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뜻에서는 항구에 입항하는 선박의 짐을 내리고 싣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들의 작업내용은 선박의 화물을 들어올리는 작업을 비롯해, 화물의 보관과 관련한 부두창고의 입·출고작업, 타지수송과 집하(集荷)를 위한 철도객차 및 자동차의 상·하차작업(上下車作業), 때로는 이송 전 화물의 포장 및 검근작업(檢斤作業) 등이다.
부두노동자의 역사는 상업적 해상수송이 대두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상업적 해상수송은 삼국시대에도 있었으나, 그것이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려와 조선은 모두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체제하에 육운(陸運)의 역마제도와 수로(水路)의 조운제도(漕運制度)를 확립하고 있었다.
조운에는 수납된 세곡을 보관하는 조창(漕倉)과, 이를 수송하는 조선(漕船), 그리고 조운에 고정배치되어 조창의 입·출고작업과 조선의 양적작업을 하는 조군(漕軍)이 있었다. 물론 이들 조군은 오늘날의 부두노동자와 동일한 성격의 노동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의 취역은 의무적인 부역임과 동시에 세습제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입역제(入役制)가 폐지됨과 동시에 포(布)를 대신 바침으로써 신역(身役)이 면제됨에 따라, 국가는 조군 대신 자유신분인 격군(格軍)을 배치하였다. 뒤이어 조운마저 폐지되자, 해상수송은 각 포구의 객주업(客主業)에 의한 운송업으로 대체되었고, 객주들은 하역작업을 위하여 담군(擔軍)이라는 부두인부를 사용하였다.
부두노동자가 근대적 임금노동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개항장(開港場)에서의 국제상업무역이 본격화된 것을 계기로, 하역업이 객주업에서 독립적 하역기업으로 전환된 때부터이다. 개항과 함께 급격히 증가한 물동량(物動量)의 수송과 하역산업의 발달은 부두의 임금노동자를 급증시켰고,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단체의 조직과 노동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 말인 1898년에 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성진부두노동조합은 우리 나라 최초의 노동조합으로 인정되고 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자본에 의한 노동의 절대적 종속이 강요되고 식민지적 착취가 감행되는 가운데,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의 영향으로 임금인하 등 노동조건이 열악화되자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부두노동자들은 그 대부분이 숙련공이 아닌 미숙련공인 데다가 그 성격 또한 이합집산이 많은 자유노동자이므로 임금수준이 다른 산업노동자에 비하여 훨씬 낮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 9월의 부산부두노동자쟁의, 1929년 1월의 원산부두노동자파업, 그리고 1932년 2월의 청진부두노동쟁의 등 각지에서 크고 작은 부두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
일제하에서의 하역기업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독점되었기 때문에 부두노동쟁의는 항상 민족적 대립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오늘날의 부두노동자들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데다가 독특한 집단작업과 고용형태로 말미암아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해상수송이 컨테이너수송체제로 전환되고 선박도 자동시설을 갖추게 됨에 따라, 부두노동자도 단순한 육체노동자에서 크레인·포크립트와 같은 화물운반기기의 운전수를 비롯한 기능인으로 바뀌어가고 있다.