는 커다란 노가 달려 있어 보다 효율적이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우수성에 덧붙여 판옥선에는 이미 고려 말부터 200년간에 걸쳐 발전해온 위력적인 함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화기 제작기술을 도입한 지 겨우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해상에서의 함포를 이용한 전술능력도 떨어졌다. 특히 조선은 군함에 탑재한 화기를 사용하여 왜구를 토벌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 시기에도 판옥선에서 천(天)·지(地)·현(玄)·황자총통(黃字銃筒) 등의 대형 화포와 승자총통(勝字銃筒) 등의 소형 화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였다. 따라서 해전이 벌어지면 일본 수군은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배의 앞쪽 가장자리 부분[舷]을 붙이고 백병전(白兵戰)을 위주로 전술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선박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 화포를 바탕으로 함포전술(艦砲戰術)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기간 중에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명실상부한 주력 군함으로서 일본 수군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군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선(戰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거북선은 종래 조선의 군함인 판옥선에다 철판으로 된 덮개를 씌우고 거북머리를 붙인 발명보다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전함이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장군은 태종 때부터 존재하였던 거북선을 개량하여 본영(本營)과 방답진(防踏鎭), 순천부(順天府)의 선소(船所)에서 3척을 제작하였다. 이후 한산도(閑山島)로 이진(移陣)한 후 2척을 더 건조하여 조선 수군은 총 5척의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복원된 거북선은 모두 정조 때에 편찬된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기록되어 있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바탕으로 해서 제작되었다. 외형은 전면에 용두가 있고, 거북선 좌우측에 각각 6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으며, 거북선 상판 덮개에는 +자형의 길이 나 있다. 내부 구조는 2층으로 되어있다. 배 밑과 갑판 위 부분으로 나눠져 있어서, 1층에 창고, 선실 등이 있고, 갑판 위, 2층에는 선장실을 비롯하여 노군과 전투원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전함으로써 거북선의 장점을 든다면, 내부 전투원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과 화포 및 방호력의 우수성을 꼽을 수 있다. 거북선은 전투 개시 직후 적의 함선 대열에 뛰어들어 돌격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대포를 쏘아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데, 이를 위해서 거북선은 두터운 재질로 제작되었으며, 적의 침입으로부터 승무원을 보호하고자 개판을 씌우고 송곳을 꽂아 놓았다. 또 전후좌우에 14개의 화포가 장착되어 있어 적선에 의해 포위된 상황 하에서도 공격이 가능하였다. 특히『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거북머리의 입에 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전면 화포 공격까지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개판에 철판이 씌워져 있어 방호력이 우수하기 때문에 적선이 접근전을 펼쳐도 쉽게 침입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북선이 맹렬히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포를 쏘고, 용두를 이용하여 당파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이러한 거북선은 아직까지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논란이 있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판옥선(板屋船)과 더불어 운용해 온 돌격전함이었고, 사천해전에서부터 투입되어 한산대첩, 부산해전 등의 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이 거북선들에는 천자총통·지자총통 등 대형 화포가 장착되어 막강한 화력을 구사하였고, 이는 연승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거북선은 그 중요성이 점차 커져 정조 때에는 40여 척으로 늘어났고, 이후 고종 때까지 존재하였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